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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고양이도 왕을 쳐다볼 수는 있다
1.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이 차명 계좌에 서명했다고 대답한 인터뷰가 방송되고 여론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다음 날 주요 신문 1면은 미스터리한 자백이라는 기사가 장식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사가 난 그날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자신의 변호사인 헥터 히메네스를 해고했다.
엘만 지부장의 말에 의하면 해임된 헥터 히메네스는 몇 달 후에 자신의 고향에서 검사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헥터 히메네스가 그 경력을 기반으로 다음 선거에서 출마할 지 출마해서 당선될지는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결과를 확인한 나는 마닐라에서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1년이 넘어서 이제는 스파이 활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나로서도 이번 일은 힘든 일이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석방되기까지 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번 일은 나로서도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변호사를 가족을 빌미로 협박한 일은 아직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헥터 히메네스의 딸을 직접 납치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헥터 히메네스를 협박하는 순간에는 내가 납치한 것처럼 자기최면을 걸고 말하고 행동했다.
헥터 히메네스의 딸이 타고 있던 요트의 조종사가 리코의 부하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납치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준비까지 한 것은 상대는 경험이 많은 변호사였기 때문이었다.
헥터 히메네스는 납치할 수 있다는 각오가 없이 단순히 엄포만으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행히 이런 내 각오가 내 말과 행동에서 드러났는지 아니면 헥터 히메네스가 딸과 연락되지 않는 것에 당황해서인지 내 협박은 통했다.
나는 돌아오는 내내 내가 에스트라다의 석방을 그런 짓을 해 가면서 막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에스트라다가 석방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 나는 폭주 기관차처럼 움직였다.
에스트라다가 자백할 때는 짜릿했다.
들뜬 기분은 출국 절차를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항공기가 이륙하고 얼마 후에 폭주 기관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든 생각은 내가 왜 그렇게 폭주했느냐 하는 후회였다.
어떤 일은 자신이 하고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이번 필리핀에서의 일도 그랬다.
에스트라다는 필리핀 국민의 돈을 최소 수천만 달러를 횡령한 범죄자였다.
하지만 그게 내가 그의 석방을 막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금 아로요 대통령도 그리 깨끗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지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해 온 일을 생각하면 정의감으로 움직였다고 하는 것은 웃긴 일이었다.
엘만 지부장에게는 미국의 국익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애국심이 넘치는 요원은 아니었다.
진짜 미국 국익을 생각했다면 CIA를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에디 미첼에게 나를 소개한 존 베비스는 나를 정확히 본 셈이었다.
애국심이 넘치는 요원이었다면 에디 미첼의 제안을 들었을 때 거절했을 것이다.
받아들였다고 해도 에디 미첼이 죽었을 때 바로 본부에 사실을 말하고 본부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움직인 동기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였다.
다만 그게 무언지 나도 잘 모를 뿐이었다.
에스트라다가 석방되면 내가 입을 손해는 적지 않았다.
에스트라다가 석방되면 필리핀의 정국은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리코를 통해서 하려는 BPO 사업이나 어학연수 사업 모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작년 초 두 번의 피플파워를 거치면서 필리핀의 관광업은 상당히 위축되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트라다 석방을 막은 일은 내 필리핀 사업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납치 가능성까지 생각하면서 누군가를 협박할 만한 일이었을까?
필리핀 사업이 리코에게야 전부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필리핀의 사업이 리코의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범죄를 저지를 만큼 큰 금액은 아니었다.
사업에서 얻는 이익은 내가 투자로 일주일에 벌어들이는 금액보다 적을 것이다.
그럼 내가 폭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에스트라다가 석방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불쾌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아리송했다.
서울로 오는 내내 생각해 봤지만, 명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시는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를 협박하기 위해 납치까지 할 생각을 하다니······.
미친 짓이었다.
지금이야 어쨌든 CIA였으니 일이 잘못되더라도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퇴직한 이후에도 이런 행동을 하다가 잘못되면 말 그대로 끝장이었다.
2.
서울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호텔로 홍콩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리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먼저 연락이 온 것이었다.
- 역시 서울에 있었네? 홍콩에 들르지 않고 바로 서울에 간 거야?
