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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새장을 벗어난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1.
내가 전화해 만나자고 하자 엘만은 CIA 안가로 나를 불렀다.
“자네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인 것 같군.”
엘만은 간단한 인사를 한 다음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나는 엘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부장님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질문까지······. 점점 흥미롭군. 뭔가 말해 보게. 물어보고 싶은 게 뭔가?”
내 질문에 엘만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지부장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에 대한 미국 정부와 CIA의 방침은 어떤 것입니까?”
“자네가 그걸 왜 묻나?”
내 질문에 옆에 있던 조엘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외부 팀이 이제 월권까지 하려는 것인가? 자네 팀은 어디까지나 우리 일을 도와주는 것이지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지는 자네가 간섭할 바가 아니야!”
나는 조엘을 무시하고 엘만 지부장을 보며 말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에 관한 일은 저희 팀도 관여가 된 일이니 질문할 자격 정도는 있을 텐데요?”
엘만이 손을 들어 다시 나서려고 하는 조엘을 막았다.
“틀린 말도 아니지.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뭔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아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병을 핑계로 미국으로 망명을 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 그 이야기 말이군.”
엘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이 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네.”
“망명을 받아 준다고 해도 에스트라다가 우리 말을 들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 말에 엘만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떻게 하나? 에스트라다는 어떻게든 감옥에서 나오겠다고 하고 아로요 쪽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데······. 그렇다고 지금으로서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네. 그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병원에 계속 잡아 두는 데는 한계가 있어. 이대로라면 에스트라다 지지자들이 감옥이라도 습격할 분위기야.”
“하······.”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스트라다가 거액을 횡령하고 뇌물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그러면 뭐 하나, 증거가 부족한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차명 계좌인데 에스트라다 쪽에서 자기 계좌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어.”
“차명 계좌에 있는 자금이 미화 6천만 달러가 넘는 데 그걸 포기했다고요?”
“그래.”
“그쪽에서 단단히 결심했나 보네요.”
“어차피 범죄로 얻은 소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전액 몰수당할 돈이니까.”
“그런데 차명 계좌를 에스트라다가 직접 서명했다면서요?”
“직접 서명했지. 그런데 에스트라다 변호사가 필적감정을 새롭게 받아서 에스트라다가 직접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증언을 받아 냈어.”
“사실입니까? 필적감정을 하는 전문가가 돈을 받고 허위 진술을 한 것이라면······.”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조사해 봤는데 서명이 조금 흐릿해서 정확히 에스트라다 필적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 우리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
“중간에 증거가 훼손된 것은 아니고요?”
증거 훼손.
법정에서 증거가 증거 능력을 잃은 가장 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같은 대통령이 신경 쓰는 사건의 증거가 훼손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여기는 필리핀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에스트라다 지지자는 경찰, 검찰, 법원에 여전히 많았다.
꼭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단돈 몇십 달러에 경찰이 청부 살인을 하는 나라였다.
“그것도 확인했네. 놀랍게도 원래부터 그런 상태였다고 하더군. 에스트라다가 계획적으로 한 일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자기 이름이 아니라 가명이다 보니 생긴 일인 것 같네.”
증거 훼손도 아니라니 골치가 아팠다.
“아니, 에스트라다를 잡아넣은 지 거의 1년이 지났는데 핵심 증거가 그런 상태라는 사실을 이제야 밝혀졌다는 말입니까? 필리핀 정부는 그렇다고 해도 우리도 확인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야 했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작년 봄에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제3차 피플파워가 있지 않았나. 그 후에는 아부사야프의 납치 사건이 있었고 말이야.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에는 911 테러가 있었지.”
엘만 지부장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변명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작년 한 해 일이 많았던 나라가 필리핀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인도네시아와 함께 가장 일이 많았던 두 나라 중 하나였다.
이 두 나라가 나를, 아니 정확하게는 에이전트 에스 팀을 가장 찾은 것은 그만큼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리 확인만 했어도 서류를 위조라도 했을 텐데······.”
엘만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미리 알기만 했어도 서명을 위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스트라다 본인조차 자신이 서명한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감쪽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지금은 에스트라다의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었다.
“그래도 에스트라다를 이대로 풀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지부장님도 필리핀 하층민들 사이에서 에스트라다의 인기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네. 그대로 풀어 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 영향력 아래 두면 그나마 나으니까 말이야.”
“안 됩니다. 새장을 떠난 새를 다시 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미국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한 그의 인기라면 다른 사람을 지원해서 당선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치료를 명분으로 에스트라다를 미국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통제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지금 미국이 기본권을 제한하는 분위기라고 해도 외국의 전직 대통령을 가둬 두거나 언론과 접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외부 팀만 못해서 미국으로 데려가려는 줄 알아!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일이야! 어디서 감히 외부 팀의 말단 요원이 감히 지부장님께 충고하는 거야! 너희는 우리가 하라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조엘이 한 걸음 다가가오며 말했다.
나는 짜증이 났다.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조엘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제가 방법을 찾으면요?”
“방법이 있나?”
엘만이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어서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 생각에는 이번에 증거를 무효화시킨 변호사인 헥터 히메네스와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분리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자가 계속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곁에 있으면 이번에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그자가 다른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요.”
