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04화 (205/270)

(204)

#205.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

1.

4월 3일 수요일.

대낮의 텅 빈 바에서 앉아 엘리어스를 기다렸다.

약속 시각이 약간 지나서 나타난 엘리어스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청와대 발표를 확인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엘리어스가 약속 시각보다 늦은 것에 대해 사과했다.

“아닙니다. 일 때문에 늦은 것인데 어쩔 수 없지요. 청와대에서 무슨 발표가 있었나 보죠?”

“대북 특사 파견을 발표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쨌든 이번 일로 경색됐던 관계가 조금은 풀리겠네요.”

“모두 에드릭 씨 덕분이죠. 메가와티 카드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대북 특사 파견은 어려웠을 겁니다.”

지난주 금요일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일요일 한국을 방문한 메가와티는 청와대에서 한국, 인도네시아 정상회담을 했다.

이런 메가와티의 전격적인 행동의 배후에는 미국 정부와 CIA가 있었다.

“미국 정부에서 생각보다 빨리 메가와티 대통령을 움직였네요? 어느 정도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요.”

사실 내 생각보다 메가와티가 일찍 북한과 한국을 방문한 것에 조금 놀랐다.

CIA와 메가와티 대통령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저쪽의 요청에 메가와티가 곧바로 움직이리란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미국 정부가 메가와티에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협조 요청을 했다는 부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저개발국이기는 하지만 2억의 인구를 가진 국가다.

아무리 공화당 최대 지원자 중 한 명의 부탁이라지만 이런 국가의 대통령에 관한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이란과 이라크가 손을 잡은 것을 확인하고 백악관에서 남은 북한이라도 회유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라크, 이란, 북한은 공통으로 이른바 ‘악의 축’ 국가들이었다.

하나로 뭉친 적을 이해관계에 따라서 분열시키는 것은 전형적인 모략 중 하나였다.

“다행이네요. 어쨌든 오늘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다니, 메가와티가 일을 잘했나 보네요.”

청와대가 특사를 발표했다는 것은 북한과 이미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만약 아직 북한과 조율할 문제가 남았다면, 특사가 아닌 밀사를 파견하거나 특사 방문 발표를 늦췄을 것이다.

“북한을 방문했던 메가와티가 청와대에 북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고 하더군요.”

“아······. 생각했던 것보다 메가와티가 적극적이네요.”

아무리 미국 정부의 요청이었다고 해도 일국의 대통령이 자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국가 정상 사이에서 밀서를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메가와티가 누구인가?

인도네시아 내에서는 은둔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듣는 지도자였다.

“말은 남북 관계 개선이 아버지 수카르노 대통령의 유언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대규모 선물 때문이죠. 당장 이틀 후에 IMF와 세계은행에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기존 차관 연장과 대규모 신규 투자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역시······.”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메가와티가 아무리 CIA에 빚을 졌다고 해도 너무 적극적이었다.

그렇게 움직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2.

엘리어스와 헤어진 이후 나는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얼마 전 새로 사들인 한강 변의 빌라였다.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게 된 이상 언제까지 호텔에 머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빌라로 돌아오자마자 장샤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드릭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로열 더치 셸과의 협상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쪽에서 자신들이 말한 가격 이상의 프리미엄을 절대로 줄 수 없다고 버티네요.

장샤오이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난주 내가 매입을 지시한 엔터프라이즈 오일에 관한 것이었다.

세계 최대의 거대 석유 회사인 로열 더치 셸은 이번 주 월요일 전격적으로 엔터프라이즈 오일에 대한 인수를 발표했다.

“그쪽에서 말하는 금액이라면 7.25파운드인가요?”

-예. 지난주 금요일 종가에서 16% 정도 프리미엄을 제시한 셈이지만, 이미 오늘 주가가 7.25파운드인 상태에서는 그리 만족스러운 제의는 아니에요.

“시장가격 이상의 프리미엄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이유가 뭡니까?”

인수합병 과정에서 시장가격보다 프리미엄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억지 주장을 하더라고요. 주가가 7.25파운드까지 오른 것은 자신들이 인수합병을 발표하고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이란 거죠. 지난주만 해도 6파운드였으니 7.25 파운드도 충분히 후한 금액이라고 하더군요.

“조금 궁색한 이야기네요. 그게 전부입니까?”

-그게······.

“말해 보십시오.”

-인수 발표는 월요일이었지만 엔터프라이즈 오일 경영진과 인수합병에 대한 합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면서······. 지난주에 우리가 주식을 사들였을 때는 이미 인수가 결정된 다음이라는 거죠. 우리가 내부 정보로 주식을 사들인 것이 아니냐면서 순순히 넘기지 않으면 고발을 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내부 정보를 얻었다는 것인지······. 안 그래요?

장샤오이가 되물었다.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혹시나 내부 정보를 통해서 엔터프라이즈 오일을 사들인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

“내부 정보를 얻은 건 절대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 오일은 내부 정보로 얻은 유가 폭등에 대한 대안으로 한 투자였다.

내부 거래를 피해서 엔터프라이즈 오일 주식을 사들인 것 때문에 오히려 내부 거래 의혹을 받고 있었다.

“그럼 맡겨 주세요. 저희가 가진 지분이 10% 가까이 되기 때문에 로열 더치 셸이 엔터프라이즈 오일을 성공적으로 합병하려면 우리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장샤오이가 말했다.

주당 7.25파운드를 제시한 로열 더치 셸은 엔터프라이즈 오일의 가치를 35억 달러로 평가한 것이다.

“그냥 팔죠.”

-예? 협상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니까요.

