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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권력은 돈으로 살 수 있다
1.
조언이 구할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일을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엘리어스를 돕는 정도야 그의 아버지 인맥을 통해 CIA를 그만두려고 할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었다.
더욱이 엘리어스는 그로서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완전히 선의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나를 임시직으로 채용해 주기로 했다.
주일 미국 대사관의 CIA 화이트 요원인 단테 패트릭을 내게 소개해 주려고 하기까지 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엘리어스를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이었다.
며칠 전까지 단테 패트릭을 한국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일본에서 일해야만 했다.
단테 패트릭을 일본에 계속 붙잡아 두려면 아마 몇 달간은 일본을 오가면서 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하면 엘리어스가 조언이 필요하다는 말에 선뜩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 참······. 엘리어스 씨나 엘리어스 씨의 아버님이 제게 해주시는 일을 생각하면 기꺼이 도와야 하는데 지금 제 상황이······.”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시겠지만 지금 제 신분이 좀 그래서······. 기관에서야 연수를 보낸 것이지만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직원일 뿐입니다. 한국에 파견 온 직원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제가 일하는 회사는 투자회사입니다. 실적이 전부인 곳이죠. 그런데 최근 본국의 철강 보호관세로 한국 주식시장 상황이 좀 그렇잖습니까. 얼마 전까지 가이닉스 주가가 꽤 좋았는데 그 주식을 매매해야 할 때 제가 일본에 갔다가 오느라 시기를 놓쳤습니다.”
“결국, 실적이 문제라는 말입니까?”
“뭐 그렇죠. 투자회사 직원이 딴 게 뭐 있겠습니까?”
“저는 에드릭 씨 실적이 훌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닙니까?”
“뭐······. 제 실적이야 나쁘지 않죠. 그렇지만 이쪽이 한 번 실적이 좋아도 계속 좋은 실적을 내 주기를 바라는 곳이라서요. 대사관이랑은 좀 다르죠.”
“이걸 어쩌나······. 좋습니다.”
잠시 초조한 듯 무언가를 생각하던 엘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에드릭 씨의 그 실적을 책임져 준다면요? 그럼 제 일을 도우실 수 있겠습니까?”
“예? 제 실적을 책임져 주신다고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놀라 되물었다.
실적을 책임져 준다니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예. 만약 에드릭 씨가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에드릭 씨의 일을 돕겠습니다. CIA의 일이 아니라 투자요.”
“그건······.”
내가 엘리어스의 부탁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이번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부탁을 거절하기 위한 것은 단지 일본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뜩 내가 엘리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물론 일본 일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갑자기 일을 벌이게 된 것이나 한동안 일본을 오가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나 생각하면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엘리어스가 나를 도와주려다가 생긴 일이고 내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이다가 생긴 일이었다.
내가 엘리어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더는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를 돕다가 생긴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이번 부탁을 거절하려는 이유는 나중에 대사관에서 함께 일할 때를 생각해서였다.
이전에 엘리어스가 부탁할 때마다 도와준 것은 그의 인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그의 아버지 도움으로 CIA를 그만두는 것은 거의 확실해졌다.
하지만 이제 얼마 후면 엘리어스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그때도 매번 엘리어스가 부탁할 때마다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대사관을 그만둔 나중에도 계속 부탁을 들어줘야 할 수도 있었다.
이미 대사관을 그만뒀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매번 부탁을 들어주다가 안 들어주게 되면 섭섭하게 생각하게 마련이었다.
엘리어스는 그때 내게 원한을 가진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엘리어스는 국무부의 직원일 테고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대통령의 후원자 중 한 명일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절했는데 대뜸 내 투자를 돕는다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을 통해 얻은 정보라면 저는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한국이 내부 거래에 대해 별다른 처벌이 없는 국가라고 해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대사관을 통해서 얻은 정보는 아닙니다. 아예 한국에 대한 정보도 아니고요.”
“그럼 어디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용할 수 없는 정보지만 에드릭 씨나 홍콩에 있는 에드릭 씨가 일하고 계신 회사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죠. 들었는데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나는 결국 엘리어스의 부탁을 들어 보기로 했다.
한 번 정도는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엘리어스가 정보를 주겠다고 나오는데도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2.
“지난번과 비슷한 일입니다. 북한 관련 일이죠.”
“북한이요? 북한이라면 요즘······.”
“예. 그렇죠. 악의 축 발언에 이어서 이번 달 초에 발표된 핵 대응 보고서에서 북한을 핵 공격 국가에 포함했죠.”
“예. 알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 공격 대상 국가에 들어간 이유는 북한이 ‘악의 축’ 국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지난달 중순에 대통령께서 미국·한국 정상회담에서 하신 발언들이 의미 없는 것이 되었죠. 듣자니 지금 북한은 유럽연합에 특사를 파견해서 ‘악의 축’ 국가에 선정된 것이나 본국의 핵 공격 국가 명단에 들어간 것에 대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더군요.”
“그렇겠죠. 지금 북한 정부로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 같을 테니까요.”
다른 때라면 북한도 ‘악의 축’ 발언이든 핵 공격 대상 국가든 이름이 들어갔다고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멈출지 아니면 전쟁을 더 계속할지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911 테러로 시작된 전쟁이니만큼 알 카에다를 숨겨 준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추적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맞았다.
그렇지만 이미 미국은 칼을 뽑아 든 상태였다.
그 칼끝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말 그대로 미국 정부 마음이었다.
전쟁을 계속할 명분이야 만들기 마련이었다.
