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98화 (199/270)

(198)

#199. 닭은 보금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1.

단테 패트릭을 한국에 와서 엘리어스를 만날 예정이다.

그리고 엘리어스는 그 자리에 나를 참석시키려고 한다.

끔찍한 위기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 일하게 되면 단테 패트릭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스치듯 만나는 것과 이번 일은 전혀 달랐다.

나는 단테 패트릭을 만날 때 나름대로 꽤 조심을 해 왔었다.

다른 요원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완벽하지는 않지만, 변장도 했었다.

설사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단테 패트릭을 만난다고 해도 그가 곧바로 나를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니, 설사 그가 나를 알아본다고 해도 작전 중이라고 생각할 테니 먼저 접근할 가능성은 없었다.

나중에 묻더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엘리어스가 내게 단테 패트릭을 소개하려는 이유는 내가 CIA를 그만두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내가 CIA 요원이라는 사실과 아시아 지역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단테 패트릭이 아는 상태에서, 그것도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했다.

단테 패트릭은 현장 요원이 아니었다.

내가 본 그는 현장 요원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관찰력이나 조심성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CIA 경력은 10년이 훌쩍 넘었다.

밀폐된 장소에서 단 셋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도 내 정체를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기를 기대한다?

이건 기적을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테 패트릭이 내 정체를 눈치챘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단테 패트릭은 정보 요원이라기보다는 공무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와는 달리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있었고 CIA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만약 단테 패트릭이 애국심이나 충성심이 없었다면 조직 개편 때 그만뒀을 것이다.

10년이 넘게 일했던 조직이 사라지고 생소한 일에 배치받는 것은 단테 패트릭의 나이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단테 패트릭은 내 정체를 알게 되면 퇴직을 일단 막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존 베비스나 엘리어스 그리고 더 나아가 엘리어스의 아버지는 물론이고 윗선에도 나에 대해 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급조한 에이전트 에스 팀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내가 주로 접촉한 CIA 직원은 일본의 단테 패트릭, 필리핀의 엘만 지부장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 이 세 명이었다.

그리고 이 세 명 나를 처음 만났던 시기에는 모두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바빠서 내 정체를 캘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는 굳이 내 정체를 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에이전트 에스 팀이 지금까지 비밀이 지켜진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 내가 비밀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본부 차원에서 조사를 본격적으로 하면 에이전트 에스 팀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렇게 조사가 시작되면 결국에는 내가 에디 미첼을 도와서 한 일이나 그 뒤에 투자로 거액을 벌어들인 일도 알려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절대 엘리어스와 함께 단테 패트릭을 만나서 CIA 요원이라고 소개받는 일은 피해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만남을 피하느냐였다.

나는 우선 엘리어스에게 만나서 단테 패트릭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약속을 잡고 만났다.

“그러니까 단테 패트릭 씨에게는 그냥 동행이 있다고 이야기했을 뿐 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말이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여기 한국에서도 북한이나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비밀을 최소한의 보안도 되지 않은 곳이나 전화로 이야기할 수는 없죠.”

“하긴 한국도 지난 정부 때는 국정원을 동원해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도청했고 이번 정부에서는 경찰을 동원해서 민간인 사찰을 했었죠. 미국 대사관이나 대사관 직원이라고 도청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요. 다른 국가는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요.”

“맞습니다. 누가 전화를 도청할지 모르는데 CIA 요원의 신상을 말했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요.”

다행이었다.

아마도 주말에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CIA 직원이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걸 물으십니까? 혹시 주말에 무슨 일이라도?”

엘리어스가 물었다.

“주말에 일 때문에 한국에 없을지도 몰라서요.”

“외국에 나가십니까?”

엘리어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속이 없다던 내가 갑자기 외국으로 나간다고 하니 수상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신경을 써서 이번 만남을 주선하셨는데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죠. 혹시 주말에도 한국에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일단 변명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한국에 남아 계셨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오시는 단테 패트릭 씨는 올해 안에 본부로 승진하는 것이 거의 확실한 분입니다. 본래 본부 소속이라서 아직도 본부에 줄이 있고요. 알게 되면 퇴직하는 데 꽤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저도 한국에 남아서 그분을 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겠죠.”

엘리어스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한 듯했다.

2.

엘리어스와 만나서 겨우 급한 불은 껐다.

최악의 경우에는 약속을 피할 수단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엘리어스는 단테 패트릭이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다음 주에 있을 한일정상회담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한국 일본의 3국 동맹을 통해서 중국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북태평양 함대를 막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한일관계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이었다.

이번 한국 정부가 들어서고 한일 관계는 지난 정부보다 가까웠다.

물론 작년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이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위기가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의 대통령은 야당 시절부터 일본 정치인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대선에서 아깝게 패한 후 암살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치료를 위해 간 곳이 일본이었다.

첫 번째 망명지로 택한 곳도 일본이었을 정도였다.

이런 양국 관계는 올해 들어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면서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상태였다.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과정에서 양국 정상이 각각 한국에 일본에서 열리는 개회식과 폐회식에 번갈아 참석할 것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만약 단테 패트릭이 양국 정상회담에 관한 실무를 하고 있다면 언제 한국에 올지 몰랐다.

