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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옷감에 맞춰 옷을 잘라야 한다
1.
이란과 이라크의 원유 생산량 감산을 발표할 것이라는 정보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정보였다.
이런 정보를 엘리어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알려 주었다.
대가라고는 하지만 내가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바로 나온 것으로 봐서는 미리 준비했다고 봐야 했다.
이런 대가를 내놓을 만큼 한국과 북한 관계가 엘리어스에게 중요한 일인가?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 대통령이라면 어떤 대가를 내더라도 남북 협상을 재개하는 일이 중요하겠지만 엘리어스에게는 아니었다.
솔직히 내 계획이 이런 정보를 받을 만큼 중요한 일인지 의문이었다.
더구나 이 정보는 엘리어스가 아니라 텍사스 석유 업계의 거물인 엘리어스 아버지에게 나온 정보가 분명했다.
본 적도 없는 엘리어스 아버지가 나에게 이런 정보를 아무런 이유 없이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판단했을 때 이번 정보는 ‘미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미끼’냐는 점이었다.
물으면 죽는 미끼인가 아니면 이번 정보는 단순히 찔러보는 의도인가?
수상하고 찜찜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정보였다.
옷은 옷감에 맞춰서 디자인하고 잘라야 하는 법이었다.
처한 상황과 가지고 있는 자원에 따라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건 투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엘리어스가 전해 준 정보를 내가 가지고 있는 수단과 인맥을 통해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결심을 하자마자 홍콩으로 향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모인 곳이었다.
홍콩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W&R의 대표인 카이 황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직접 뵙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네요.”
내가 대표실에 들어서자 카이 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게요. 이 사무실도 오랜만이네요.”
나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전에 3팀이 류오린 회사에 있을 때는 자주 찾아오시더니 정작 3팀 사무실을 합친 이후에는 더 뵙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전 3팀 류오린에 있을 때는 전체적인 투자를 의논하기 위해서 카이 황을 자주 찾아왔었다.
“그러게요. 그때만 해도 제가 서울에 가을까지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일이라는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래 계획은 6월 말에 류오린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W&R에서 한동안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홍콩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에 몇 년 후에 런던이나 뉴욕에 진출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911 테러라는 예상하지 못한 일 때문에 전 팀장인 존 베비스를 통해 CIA를 그만두는 데 어려움이 생겼다.
지금은 류오린과 CIA를 그만둔 이후에 반년 정도 한국 미국 대사관에서 임시직으로 일해야 할 처지였다.
“사람 일이 다 그렇죠.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제 사무실까지 찾아오신 것인지?”
카이 황이 물었다.
“여전히 RAM 투자자분들은 회사 청산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나는 본격적인 생각을 물어보기 전에 RAM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RAM은 리안 투자자들의 압박으로 세운 러시아 투자회사였다.
시작은 강제로 받은 투자였다.
그나마도 내가 처음에만 신경 쓰다가 브레이크에게 넘기고 그나마도 작년 말부터는 브레이크가 독일과 영국 투자에 전념하면서 사실상 기존 투자를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뭐 그렇습니다.”
카이 황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제가 한국에 가서 의논하려고 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1년 사이에 엄청난 이익을 벌어들인 투자입니다. 그런 투자를 청산한다는데 좋아할 분들은 없죠.”
지난 1년 사이에 러시아 주식시장은 단순 지수만 해도 2.5배 올랐다.
특히 주가 변화가 심했던 작년 여름에서 911 테러 발생 후 한 달까지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투자금을 배 이상 늘렸다.
결과적으로 작년 연말 이후 손을 뗀 상태지만 RAM의 투자금 규모는 8억 달러를 넘어섰다.
단순계산으로 초기 투자금 5천만 달러 대비 16배가 늘어난 셈이었다.
이런저런 비용과 RAM이 가져갈 수수료를 제외하더라도 엄청난 수익률이었다.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투자를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RAM의 투자자들은 욕심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화교 출신의 홍콩 유지들이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청산하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습니다. 현재 RAM은 AAM의 자회사입니다. 류오린과 계약이 끝나는 대로 AAM을 청산할 예정이고요. 그게 AAM의 투자자들 생각입니다.”
물론 AAM의 투자자란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AAM에 투자한 회사에 대한 지분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
AAM의 초기 투자금 출처는 에디 미첼이 도이치뱅크에서 부정으로 대출한 2천만 달러였다.
대여금의 만기는 6월이었지만 나는 4월에 청산할 예정이었다.
내가 굳이 AAM을 청산하려는 이유는 바로 AAM이 내 범죄의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에디 미첼이 저지른 횡령이지만 그가 죽고 없는 지금 그걸 따질 수는 없었다.
만약 에디 미첼이 횡령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AAM이 벌어들인 모든 투자 수익은 범죄 수익금으로 몰수될 수도 있었다.
W&R의 전체 투자금 규모보다는 작지만 브릭스 국가를 중심으로 투자하고 있는 AAM의 투자금 규모는 막대했다.
AAM을 청산하는 방법만이 완벽히 증거를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정 그러면 RAM을 투자자분들께 매각하시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카이 황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매각요?”
