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209. 씹을 수 있을 만큼만 물어라
1.
하성철에게 가이닉스 인수 협상 진행 상황과 한국 카드사에 대한 조사를 지시한 후 나는 홍콩으로 날아갔다.
예상하지 못한 자민당의 위기로 홍콩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밀린 상태였다.
다음 달 초까지는 류오린을 그만둬야 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퇴직금이나 성과급에 대한 세금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만난 사람은 다청의 변호사 임순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임순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를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반갑습니다.”
나는 임순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시 예전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작년 4월 하이난섬에서 미 해군 소속 정찰기기 추락했을 때 만났으니 그와 나 사이의 관계도 1년이 넘었다.
임순 본인은 모르지만, 당시 그가 전해 준 정보 덕분에 미국은 중국과의 협상에서 꽤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 외에도 임순은 당시 나를 골치 아프게 했던 웬지하오 1팀장과의 정보를 전해 주기도 했었다.
정보의 대가로 내가 돈을 주려고 했을 때 임순이 원한 것은 자신을 고문 변호사로 고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줄 돈을 수임료로 받아서 당장 돈보다는 미래를 선택한 셈이었다.
투자회사도 마찬가지지만 법률 회사도 변호사가 어떤 고객을 회사에 끌고 올 수 있느냐가 파트너로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과거 이야기를 하던 임순이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제 결정이 저로서는 하늘이 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말 그대로 황금 동아줄을 잡은 셈이니까요.”
“하긴 그때만 해도 투자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죠.”
당시에는 투자금이라고 해 봐야 다 합쳐도 몇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홍콩 W&R 본사의 투자금만 47억 달러가 넘었으니 말 그대로 엄청난 차이였다.
이 금액도 아무리 변호사라고는 하지만 외부인에게는 밝힐 수 없는 브릭스에 대한 투자나 HP에 대한 공매도 그리고 한국 지사의 자금 그리고 AAM의 투자금을 제외한 금액이었다.
“이제 제가 정보 제공의 대가는 이야기했던 금액은 50억 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회사의 자문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됐네요. 제가 다청 홍콩 지사를 일하게 된 것은 모두 에드릭 대인 덕분입니다.”
“다청 홍콩 지사에서 일하는 정도가 아니죠. 제가 알기로는 임 변호사께서 다청 홍콩 지사를 실제로 운영하신다고 하던데요······.”
“뭐······ 모두 에드릭 대인의 덕분입니다.”
임순이 다시 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청은 중국 최대 법률회사 중 하나였고, 홍콩 지사는 다청의 가장 중요한 지사 중 하나였다.
임순은 이제 30대 중반 나이에 그런 홍콩 지사의 실세가 된 것이었다.
“퇴사 처리는 류오린과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퇴직 보너스와 남은 성과급인데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임순이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내가 물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어려웠지 회사를 그만둔 다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그동안 하지 못했었다.
류오린을 퇴사하는 것에서 가장 문제가 된 점은 내가 계약보다 2개월 정도 먼저 퇴직하는 것이었다.
리안과 조민 그리고 장샤오이를 통해서 홍콩과 중국의 주주들과는 퇴사에 대한 조율을 이미 끝냈다.
하지만 직접 류오린을 경영하는 경영진 중에는 내 퇴사에 반대하는 이사들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류오린이 좀 특수한 목적의 투자회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투자회사였다.
올해 들어서 3팀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류오린 나머지 전체가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오히려 많았다.
직원은 잘 모르지만, 이사들은 내가 두 달이라도 회사에 남아 있었을 때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보너스의 액수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투자회사 직원들, 특히 이사진의 목적은 본인들의 수익이었고 그들에게 나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내 퇴직 이후는 물론이고 3팀이 독립한 이후에도 1년 동안 류오린을 통해서 거래하는 계약을 맺어야만 했다.
두 달 먼저 내 퇴직을 허용하고 1년 이상의 계약 연장을 받아 낸 류오린 경영진이 아주 만족했다.
