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06화 (207/270)

(206)

#207. 욕망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1.

회의가 끝난 이후 나와 단테 패트릭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단테 패트릭은 후지이 가토를 만나 의원 사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언제 사퇴를 발표한답니까?”

“그게 우리가 관여할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아.”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나는 후지이 가토가 쉽게 사퇴할 거로 생각했었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비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예? 설마 사퇴를 거부하는 겁니까?”

“그러면 내가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말하지 않았겠지. 아무래도 시간을 끄는 것이 요구 조건이 있는 모양이야.”

“골치가 아프네요. 요구 조건이 뭐랍니까?”

“고이치 가토는 자신이 물러나면 이치로 오자와의 자유당과 합당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이치로 오자와는 90년대 초 자민당의 총리가 되는 것이 실패하자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한 인물이었다.

그의 탈당이 수십 년간 최초의 일본 정권 교체를 끌어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민당 내 최대 계파였던 다나카파 소속이었고 당권 투쟁 결과 탈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치로 오자와의 자유당과 자민당 사이에는 기본 정책 면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치로 오자와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민당과의 합당이나 복당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가장 앞장서서 막고 있었던 것이 바로 고이치 가토였다.

“가토와 오자와가 앙숙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의원을 사퇴하는 순간까지 그런 요구 조건을 내놓다니 앙숙은 앙숙이네요.”

어디에나 그렇듯 일본 정계에도 유명한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있었다.

가토와 오자와는 일본 정계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정적이자 앙숙이었다.

“웃긴 일이지. 가토와 오자와 둘은 일본 정계에서도 가장 비슷한 인물인데 말이야. 둘 다 다나카파 출신이고 1980년대 젊은 나이에 이미 장관을 했으면서도 자민당 개혁을 주장한 점도 같고 말이야. 심지어 둘 다 정치 입문 초기부터 총리가 될 거라고 기대를 받았으면서도 총리가 되지 못한 점까지 같지.”

“그래서 더 싫어하는지도 모르죠. 동족 혐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고이치 가토는 이치로 오자와가 다시 당에 돌아오는 것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야.”

“하지만 그건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 정부와 CIA가 아무리 일본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민당의 합당까지 관여할 힘은 없었다.

“가토도 우리에게 하는 요구는 아니야. 고이즈미 총리나 야마사키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합당이나 복당을 막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지······.”

“그렇군요. 그럼 그 문제는 자민당 내에서 해결하기를 기다리죠. 어차피 우리로서는 고이치 가토의 사퇴가 선행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알겠네. 다음이 4월 28일 보궐선거 기간에 고이즈미 총리를 외국으로 내보내는 문제인데······. 그건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 같네.”

“예. 지금으로서는 보궐선거에 이기기 어렵습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보궐선거 책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선거 기간에 일본을 떠나 있는 것이 유리합니다.”

내가 보궐선거에서 고이즈미에 대한 타격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 바로 선거 기간 고이즈미 총리의 해외 방문이었다.

어차피 지금 총리의 지지율로는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자칫 선거의 패배 책임을 지게 되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총리에게 지지율이 중요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고이즈미 총리는 국민의 지지율이 더욱더 중요했다.

그건 고이즈미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제대로 된 계파의 지원도 없이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자민당 총재와 일본 총리에 당선된 이후 지난 1년간 개혁을 추진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 사이에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작년 7월에 열렸던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 당과 정부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이었다.

자민당 의원들로서는 자신들을 당선시키고 다시 재선시켜 줄 수 있는 총리가 가장 좋은 총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이즈미의 이미지를 그나마 지키려면 패배가 확실한 이번 보궐선거와는 거리를 두는 게 필요했다.

“스즈키 무네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금은 하시모토파와 일단 힘을 합쳐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스즈키 무네요.

이번 사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옥에 보낼 생각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상황에서 그가 자신이 감옥에 가지 않게 됐다고 고마워하겠습니까?”

“알겠네.”

“그리고 마키코 다나카 전 외상도 이번에 같이 날리는 게 좋겠습니다.”

“뭐? 마키코 다나카 전 외상을?”

마키코 다나카는 다나카 전 총리의 딸이었다.

“예. 외상으로 있을 때 이런저런 말실수로 문제가 많았지 않습니까.”

단테 패트릭이 넘겨준 자료를 읽어 보니 마키코 다나카 외상은 911 테러 직후 일본과의 협의 과정에서 알려 준 정보를 공개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몰랐지만, 자료를 작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그녀가 문제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데 일본 외무성은 물론이고 주일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까지 나서야 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키코 다나카 전 외상이 싫지만, 그녀는 일본 국민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가 있네. 차기 총리 1순위야. 지금 떨어진 고이즈미의 지지율이 떨어진 시작도 따지면 보면 마키코 다나카 외상을 경질한 것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

다나카 총리는 비리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일본 경제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일본의 고도 성장을 이끈 인물이기도 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본 국민들이 다나카 총리의 딸인 마키코 다나카 외상이 총리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비록 이런저런 돌발 발언으로 일본과 미국 정부를 당황하게 했지만, 일본 국민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좋아했다.