리안이 섭섭한 말투였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 홍콩에 들렀다 가도 비행시간 2시간 정도 더 걸리지 않잖아?
“이번에는 필리핀에서 조금 일이 있었어.”
- 너 홍콩에 들렀다 갈 줄 알고 조민하고 브레이크가 많이 기다렸었어.
“그래? 무슨 일로?”
내가 물었다.
- 조민에게 휴렛팩커드 주식 공매도 지시했었다면서?
“그랬지. 그게 왜?”
- 이번 주에 휴렛팩커드 합병 표 대결에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그 문제로 조민이 너하고 할 이야기가 있었나 봐.
아무래도 조민이 휴렛패커드 주식을 공매도하면서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민이 먼저 제안하고 재무 상태를 잘 알던 엔론의 공매도와 달리 휴렛팩커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민에게 투표 결과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 줘. 계속 공매도를 유지하고 기회가 있으면 더 늘리라고 말이야.”
- 넌 결과가 어떻게 나오리라 생각하는데?
“어차피 의결권 자문 기관들이 합병 찬성 의견을 낸 이상 합병 찬성으로 결과가 나올 거야.”
휴렛 팩커드의 개인 최대 주주는 창업자 가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래 봐야 창업자들이 모두 사망했다.
창업자의 후손들이 가진 지분을 모두 합쳐도 한 자리 숫자였다.
합병의 열쇠를 쥔 연기금은 의결권 자문기관의 조언에 따라서 합병을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 조민에게 듣기는 했지만 역시네. 합병이 통과하리라 생각하면서 공매도를 지시하다니······. 이번 합병이 그만큼 잘못된 합병인가?
리안이 물었다.
“나만이 아니지. 나만 그런 생각을 했다면 조민에게 공매도를 지시하지 않았겠지.
공매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휴렛팩커드의 주가가 내려야 한다.
- 하긴 나도 확인해 보니 휴렛팩커드의 주가가 안 좋기는 하더라. 시장 반응이 그런데도 합병이 통과된다니 이걸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합병에 관한 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가가 내려간다는 것은 현재 주주는 물론이고 시장도 합병에 부정적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그 주주들이 투표하는 합병 투표에서는 합병이 통과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게 피오리나 대표의 능력이지.”
역시 최초의 여성 CEO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 하여간 조민에게는 네 말 그대로 전할게. 그리고 브레이크 말인데······.
“브레이크는 왜? 지난번에 브레이크 주장대로 독일 증시가 떨어진 것 때문에 그래? 하락 폭이 작기는 하지만 내가 대단히 만족하더라고 전해 줘. 앞으로도 열심히 해 달라고 말이야.”
지난번 브레이크는 리안을 통해서 독일 증시가 하락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말대로 오늘까지 독일 증시는 썩 좋지 않았다.
물론 하락률이 0.5% 정도라서 큰 차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브레이크가 독일 증시 방향을 맞춘 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 말은 브레이크에게 전해 줄게. 브레이크가 너를 기다렸던 것은 그 일 때문은 아니고 러시아 투자 때문이야.
“러시아? 러시아는 이제 브레이크가 손 뗐잖아?”
예전 브레이크가 맡고 있던 투자는 아예 독일로 바꿨고 다른 투자인 AAM은 아예 선물에 투자한 채 건드리지도 않고 있었다.
- 그렇기는 한데······. 너는 여전히 러시아에 투자하고 있잖아. 네가 계속 투자하는 것 알고 꼭 알려 줄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고.
나는 올 초부터 브릭스 국가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었다.
예전 투자와는 달리 선물이 아니라 브릭스 국가 증시에서 상장된 우량 기업들 위주였다.
“무슨 정보인데?”
- 그게 나한테도 말을 안 해 줘. 너한테만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쁘냐. 나랑 먼저 알았고 평일에 거의 매일 만나는 나를 못 믿는다는 것인지······.
“기분이 나쁘기는 무슨······. 중요한 이야기인가 보지. 어쨌든 알았어, 내가 러시아 증시가 개장하기 전에 연락할게.”
- 그렇게 전할게. 중요한 이야기를 안 했네. 다음 주 투자는 어떻게 할까?