현재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변호사인 헥터 히메네스는 필리핀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인권 변호사였다.
“어떻게 말인가? 그는 작년 제3차 친에스트라다 피플파워에서 참여한 에스트라다의 열성적 지지자네. 아로요 측에서도 회유나 협박을 해 봤지만 모두 실패했네.”
엘만이 말했다.
“찾아봐야죠. 일단 지부에서 가지고 있는 에스트라다의 재판 자료와 헥터 히메네스에 관한 자료를 모두 복사해 주십시오. 제가 오늘 검토해 보고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죠.”
나는 엘만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뭔가 생각이 있나 보군?”
내 웃음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엘만이 물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자료를 읽어 보고 확신이 생기면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조엘!”
엘만은 옆에 서 있는 조엘을 바라보았다.
“여기 수이진 요원이 원하는 자료를 모두 전해 주게.”
“아······ 알겠습니다.”
조엘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런 조엘의 모습이 한심했다.
능력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능력이 없는 데도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은 더 문제였다.
CIA의 현장 요원은 미국 국익을 위해서 일하는 최전선이자 CIA의 정예였다.
지난번 미수아리 반란 때는 나름 활약했다고 들었는데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2.
내가 엘만 지부장을 다시 만난 것은 다음 날 밤이었다.
“늦었군.”
엘만 지부장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불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약속을 일방적으로 밤으로 미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헥터 히메네스가 만만치 않더군요.”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이해하네. 나도 만나 봤는데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욕심이 많은 인물이더군.”
“예.”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인기를 이용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거물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더군. 그래서 어지간한 회유나 협박에 넘어오지 않았던 것이고 말이야.”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어제 지금 이야기해 주셨으면 조금 일이 쉬웠을 텐데 아쉽네요.”
“세상일이 그렇게 쉽기만 해서야 재미가 없지. 더구나 직접 겪어 봐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지.”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그는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나름대로 나에 대한 심술인 듯했다.
“예. 덕분에 직접 만나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완전히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더군요.”
“음? 직접 만나 봤다고?”
“예. LA 타임스 기자라고 하더니 만나주더군요. 언론을 상당히 좋아하더라고요.”
정치적 야망이 큰 인물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언론 기자를 만나는 것을 즐긴다는 점이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네.”
“그럴지도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ABS-CBN의 TV패트롤을 방송을 잡아 주실 수 있습니까?”
ABS-CBN는 필리핀 최고의 민영방송사였다.
그중에서도 TV패트롤은 메인 뉴스로 필리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프로라고 할 수 있었다.
“TV패트롤을?”
“예.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그 정도 프로는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메인 기사면 더 좋고요.”
“헥터 히메네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헥터 히메네스가 요즘 화제의 인물이라고 해도 TV패트롤 메인 기사로 나가기에는 좀 약하네.”
“방송에 나갈 사람이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라면요?”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설마 헥터 히메네스에게 TV패트롤에 에스트라다 인터뷰를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나?”
“약속했죠.”
“아로요 대통령이 그걸 그냥 두고 볼 것 같은가?”
“저는 아로요 대통령이 오히려 환영할 것 같은데요.”
“뭐?”
“그 인터뷰에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자신이 차명 계좌의 서명을 직접 했다는 것을 인정할 테니까요.”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원하시면 미리 인터뷰 질문과 답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녹화하고 자백이 없으면 방송을 하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게 말이 되나?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데······. 에스트라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자신을 반쯤 풀려나게 한 변호사가 한 조언이니까요.”
“헥터 히메네스를 설득한 건가? 어떻게······?”
엘만이 물었다.
“헥터 히메네스가 딸을 굉장히 아끼더군요.”
“설마 자네······. 헥터 히메네스를 협박한 것인가?”
“협박이라니요. 그냥 딸에 대해서 몇 마디 했더니 바로 제 제안을 받아들이더군요.”
“그의 딸에게 뭔 짓이라도 한 것인가?”
“그럴 리가요?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낮에 만나서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면서 친구들과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sa)로 놀러 갈 수 기회를 준 것뿐입니다. 며칠 동안 딸과 연락이 안 되는 것뿐인데 헥터 히메네스가 오해하더군요.”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필리핀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였다.
특히 내가 준 여행 상품은 어지간한 필리핀 부자도 큰 결심을 해야 하는 초호화 여행이었다.
“자네······.”
엘만 지부장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헥터 히메네스로서도 나쁠 것이 없는 일입니다. 헥터 히메네스에게 에스트라다보다야 우리나 아로요 대통령이 줄 것이 많지 않겠습니까? 전에야 헥터 히메네스가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적당한 감투 정도겠지만 우리가 도와주면 그의 야망대로 고향에서 의원이나 주지사가 되는 것도 가능하죠.”
“그렇기야 하지······.”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죠. 아로요 대통령과 우리는 골치 아픈 존재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고 헥터 히메네스의 딸은 친구들과 초고급 여행을 가서 좋고 헥터 히메네스도 딸에게 점수도 따고 야망도 이룰 수 있으니 더는 좋을 수가 없죠.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우리와 함께하면 앞으로도 탄탄대로고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만 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