전쟁이 계속된다면 북한보다는 중동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북한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최근 유럽 내에서 높아지는 반미 감정을 이용하기 위해서 북한이 특사를 파견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일 때문에 제가 좀 곤란합니다.”
“그래요? 엘리어스 씨처럼 배경이 든든한 분이 그 정도로 곤란하다니 의외네요.”
“제 실수죠. 제가 한국에 왜 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그러고 보니 엘리어스 씨 같은 분이 유럽이 아니라 한국에 온 것은 좀 의외기는 하네요.”
엘리어스는 아버지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에도 공화당의 유력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저는 앞으로 중국이 무섭게 성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무부에서 중국 관련 전문가가 필요해질 것을 생각했습니다.”
“저와 처지가 비슷하네요? 저도 중국 전문가로 연수를 하는 셈이니까요.”
“국방부에서도 중국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부서도 마찬가지고요.”
“어디나 비슷하기는 하군요.”
‘국무부와 국방부도 중국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면······. 존 베비스가 나를 홍콩에 보낸 것이 전혀 없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닌가? 이번에는 돈을 허공에 날린 셈이군.’
CIA는 방대한 조직이고 정확한 예산 감사가 어려운 만큼 가끔 예산이 잘못 낭비되는 때도 있었다.
잠시 딴생각하던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중국 전문가가 되려고 하신다는 분이 왜 한국에?”
“한국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내년에 중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아······.”
“그전에 중국의 가장 큰 동맹이라는 북한 문제에 관여한 것인데······.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네요. 911도 그렇고 이어진 전쟁이나 악의 축 발언까지······.”
“북한이 골치 아픈 나라기는 하죠.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한국 정부에서 백악관에 북한에 특사 파견을 하겠다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아직 백악관은 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허락할 예정이고요.”
“하긴 지금 대통령으로서는 북한을 포기할 수는 없겠죠. IMF 극복과 함께 본인의 최대 업적이니까요.”
“그것도 그거지만······. 요즘 한국의 경찰과 검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임기 말 아닙니까.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야당 대표고요. 검찰 경찰이 다 끈 떨어진 신세인 대통령 말을 들을 리가 없죠.”
“레임덕이군요.”
레임덕(Lame duck).
공직자의 임기 말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권력 누수 현상을 일컫는 용어였다.
특히 그 권력자가 대통령일 때 가장 흔하게 발생한다.
많은 민주국가에서 권력자가 독재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임기 제한을 헌법으로 정해 놓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임기가 단임제이기 때문에 한국의 경우는 다른 나라보다 더 심한 편이죠. 지금 검찰 경찰이 대통령의 측근은 물론이고 아들들을 재판에 세울 것 같습니다.”
“그럼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려는 것은 국민의 시선도 돌리려는 목적이겠군요.”
“자기 임기 중에 북한과의 관계를 진전시켜서 차기 대통령이 야당에서 나오더라도 자신의 성과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거겠죠.”
“그게 되겠습니까?”
“지금 야당 대표가 되면 어렵죠.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지 해 보려는 것이죠.”
“그래서 사무관님 생각은 뭡니까?”
“10월이나 11월에 중국 대사관으로 옮길 생각입니다. 그전까지는 한국 정부가 북한을 잘 다독여서 큰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거죠.”
“특사 파견에 찬성하신다는 이야기군요. 이왕이면 성과도 있었으면 좋겠고요.”
“그렇죠.”
“쉽지는 않은 문제네요. 이쪽 생각이 무엇이든 북한 정부도 바보가 아니니 한국 대통령이 레임덕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에드릭 씨에게 조언을 구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북한 정부는 경제난으로 몇 년간 수십만이 굶어 죽을 정도로 무능했지만, 외교에 관한 한 예전부터 꽤 유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제는 세계에서 최빈국인 북한이었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북한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한국의 상황이나 한국 대통령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위기에 몰려서 특사를 보내는 것을 이용해 되도록 많은 것을 받아 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한국 정부가 그 요구를 들어주기는 더 어려웠다.
그런 요구를 들어줄 정도라면 레임덕이라고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힘만으로는 어렵고······.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겠네요.”
“외부의 도움요? 그런 곳이 있겠습니까? 혹시 중국 정부에······.”
엘리어스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중국 정부라······.
리안이나 장샤오이를 통하면 어떻게 뭔가를 해 볼 수도 있을지 몰랐다.
리안과 장샤오이는 각각 공청단과 태자당의 끈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부탁을 두 사람에게 할 명분도 없었고 내가 엘리어스를 위해서 그런 부탁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마침 나는 미국과 CIA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북한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에게 부탁을 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메가와티 대통령요?”
“예. 메가와티 대통령의 아버지 수카르노 대통령은 북한의 김일성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메가와티 대통령도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과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요. 수카르노 대통령은 살아 있을 때 남북 문제에 꽤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메가와티 대통령이 나서 준다면야 도움이 되겠지만 과연 나서 주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대통령 궁에서 반쯤 은둔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아마 나서 줄 겁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작년부터 미국과 CIA에 꽤 큰 빚을 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메가와티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해외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를 통하면 세계은행에도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넣을 수 있을 겁니다.”
“한국 정부에도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적당히 해외 자원 투자나 인구 2억 시장 개척 같은 이야기로 포장하면 되니까요.”
“하긴······. 한국 국민은 해외 시장 개척을 아주 좋아하더군요.”
엘리어스가 내 손을 잡았다.
“역시······. 바로 해결책을 내놓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전에 이야기했습니다만 저와 함께 국무부에서 일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 나로서는 CIA나 국무부나 그게 그거였다.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보여 주듯 권력은 돈으로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