“제 생각에는 로열 더치 셸이 주가 기준을 현재 주가가 아니라 예전 주가로 생각한다면, 프리미엄이 많아 봐야 20% 정도일 겁니다. 그래 봐야 이익이 2,000만 달러 정도 늘어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닙니까?”

-좀 더 버티면 25%는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장샤오이가 말했다.

“어쩌면 25%까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래 봐야 2,500만 달러죠. 그 시간에 프리미엄 16%를 받고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알겠어요. 로열 더치 셸 쪽의 억지가 화가 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장샤오이는 아쉬운 말투였다.

“그렇다고 내부 거래 운운하는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곧바로 로열 더치 셸에 주식을 넘기지 말고 런던 주식시장이 열리면 시장에서 곧바로 팔아 버리십시오. 로열 더치 셸에서 7.25파운드에 매수를 약속한 이상 지분 10%를 7.25파운드에 모두 팔 수 있을 겁니다.”

로열 더치 셸이 시장에서 10%나 되는 주식을 사들이려면 7.25파운드보다 훨씬 큰 비용을 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판 주식을 사들인 투자자들은 장샤오이처럼 로열 더치 셸이 7.25파운드 이상을 줄 때까지 버티려고 할 것이다.

-로열 더치 셸 쪽 놈들 고생 좀 하겠네요.

“엔터프라이즈 오일 주식을 판 투자금은 인도네시아에 투자해 주십시오.”

-인도네시아요?

“예, 인도네시아 정부가 국제 금융기관들과 벌이고 있는 협상이 곧 타결된다는 정보입니다.”

나는 엘리어스에게 들었던 정보를 곧바로 이용했다.

IMF나 세계은행과의 협상이 발표되면 인도네시아 주가는 큰 폭으로 오를 것이다.

이런 호재를 들은 이상 투자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유가 선물이야 텍사스 석유 업계의 거물인 엘리어스의 아버지 때문에 꺼림칙해서 투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과 친분이 있어도 미국 텍사스에서 있는 사람이 인도네시아 주식시장까지 살필 수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일이 많네요.

“서로 돕는 거죠.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조건만 맞으면 3팀이 독립해서 W&R에 들어가더라도 지금 하는 거래는 2팀과 계속할 생각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특별히 원하는 요구 조건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장샤오이가 되물었다.

그녀도 지금까지 조건으로는 나와 계속 거래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투자 금액이 적으면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지금도 내가 장샤오이의 팀을 통해 거래하는 투자는 홍콩의 중소 투자회사보다 많았다.

“혹시 제가 류오린의 보안 계좌를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내가 생각했던 요구 조건을 이야기했다.

류오린의 계좌는 기본적으로 홍콩은 물론이고 중국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보안 계좌는 특별한 계좌였다.

나도 최근에야 존재 사실을 알게 되었다.

류오린의 보안 계좌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추적이 어려운 계좌였다.

중국 금융기관을 통해서 하는 거래로, 류오린을 통해 움직이는 중국 고위층의 계좌를 추적하기 어렵게 하려고 만들어진 계좌였다.

중국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금융 당국의 통제를 벗어난 계좌였다.

보안을 강화했어도 추적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중국 정부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니.

한마디로 류오린이라는 투자회사의 존재 이유라고도 봐도 무방했다.

당연히 아무나 보안 계좌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저야 오히려 환영할 일이기는 하지만······. 보안 계좌를 한번 이용하면 돈을 쉽게 뺄 수 없는데 괜찮겠어요?

장샤오이가 물었다.

보안 계좌를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노력이 든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본적으로 중국 금융기관들이 중국 고위층의 자금 흐름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노력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계좌에 관여된 사람들도 자신이 하는 부분만 알 뿐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당연히 한번 설정하면 계좌를 해지하거나 자금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1년 정도라면······.”

-좋아요. 이미 말했지만, 저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네요. 보안 계좌로 옮기신다는 것은 1년 동안은 거래처를 옮기지 않는다는 말씀이니까요.”

“잘해 주시는데 제가 왜 옮기겠습니까?”

실제로 나는 자금을 옮길 생각이 없었다.

내가 장샤오이를 통해 보안 계좌를 이용하려는 것은 만약의 일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W&R을 운영하는 리안과 카이 황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지만, 인간의 믿음이란 완벽할 수 없었다.

-감사해요. 3팀이 W&R에 합류하면, 그쪽을 통해서 거래하실 거로 생각했거든요.

“W&R의 자금과 이 자금은 성격이 다릅니다. 따로 투자자도 있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믿어야죠.”

장샤오이가 말했다.

나도 장샤오이가 믿으리라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장샤오이와 대화를 마친 나는 기분 좋게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이제 최악의 순간이 와도 전부를 잃을 위험은 사라진 셈이었다.

W&R과 류오린의 보안 계좌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나는 나머지를 쉽게 복구할 자신이 있었다.

토끼도 세 개의 굴을 판다는데, 나는 적어도 두 개의 바구니에 나눠 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좋은 기분이 끝난 것은 일본에서 전화가 온 다음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단테 패트릭이었다.

-큰일 났네.

“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스즈키 무네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나는 단테 패트릭을 일본에 잡아 두기 위해서 자민당의 거물 중 하나인 스즈키 무네오를 감옥에 보내는 공작을 하고 있었다.

-지금 스즈키 무네오가 문제가 아니야. 지금 자네 때문에 자민당이 위기에 몰렸어!

“예?”

-자네가 빨리 일본으로 와 줘야겠네. 지금 이대로라면, 고이즈미 정권이 무너질지도 몰라!

이건 또 뭔 멍멍이 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나라도 일본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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