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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공을 세웠다고 반드시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1.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갔다.
공항에서 있는 대로 신문을 싹쓸이해서 일본 정치 관련 뉴스를 찾아보았다.
단테 패트릭의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고이즈미 정권이 무너진다는 단테 패트릭의 말은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흔들리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고이즈미 정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고이즈미를 자민당 총재에 당선시키고 결국 총리로 만든 것은 내가 아니 에이전트 에스 팀이 작년에 이뤄 낸 성과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이즈미를 당선시킨 것에 비하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10년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었다.
특히 동아시아 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동아시아의 경제는 현지인들이 아니라 화교와 일본이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 때부터 미국 정부와 CIA와 발을 맞춰 온 고이즈미 총리는 현재 미국이 가진 가장 중요한 외교 자산이었다.
만약 내 작전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흔들린다면 CIA 일본 지부 수준이 아니라 미국 정부에서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리 고이즈미를 총리로 만드는 데 나, 아니 에이전트 에스 팀이 공을 세웠다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CIA 안가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단테 패트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다행히도 안가에 있는 것은 단테 패트릭 혼자였다.
“어서 오게!”
단테 패트릭이 자리에 앉은 채 말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면서 신문을 보니 고이즈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50%까지 떨어졌던데요?”
정부의 지지율이 50%라면 일반적으로는 높은 지지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80%가 넘었다.
경제 상황이 나쁜 상황에서도 높은 정부 지지율에 오죽하면 리안이 일본 국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랬던 지지율이 50%까지 떨어진 것이다.
이런 속도라면 어디까지 떨어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가 나쁘지만 단순한 경제 상황 때문이라면 진작에 떨어졌어야 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스즈키 무네오가 비리 혐의로 탈당한 것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예?”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스즈키 무네오의 비리 폭로와 탈당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졌다고요?”
내가 자민당의 많은 의원 중에서 스즈키 무네오를 선택한 것은 그의 비리를 폭로해서 감옥에 보내도 고이즈미 정권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스즈키 무네오는 고이즈미 정부의 장관도 아니고 고이즈미 총리의 측근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이즈미 총리가 추진하던 정치 개혁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고이즈미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시모토파의 중진이었다.
스즈키 무네오를 감옥에 보내면 고이즈미 총리가 추진해 왔던 정치 개혁의 성과로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스즈키 무네오의 비리로 끝났다면 별다른 영향이 없었겠지.”
“다른 게 터졌습니까?”
“고이치 가토! 고이치 가토의 비서가 관련된 대형 스캔들이 터졌네.”
“하필······.”
고이치 가토.
YKK의 중심인물이었다.
YKK란 1980년대 말 일본 자민당의 개혁을 요구한 세 명의 의원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 자민당 내 개혁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주장한 개혁 방향은 지금 고이즈미 총리가 주장하는 정치 개혁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도 그럴 것이 YKK 중에서 K 중 하나가 바로 주니치로 고이즈미, 즉 현 고이즈미 총리였다.
YKK는 결성 직후부터 언젠가는 자민당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YKK 중에서 가장 총리가 유력했던 인물은 고이즈미가 아니라 나머지 두 명인 고이치 가토와 다쿠 야마사키였다.
특히 고이치 가토는 자민당 내 주요 계파를 이끌었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총리 후보였다.
그런데도 이 둘을 제치고 고이즈미가 총리가 된 것은 2000년 모리의 망언을 보다 못한 고이치 가토와 다쿠 야마사키의 당내 쿠데타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쿠데타 실패로 두 사람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모리 파벌에 속해서 쿠데타에 참가하지 않았던 고이즈미가 총리가 된 것이었다.
당연히 작년 고이즈미가 총리가 되는 데 자민당 내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바로 고이치 가토였다.
가토는 고이즈미가 총리가 된 이후에도 정부의 정치 개혁을 앞장서서 지지해 왔다.
고이치 가토는 말 그대로 고이즈미 정치 개혁 설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고이치 가토의 비서가 기업에 이른바 ‘가토 소비세’라는 명목으로 정치자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1억 엔이나 되는 세금을 포탈했다고 하더군.”
정치 개혁을 주장하던 인물이 자신이 비판했던 비리를 저지른 셈이었다.
“가토는 비서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을 몰랐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말을 누가 믿겠나? 가토 같은 거물이 자신의 비서가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하필 이 시점에······.”
“하필 이 시점에 가토에 대한 비리가 터진 게 우연이겠나?”
단테 패트릭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맞네. 현재로서는 스즈키 무네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시모토파 쪽에서 터트렸을 가능성이 가장 크네. 만약 사실이라면 고이즈미 총리 쪽에서 스즈키 무네오를 건드렸다고 생각하고 한 일이겠지.”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나는 전화로 단테 패트릭이 나 때문에 자민당이 위기에 몰렸다는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호흡이 가빠질 정도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진짜 저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위기에 내몰렸네요.”
“지난주에 있었던 요코하마 시장 선거와 이어진 교토 주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이 모두 참패했네.”
다른 때라면 지방선거에서, 특히 대도시권에서 자민당이 패하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자민당은 상대적으로 요코하마나 교토 같은 대도시권보다 지방에서 지지가 강했다.