“예. RAM은 실제로는 투자 펀드이기는 하지만 주식회사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죠. 당장 리안도 상당히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RAM을 세울 때 나는 지분 중 일정 부분을 리안에게 양도했었다.
강제로 받은 투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투자금을 끌어온 것이 리안이었고, 그때만 해도 여러 가지로 리안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 이 정도로 투자가 성공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시 RAM을 청산하는 대신 지금 RAM의 지분을 투자자분들에게 매각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RAM의 지분을 매각하라고요?”
내가 카이 황에게 되물었다.
“예.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RAM이 청산되면 세금도 처리해야 하고 복잡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죠.”
“RAM의 지분을 투자자분들이 매입하면 AAM의 자회사가 아니니 AAM을 청산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투자자분들은 3억 달러까지는 내실 생각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RAM을 유지하는 것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AAM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었다.
5월에 AAM을 청산하려는 이유도 4월 말에 도이치뱅크의 행장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행장이 바뀌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출금을 상환하려는 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그래도 말을 들어 볼 필요는 있었다.
“3억 달러에 리안의 지분 매각 자금도 포함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리안 도련님은 계속 지분을 유지하고 3억 달러는 AAM의 지분 가치만입니다.”
RAM의 AAM 지분 가치로만 3억 달러라는 말이었다.
RAM의 지분 가치로 3억 달러는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금액이었다.
RAM은 1년 동안 8억 달러의 이익을 얻은 회사였고 운용 수수료 수입만 약 2억 달러 정도였다.
만약 1년에 2억 달러의 이익을 얻는 회사를 3억 달러에 매각하라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매각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3억 달러는 청산했을 때 회사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이 2억 달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1억 달러 이상을 더 주는 셈이었다.
더구나 청산했을 때 받을 수 있는 2억 달러 중에는 리안의 지분도 존재했다.
한마디로 3억 달러에는 청산하지 말고 팔아 달라는 의미로 주는 프리미엄이 포함된 셈이었다.
“투자자분들은 만약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RAM을 청산하려고 하면 다른 회사를 세워서라도 저희 선물거래를 모두 인수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투자자분들이 일시적으로 홍콩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있습니다.”
“그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투자자들이 홍콩의 부호들이라고 해도 RAM의 투자금 규모는 8억 달러가 넘었다.
이런 자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이런 정도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현금은 다 용도가 정해져 있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RAM의 선물을 인수하려면 가지고 있는 건물이나 땅 혹은 유가증권을 담보로 맡기고 현금을 마련해야 한다.
매일 오르고 있는 홍콩 부동산 가격을 생각하면 대출받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홍콩 금융가에서 8억 달러는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홍콩 부호 수십 명이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대출을 받는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카이 황의 이야기는 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협박이라면 협박이고 조언이라면 조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AAM 소유 지분을 매각하도록 하죠. 그런데 AAM의 지분만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은 금액인데 그건 가능하겠습니까?”
8억 달러는 아니라고 해도 3억 달러라고 해도 갑자기 마련하기에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3억 달러는 나중에 RAM의 투자금을 담보로 제공하기로 하고 대출받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수하려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서 인수하는 레버리지 매수(leveraged buyout, LBO)을 사용하겠다는 의미였다.
“허······. 그런 것이었군요.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이미 대출을 받을 준비가 다 끝났겠군요.”
LBO는 인수 합병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고 당연히 불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LBO로 지분을 인수한다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회사를 그냥 뺏기는 기분이었다.
“에드릭 님이 원하시면 바로 다음 주라도 3억 달러로 RAM의 지분을 인수할 수 있습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기분은 기분이고 어쨌든 내가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투자금이 3억 달러가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가 상승 정보를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던 나로서는 꼭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홍콩에서 다른 방법으로 투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자금이 마련됐다고 해도 당연히 찜찜한 상태에서 엘리어스나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내가 직접 원유 선물에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원유 가격이 올라가면 그 수혜를 입을 기업은 많았다.
특히 최근 영국의 유전 탐사 업체인 엔터프라이즈 오일은 인수 합병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오일은 풍부한 탐사 경험이 있으면서도 다른 거대 유전 탐사 업체와는 달리 독립 회사였다.
이건 엔터프라이즈 오일이 본래 북해 유전을 위해 영국 정부가 만들어진 공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민영화된 엔터프라이즈 오일은 유가가 올라가면서 현재 어지간한 거대 정유 회사는 모두 인수 합병을 노리는 기업이었다.
3억 달러라면 이 엔터프라이즈 오일 지분 10% 이상을 얻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리안의 파키스탄 투자는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내 질문에 카이 황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직은······. 아시다시피 파키스탄 상황이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서요.”
카이 황이 말했다.
그의 표정이 투자 상황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카이 황을 표정을 보며 원유 선물에서 나오는 수익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찜찜해서 하지 못하는 투자지만 동업자인 리안이라면 별 상관이 없었다.
더욱이 어차피 파키스탄에 투자될 자금이었고 중국 정부와 관련된 투자였다.
엘리어스나 그의 아버지가 무슨 목적이 있더라도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럼 그 자금 잠시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는 카이 황을 보며 말을 이었다.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요. 리안을 불러서 같이 이야기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