그렇게 한국에 올 때마다 엘리어스에게 핑계를 대고 피할 수는 없었다.

당장 이번에 참석하지 않을 핑계를 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심을 산 상태였다.

가장 간단한 길은 단테 패트릭에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앞에서 말했듯이 자칫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미친 짓이었다.

그렇다고 예전 야쿠자들을 처리했듯이 단테 패트릭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CIA의 화이트 요원이 우방국에서 살해당한다면 그 여파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 방법뿐인가?’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계획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바쁜 상황에서 일을 더 벌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원하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3.

나는 약속 장소에서 먼저 나가 단테 패트릭이 오기를 기다렸다.

단테 패트릭은 나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걸려 온 전화가 와서 많이 놀랐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먼저 연락이 오다니······.”

“그러게요. 그래도 일본에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부지부장님밖에 없어서요.”

“우리가 연락한 것이 꽤 오랜만이지?”

단테 패트릭과 내가 함께 일을 한 것은 지난번 파병안을 통과시킬 때가 마지막이었다.

“부지부장님이 제게 연락을 할 일이 없고 저도 먼저 연락할 일이 없는 게 좋은 것이죠. 둘 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서로 연락이 없는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은 연락했을 때는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자네가 먼저 연락을 했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군.”

“예. 유감스럽게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문제가? 나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즈키 무네요 의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바로 물었다.

“스즈키 무네요? 골치 아픈 인간이지. 자네와 내가 주저앉힌 하시모토파의 중심인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 사람이 왜?”

단테 패트릭이 되물었다.

스즈키 무네요는 이제 50대 초중반이지만 83년 35살에 당선된 이후 20년간 의원 자리를 지킨 인물로 현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의 핵심 파벌이었다.

“그 스즈키 무네오를 자민당에서 쫓아낼 생각입니다. 아니, 감옥에 보낼 생각입니다.”

“뭐라고?”

예상하지 못한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즈키 무네오를 자민당에서 쫓아낸 이후에 감옥에 보낼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아니, 왜? 아니지.”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스즈키 무네오는 자민당 최대 계파인 하시모토파의 중심인물이야. 전 총리였던 최대 계파의 수장인 하시모토의 오른팔이라고······. 자민당에서 쫓아내고 싶다고 쉽게 쫓아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네.”

단테 패트릭의 말을 듣던 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든 단테 패트릭을 설득해야 했다.

“1월에 다나카 마키코 외상이 경질되고 한동안 외상 자리가 공석이었던 것은 아시죠.”

“정확하게는 고이즈미 총리가 한동안 외상을 겸임했었지.”

“그랬죠. 그때 고이즈미 총리가 외상으로 염두에 두었던 인물이 오카다 사다코 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이었다고 하더군요.”

“맞아. 고이즈미 총리의 외상 제안까지 했는데 오카다 사다코 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은 거절했지.”

“하지만 본인이 외상이 하겠다고 나선 인물도 있었죠.”

“자네가 조금 전 이야기한 스즈키 무네오가 외상을 하겠다고 나선 인물이지. 고이즈므 총리가 거절하고 가와구치 요리코 환경상이 외상을 임명했지만 말이야.”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죠. 그런데 스즈키 무네오가 요즘 일본 외무성 관리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음, 알고는 있네. 하지만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간섭할 일도 아니고 말이야. 스즈키 무네오는 자민당 내에서도 외교통이네. 외무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오부치 내각에서 관방성 부장관으로 있을 때는 실질적인 외부성의 장관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다나카 마키코 의원이 외상으로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뒀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카코 마키오 의원은 하시모토파를 싫어하니까.”

스즈키 무오네를 비롯한 하시모토파는 거슬러 올라가면 예전에는 모두 다나카파에 속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보스인 다나카 가쿠이에 의원이 뇌물로 위기에 몰리자 그를 배신했었다.

다나카 가쿠이에의 딸인 다나카 마키오 의원이 지금의 하시모토파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나카 마키오 의원은 경질됐고 지금 외상인 가와구치 요리코는 전문 관료 출신이고 본래 통산성 출신이니 텃세가 심한 외무성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지. 스즈키 무네오로서는 다시 외무성에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하더군.”

“그래서 스즈키 무네오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스즈키 무네오가 외무성을 장악하면 중국과 러시아의 아시아 영향력이 늘어날 테니까요.”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건 아무리 우리라도 너무 나가는 것 같군. 이 일이 알려지면 고이즈미 총리라도 내정간섭이라고 생각할 거네. 이게 이번 일이 에이전트 에스 팀의 공식적인 작전인가?”

단테 패트릭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부 지부장님을 도와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부 지부장님이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이니 팀의 공식적인 작전이 맞았다.

물론 작전의 목적이 국익이 아니었다.

“휴······ 알겠네. 자네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을 생각하면 도와야겠지. 언제까지 하면 되나?”

“6월까지입니다.”

“월드컵이 개최되는 달이군. 이거 내가 지금 하는 일을 함께할 수는 없겠군. 알았네, 내가 했던 일을 일단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자네 일을 도와주지.”

단테 패트릭을 한국에 오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나는 아마 이 일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든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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