하지만 만약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이 80%대였다면 연이은 선거 참패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단테 패트릭을 한국에 오지 못하게 시작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셈이었다.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번 주에 떨어진 지지율에는 선거에서 패한 영향도 있겠군요.”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 지지율이 급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망설이던 사람들도 선거 결과를 보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앞으로가 더 문제야. 이대로라면 40%는 물론이고 30%도 위험할 수 있네.”
아직 지지율이 50%대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더 떨어진다고 봐야 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말인가?”
“그러니까······ 스즈키 무네오의 비리를 처음 폭로한 것이 저희라는 것 말입니다.”
“걱정되나 보군.”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큰 실수니까요.”
순간 단테 패트릭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 일본 지부에서는 아직은 나밖에 모르네.”
“······.”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단테 패트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며 사실인지 확인해보았다.
“자네 팀에서 보고가 되지 않았다면 아직은 자네 팀과 나만이 일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고 있는 셈이지.”
“왜······?”
내가 물었다.
비밀 작전이었다고 해도 이런 큰일은 일이 발생한 순간 곧바로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야 정부나 CIA 조직 차원에서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단테 패트릭은 에이전트 에스 팀은 정규 조직 밖의 팀으로 알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곧바로 보고하면 단테 패트릭은 책임을 면할 수도 있었다.
“자네가 나와 일본 지부를 위해서 꽤 여러 가지 일을 했지?”
“그렇기야 하지만···.”
“자네나 팀이 무슨 대가를 받았는지 알 수 없네. 하지만 대가를 받았다고 해도 나는 받은 것에 비해서 해 준 일이 없었지. 이번 일은 그동안 내게 해 준 일에 대해서 내가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게.”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였다.
이런 식으로 했던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지는 몰랐다.
내가 CIA를 그만두려고 하는 이유 중에는 내가 하는 일에 비해서 보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초부터 지금까지 에이전트 에스 팀의 이름으로 꽤 많은 일을 했다.
큰일만 따져도 일본 총리를 바꿨고 두 국가의 대통령을 쫓아내는 일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했던 일은 모두 각 지부나 요원들의 공이었지 내 공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일은 하는 사람 따로 있고 그 열매를 따는 사람이 따로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테 패트릭은 가장 내 공을 많이 본 사람이었다.
물론 에이전트 에스 팀의 보안 등급도 올라가고 본부에서 평가도 높아졌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을 계속 유지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서 투자하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는 작았다.
이번 일도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런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되도록 빨리 해결책을 찾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본부로 가려면 고이즈미 총리가 되도록 멀쩡해야 하거든. 고이즈미 총리가 이 일로 진짜로 무너지면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날지도 모르니까.”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금 전 느꼈던 감동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2.
호텔에서 나는 단테 패트릭이 전해 준 CIA 정보와 몇 주간 일본의 주요 신문을 읽으면서 대책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다음 날 단테 패트릭을 다시 만났다.
“어때, 지지율을 만회할 좋은 방법이 있겠나?”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지금 상태에서 고이즈미의 떨어지는 지지율을 만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높은 지지율이 유지된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죠.”
“정말 방법이 없겠나?”
단테 패트릭도 조금 다급한 표정이었다.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던 이유는 그의 정치 개혁 약속이었습니다. 80%가 넘었던 지지율은 그만큼 일본국민이 기존 정치권을 혐오했기 때문에 가능한 지지율이었죠. 하지만 1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고이즈미 총리는 제대로 된 개혁을 이뤄 내지는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일본의 지금 정치체제는 자민당이 결성된 이후 60년 가까이 지속하여 온 체제야. 정치를 1년 만에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국민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성적인 존재였다면 정치 개혁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당내지지 기반이 부족했던 고이즈미가 지방 대의원 표를 얻어서 일본 총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본 국민이 언제까지 기다려 주지는 않죠. 사실 지금 떨어지는 지지율은 정치 스캔들도 스캔들이지만 일본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는 이번 말인 4월 28일에 열리는 보궐선거가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으로서는 보궐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지.”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고이치 가토를 의원에서 사퇴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순순히 사퇴하겠나? 고이치 가토는 2년 전만 해도 총리가 될 것이 확실했던 거물이네. 여전히 주요 계파의 수장이고 말이야.”
“저는 사퇴할 거로 생각합니다. 비리가 있기는 하지만 고이치 가토의 정치 개혁에 관한 생각은 진심인 것 같더군요. 더구나 고이치 가토는 지역구 기반이 확고합니다. 지금 사퇴하더라도 스캔들이 잊힐 내년에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단테 패트릭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그가 나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게 전부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현재 고이즈미 총리나 자민당의 지지율을 올릴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편을 강하게 할 수 없다면 상대를 약하게 해야죠.”
내가 말했다.
“방법이 있나?”
단테 패트릭의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지금 야당은 인기가 없더군요. 최대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은 하나로 모여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정당이 모여서 생긴 정당이고요.”
내 이야기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열이라······. 그게 쉽겠나? 야당들로서는 정권을 얻을 절호의 기회인데?”
단테 패트릭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요. 권력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할 텐데 나누려고 하겠습니까?”
CIA도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야당이 다른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기회라는 생각을 야당 정치인들이 하면 할수록 불씨만 던지면 분열의 불길이 야당을 휩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