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204.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1.
“그러니까 이란과 이라크가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원유 감산을 협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는 말이지?”
리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는 지금 나에게 파키스탄에 투자할 자금을 원유 선물을 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고. 맞아?”
“맞아. 지난주에 있었던 아랍권 국가 회의에서 두 나라 간에 그런 협상이 있었다는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들어간다는 대사관 쪽에서 들은 거야?”
“이런 정보는 정확한 정보 출처를 말하기 어렵다는 것 알잖아.”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어쨌든 확실한 정보라는 말이지?”
“90% 정도는······.”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이 어떤 오해를 하는지 알지만, 굳이 고치지 않았다.
모든 사정을 다 이야기하기는 어려웠고 어쨌든 대사관 직원인 엘리어스를 통해서 들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하지 뭐······. 지금은 한동안 파키스탄에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잠시 원유 선물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파키스탄은 여전히 좀 안 좋아?”
“인도와의 전쟁 위기는 그나마 파키스탄 내부 단속과 지난달부터 이어지는 구자라트주 폭동 사태 때문에 넘어갔는데······. 파키스탄 내부에서 여전히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반발이 심한 것 같아.”
리안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미루고 있기는 하지만 조만간 파키스탄에 투자해야만 했다.
중국 정부의 요구를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파키스탄 정황이 불확실하다 보니 투자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대통령이자 군부 독재자라고 할 수 있는 무샤라프의 통치가 불안한 상태에서 투자 담당 공무원들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 오면서 확인해 보니 파키스탄에서 대통령 임기 연장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던데? 그것 지나면 좀 나아지지 않겠어?”
무샤라프는 참모총장 시절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비상 회의를 거쳐서 작년 여름 스스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번 국민투표는 그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장하는 것에 대한 찬반을 묻는 투표였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이 된 무샤라프로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려울 것 같아.”
“왜? 설마 국민투표가 부결될 리가 있겠어?”
대통령이 된 지금도 무샤라프는 군권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국민투표는 형식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국민투표에 통과는 되겠지. 그런데 파키스탄 내에서 무샤라프에 대한 인기가 별로 좋지 않아. 같은 무슬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팔아넘겼다는 것이지.”
“그래서? 그렇다고 국민투표 결과가 바뀔 리가 없잖아?”
투표하더라도 어차피 개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파키스탄 정부였다.
부결이 나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야 하지. 그래서 지금 파키스탄 야당에서는 투표 보이콧 운동을 하고 있고 그게 상당히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아.”
어차피 찬성이 결정된 투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투표에 불참함으로써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현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래저래 난리군.”
“그래도 뭐······. 어차피 무샤라프 대통령이 몇 년 안에 쫓겨날 가능성은 없으니 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상황에서 무샤라프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군부 내의 쿠데타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파키스탄 내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과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모여 있었다.
무샤라프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면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샤라프를 대통령직에서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암살조차 미국의 정보기관이 파키스탄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려웠다.
“중국 정부는 하필 하고 많은 국가 중에서 그런 나라에 투자하라고 하냐.”
“그런 나라니까 하라고 하는 거겠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중국 정부의 힘만으로 사람을 파키스탄에 보내는 것이 어려우니까.”
“그렇기야 하지. 어쨌든 당분간은 국민투표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와의 투자 협상은 어렵겠네.”
“맞아.”
고개를 끄덕인 리안은 고개를 돌려 카이 황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당장 원유 선물에 대해 경험이 있는 직원 조사해서 올려 주세요.”
너무 빠른 결정이라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정보에 대해 따로 추가 조사 안 하고 지금 결정하는 거야?”
내 질문에 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최근에 원유 가격 오르는 추세로 봐서는 어차피 떨어져도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 아니야?”
“그렇기야 하지.”
리안의 말대로 최근 유가는 오름세였다.
일반적으로 유가가 가장 높은 기간인 겨울은 지났지만, 경기가 회복되면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란과 이라크가 원유 생산 감축을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 증가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 이란과 이라크가 석유 생산 감산을 진짜로 발표하면 주가에도 재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렇지. 그래도 산유국인 영국을 제외한 선진국 증시가 단기적으로 타격을 입겠지만 개발도상국 증시는 상대적으로 당장은 괜찮을 거야.”
“그럼 뭐······ 독일이나 홍콩 그리고 미국 나스닥 정도만 매도 포지션으로 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매수 포지션으로 하면 되는 거야?”
리안이 물었다.
“대충 그렇지.”
내가 대답했다.
2.
리안에게 원유 선물 투자를 제안하고 투자 방침을 정한 나는 W&R 사무실을 나와서 장샤오이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W&R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장샤오이에게 연락해서 미리 잡은 약속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예, 덕분에. 오랜만이네요.”
장샤오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제가 한국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뵙기가 어렵네요.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다 보니······.”
나는 되도록 정중하게 말했다.
“바쁘신 것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최근 저희 팀 실적 대부분이 에드릭 씨를 통해서 나오고 있는데 왜 모르겠어요.”
장샤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팀 차원에서 W&R과 하는 투자를 제외한 브릭스나 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는 그녀가 속한 2팀을 통해서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2팀에는 내 투자만 전담하는 전담팀이 이미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내 전담팀을 꾸리기 위해서 외부에서 직원을 새로 채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몇 달간 정기적으로 투자하는 브릭스 국가들은 브릭스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는 했지만, 지리적 위치나 상황이 아주 달랐다.