고이즈미 정부 지지율이 높았던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런 다나카 외상의 인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었다.

실제 고이즈미 총리가 다나카 외상을 경질한 직후부터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최근 선거에서 지방선거에 패한 지역도 다나카 일가가 영향력을 발휘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마키코 다나카 외상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내년에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바로 마키코 다나카 외상입니다. 마침 자료에 보니 마키코 다나카 외상이 비서 월급을 강탈하고 있더군요.”

“그 정도로 마키코 다나카를 형사처벌받게 하기는 쉽지 않아. 비서가 자신이 받는 월급 중 일부를 의원이나 사무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여기 일본 정치의 관행이야. 사실상 자발적인 일종의 정치 기부라고 할 수 있네. 어차피 다나카 의원의 비서 대부분이 지역 후원회 자식이거나 정치적 야망을 품은 사람들이고 말이야.”

“관행이라지만 그런 세세한 사실까지 국민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마키코 다나카 의원이 정치자금이 모자라서 비서들 월급까지 상납받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그걸 국민도 이해해 줄까요? 그 대단한 다나카 총리의 딸이 일개 비서들의 월급을 빼앗아 간다! 오랜 불황에 시달리는 일본 국민이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요?”

“법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차기 총리 후보에서는 탈락시키자는 말이군.”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나카 일가가 미국 정부와의 관계가 돈독한 것은 알고 있지만······. 고이즈미 총리 정도면 본국 입장에서는 영국 블레어 총리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 그런 면에서는 지지율이 떨어진 지금이 본국에 나쁠 게 없죠. 지지율이 너무 높으면 본국 영향력을 벗어나서 자기 정치를 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너무 미국 편을 든다고 해서 최근 영국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영국 블레어 총리가 미국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연이어 터지는 측근 비리로 위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 말은 알겠네. 하지만 이건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네.”

“그렇겠죠.”

일본 차리 총리에 가장 유력한 인물을 낙마시키는 문제였다.

더구나 다나카 일가는 그의 아버지인 다나카 총리 시절부터 미국 정부에는 막강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위에 건의를 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다나카 전 외상의 미래에 대한 건의를 한 이상 대충 방침을 정하는 일은 끝낸 셈이었다.

일본에서 머물면서 기자들을 만나며 고이치 가토에 대한 의원 사퇴 압박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가토 의원이 진정으로 일본 정치 개혁을 바란다면 대국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꽤 많은 돈이 들었지만 결국 월요일 가토 의원은 의원 사퇴를 발표했다.

단테 패트릭에게 들으니 가토 의원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자유당과의 합병에 반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고 한다.

결과를 확인한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2.

“일본에 갔다 오셨다고요?”

엘리어스가 말했다.

“예. 제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남북관계는 특사 파견으로 빠르게 진전됐네요. 북한에 보낸 한국 정부 특사도 예상한 대로 ‘남북의정서’를 발표했고요.”

“그렇습니다. 북한에서도 지도자인 김정일이 한국 미국과의 대화가 원한다는 이야기를 방송으로 내보냈으니 잘 진행된 셈이죠.”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한국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던데요?”

“뭐······ 특사 파견의 성공과 북한 반응을 보고 긴장이 풀렸나 보죠. 이상한 일도 아니죠. 한국의 대통령은 70대 후반이잖습니까.”

“어쨌든 이번 일로 한숨 돌리시겠습니다. 그런데 대충 이제 남북 관계는 손을 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북한 정권은 예측하거나 관리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충고했다.

북한 외교 정책의 핵심은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고사하고 한국과도 경제력 차이가 극복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진 상황에서는 북한으로서는 나름대로는 좋은 전략일 수도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엘리어스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북한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가을이면 중국으로 갈 생각이니 그때까지만이라도, 해 볼 때까지 해 보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나는 엘리어스와 헤어지고 돌아와서 내가 없는 동안의 투자 상황을 확인했다.

전체적인 W&R의 투자는 성공적이었다.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도 거의 확정된 상태라서 한국의 주식시장은 연일 상승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도 메가와티의 남북한을 넘나드는 정상 외교와 이어진 IMF와 세계은행과의 협상 진전······ 그리고 내가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3억 5천만 달러의 외국인 투자로 주식시장은 한 주 동안 8% 이상 상승했다.

일본에서의 일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투자에 관한 한 일이 불안할 정도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기분 나쁜 부분이라면 내가 RAM을 판 이후 러시아 주식시장이 9%나 상승했다는 사실이었다.

“인수를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기뻐하셔. 아, 물론 다들 너에게도 아주 고마워하고 있지.”

리안에게서 전화로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전화기를 던져 버리고 싶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4월 말에 청산할 생각이었으니 ‘조금 늦게 팔 것 그랬나??’ 하는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나마 전체적으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어서 그나마 아쉬움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다음 투자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해 리안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 미국에서 두 가지 소식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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