“아! 정말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나. 그런데 사실 특별한 것은 없어. 휴렛팩커드 때문에라도 기술주가 별로 안 좋을 테니 나스닥은 안 좋을 테고······. 타이완은 경제 침체 때문에 경제 장관 사퇴하라고 야당이 난리일 정도니 역시 약세일 테고······. 홍콩도 지난주에 생각보다 주가가 너무 올랐으니 살짝 조정을 거칠 것 같고 말이야. 나스닥은 안 좋
겠지만 다우는 괜찮을 것 같으니 다른 나라 증시는 오르지 않겠어?”
- 그럼 홍콩 항셍 지수 그리고 타이완 자취안 지수만 숏 포지션으로 잡고 나머지는 롱 포지션으로 잡으면 되는 거네.
내가 개인적으로 투자하는 브릭스 국가 중 일부는 상황이 좀 다르겠지만 팀이 맡은 투자 방향은 리안의 말대로였다.
“대충 그렇지.”
-알았어. 그럼 그렇게 알고 투자 방향 잡을게.
리안과의 전화를 끊고 브레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브레이크는 사무실과 휴대전화 모두 받지 않았다.
나는 일단 문자로 메일로 보내라는 연락을 남겼다.
3.
“직접 주식을 직접 매매하는 것은 꽤 오랜만인 것 같네요.”
내 말에 옆에 있던 하성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이닉스 주식을 매매하면서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되죠. 여기 한국에서는 원숭이도 한 번은 사고판 적이 있는 주식이 가이닉스 주식입니다.”
원숭이도 주식거래를 한다는 말은 좀 과장이 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약 원숭이가 한국에서 주식을 거래한다면 아마도 그 주식은 가이닉스 주식일 것이다.
그만큼 지난 몇 년간 한국 거래소에서 매매되는 주식 대부분은 가이닉스 주식이었다.
한국 투자자들이 가이닉스 주식을 주로 거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가총액이 크고 거래량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이닉스는 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들이 재벌 기업 계열사 두 개가 합병한 기업이었다.
워낙 큰 기업이다 보니 주가가 폭락한 지금도 여전히 시가총액이 단일 기업으로는 손에 꼽혔다.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량 자체가 많았다.
무엇보다 가이닉스는 주가를 관리할 주인 자체가 없는 기업이었다.
여기에 마침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한국 개인 주식 투자에 증가에 힘입어 하루 주식 거래량의 절반 이상이 가이닉스 주식거래였다.
가이닉스 거래에서 내 상대는 ‘개미’라고 불리는 이런 개인투자자였다.
외환 시장과 채권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제러미 하, 하성철은 물론이고 나도 이런 개인투자자를 상대로 이익은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말했지만 내가 손이 늦다고는 하지만 그건 상대가 전문 트레이더일 경우였다.
“뉴스처럼 마이크론이 가이닉스를 인수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하성철이 물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 정부는 어떻게든 가이닉스를 매각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요?”
“그래도 듣자니 마이크론은 가이닉스 인수 대금을 전액 마이크론 주식으로 낼 생각이라고 하던데······. 이건 가이닉스를 돈 한 푼 안 들이고 인수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채권단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글쎄요.”
나는 모르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경제적인 논리만 생각하면 하성철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엘리어스를 통해서 나는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가이닉스 매각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구한 것이었다.
이건 마이크론이 백악관에 로비한 결과였다.
마이크론은 아이다호주의 최대 기업 중 하나였고 아이다호는 미국 서북부에서 공화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
마이크론의 목표는 가이닉스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엘피다에 대한 마이크론의 인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엘리어스는 미국 정부가 일본 고이즈미 총리에게도 비슷한 요구를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많은 일은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서 이뤄지는 법이었다.
엘리어스가 전화한 것은 내가 그렇게 가이닉스 매각을 확신하며 주식을 거래하던 때였다.
- 혹시 주말에 시간 있으십니까?
“바쁜 일은 없습니다만? 무슨 일 때문인지?”
- 다음 주 고이즈미 총리의 한국 방문 때문에 주일 미국 대사관에서 직원 한 분이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요?”
- 그분이 마침 일본 CIA 화이트 요원이라서 에드릭 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보는 것이 어떨까 해서요?
엘리어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요원 이름?”
- 단테 패트릭 요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