내가 투자하는 방법에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지수 ETF 위주라면 남아프리카는 기업 위주였고 브라질에 대한 투자는 외환시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주식시장에 열리는 시간도 다르다 보니 기존 팀원들만 가지고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팀까지 꾸려서 장샤오이가 내 투자를 보좌하는 이유는 단순한 나에 관한 호의 때문은 아니었다.
막대한 실적과 그에 따르는 수입이 따라 주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장샤오이가 이끄는 2팀은 반독립 상태인 3팀을 제외하면 류오린 내에서도 독보적인 실적을 내고 있었다.
“덕분에 제가 편하게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약속을 잡은 것은,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곧 류오린을 그만두게 될 것 같아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서입니다.”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장샤오이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시는 팀원이 많습니다. 그만두시면 지금까지 거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팀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가장 묻고 싶은 사람은 장샤오이 본인일 것이다.
“기존 거래는 되도록 유지할 생각입니다. 다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동안 일해야 할 곳이 대놓고 주식 투자를 하기 어려운 곳이라서요.”
“들었어요.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자문역으로 일하신다고요?”
장샤오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현재 미국의 증권거래법은 공무원의 주식 투자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제가 재산을 공개해야 하는 고위 공무원도 아니니 그걸로 문제가 될 여지도 없고요. 문제는 내부 거래로 걸릴 위험성인데, 일단 일부 있는 개인 주식 투자는 법인에 투자하는 형태로 바꿀 생각입니다.”
이미 내가 장샤오이를 통해서 하는 투자 대부분은 내가 조세 회피처로 세운 법인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었고 내 개인 명의로 하는 투자는 아주 일부였다.
“이제 거래를 계속하기로 했으니 투자에 관해 이야기하죠.”
내 말에 장샤오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투자요? 브릭스 투자라면 나오기 전에 투자 방침에 대한 메일을 확인했는데요?”
장샤오이와 전화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브릭스에 정기 투자 방침을 메일로 보내고 있었고 이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다른 투자 때문입니다. 며칠 안에 3억 달러 정도의 자금이 추가로 들어올 예정입니다.”
“3억 달러요? 꽤 많은 금액이네요.”
“적은 금액은 아니죠.”
내가 대답했다.
“3억 달러는 어디에 투자하실 생각인가요? 처음 브릭스 국가에 투자했던 것처럼 나라별로 똑같이 나눠서 하실 생각인가요?”
“아닙니다. 장기적으로는 모르지만 3억 달러는 따로 투자할 곳이 있습니다.”
3억 달러를 모두 원유 선물에 투자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리안에게 투자를 제안한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란 이라크의 석유 감산이라는 호재를 그냥 보내기는 아까웠다.
“며칠 후에 3억 달러가 들어오면 전부 영국의 엔터프라이즈 오일 주식을 사 주십시오.”
나는 생각했던 기업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엔터프라이즈 오일요?”
“예. 남아 있는 유전 탐사 기업 중에는 가장 큰 기업이죠. 이 정도 유전 탐사 기업이 독립 상태로 있는 것 자체가 인수·합병하려는 기업으로서는 다시없는 기회고요.”
1982년 북해 유전 탐사를 위해 만들어진 엔터프라이즈 오일은 무엇보다 유전 탐사 중에서는 난도가 높은 해상 유전 탐사 분야에서 강점이 있었다.
“지금 엔터프라이즈 오일의 주가가 어떻게 되죠?”
“나오기 전에 확인해 보니 주당 6파운드 정도더군요. 시가총액은 30억 달러고요.”
“3억 달러면 단순 계산으로 10%의 지분을 살 수 있는 금액이네요?”
“어느 정도 가격이 오르더라도 되도록 최대한 이른 시간에 매입해 주십시오.”
3억 달러로 지분 10%를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10%나 되는 지분을 사다 보면 주가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빨리요?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시는데요?”
“5%에서 10% 정도까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5%라고 해도 1,500만 달러나 되는데 그렇게 빨리 사시려는 이유가 있나요?”
장샤오이가 물었다.
“최근 유럽의 석유화학 업계에서 인수 합병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오일을 노리는 기업도 많고요.”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두운 법이라는 말처럼 유가가 가장 낮은 시점은 가장 싸게 기업의 규모를 키우기 좋은 시점이었다.
한마디로 석유화학 업계로서는 가장 인수와 합병이 활발한 때였다.
“알았어요. 3억 달러가 며칠 후에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급하게 매입하시려는 것 같은데 그럼 이러면 어떨까요? 일단 제가 팀에서 보유하고 있는 다른 자금으로 엔터프라이즈 오일 주식을 조용히 매입해 볼게요. 그리고 3억 달러가 들어오면 나중에 대량 매매로 넘겨드리면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대한 빨리 주식을 사고 싶었지만 다른 투자를 처분하고 매입하는 것도 조금 문제가 있었다.
“이미 팀에서 운용하고 있는 투자금이 얼마인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들어가는 즉시 매입을 지시할게요.”
“감사합니다.”
전에도 느꼈지만, 장샤오이는 항상 나에게 호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