물론 내가 조건을 내세운 이유는 이미 장샤오이를 통해서 류오린의 비밀 계좌를 이용하려고 거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류오린 이사진은 이런 사실을 몰랐으니 협상에서 크게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알아보니 퇴직할 때 받을 수 있는 퇴직 보너스 액수가 천만 달러 단위라서 이대로 진행되면 세금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세금이라······ 그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CIA를 그만둔다고 해도 한동안은 당연히 관리를 받는다.
세금이 문제가 아니라 한동안 내 개인 재산이 가시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피해야 했다.
작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작년에 벌어들인 소득 때문에 아직 올해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을 사거나 이런저런 투자 조항을 이용하더라도 올해 내가 내야 할 세금은 막대했다.
나는 CIA를 그만두는 이번 달까지, 아니 되도록 재외국민 특별 조항을 이용해서 10월까지 미룰 생각이었다.
그나마 W&R이 벌어들인 수익이 직접적인 내 수익으로 잡히지 않고 이런저런 회사 명의로 주식이 분산되어 있기에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내 이름이 포브스나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언론에 오르내렸을 것이고 그러면 미국 정부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 변호사님은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으면 하는데요?”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회사를 세워서 투자하는 것입니다.”
“회사를 세워서 투자하자고요?”
내가 되물었다.
“예.”
임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임순에 대답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관리하는 차명으로 관리하는 회사는 이미 30개가 넘었다.
그런데 또 다른 회사를 세우자니······.
“정말 그 방법밖에는 없나요?”
“내키지 않으십니까?”
임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짐작하겠지만 이미 내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회사가 꽤 여럿입니다.”
임순은 AAM에 내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 나와 자문 계약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미 내가 얼마나 많은 지분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W&R의 주주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두 달 일찍 퇴직하기 위해서 막대한 금액이 오가는 W&R의 거래를 류오린에 1년 넘게 맡기겠다는 협상 조건을 제안했었다.
주요 주주가 아니라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새로운 회사를 세우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다른 제안도 있기는 합니다.”
“다른 제안요?”
“예. 이사진에서 류오린의 자사주 일부를 보너스와 맞바꾸자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류오린의 자사주요? 그런 게 있었어요?”
류오린은 상장된 기업도 아니다 보니 주식거래도 당연히 거의 없었다.
홍콩부호들과 중국 국영기업들의 합작 기업이었고 지분은 정확히 50 대 50이었다.
자사주 같은 것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예. 이미 아시겠지만 전 중국은행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때 중국은행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류오린에서 매입했습니다. 그 지분이 자사주로 처리되고 있는데 그 지분 중 일부를 매입하라는 제안입니다.”
임순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말을 하고도 그리 내키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하자고 하세요.”
내 대답에 임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식으로든 류오린에 묶어 놓으려는 뻔한 수작인데······. 이걸 받아들이시겠다고요?”
“나쁠 것이 없어 보이네요. 류오린 정도면 꽤 괜찮은 투자회사죠.”
“류오린이 최근에 수익이 나고는 있지만 그건 모두 3팀과 W&R과의 거래 때문입니다.”
“그대로 처리해 주세요.”
내 말에 임순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2.
임순에게 몇 가지 더 지시를 내리고 나는 그와 헤어져 W&R 사무실로 향했다.
W&R의 사무실로 가면서 과연 류오린의 지분을 내게 매각하려고 시킨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지금까지 류오린은 중국 쪽에서 사실상 마음대로 움직이는 회사였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진 홍콩 쪽과는 달리 중국 쪽 지분도 명목상 회사는 여럿이지만 사실상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하나처럼 움직였다.
내게 매각하려는 지분이 중국은행 쪽에서 나온 지분이라면 내가 가진 지분을 홍콩 지분과 합치면 50%가 넘는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홍콩 부호들 상당수는 이미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홍콩 지분 50%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가지게 될 지분은 본래 중국 쪽 지분이었다.
상대의 지분 하나를 가져오면 실제로는 두 개를 가져오는 셈이었다.
내 지분을 합치면 지금처럼 중국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류오린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사실을 모를 만큼 류오린의 경영진이 바보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런 일을 배후에서 이런 일을 조종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부분이었다.
내가 류오린 지분을 가졌을 때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와 가장 가까운 리안?
아니면 역시 류오린의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집안 출신의 조민?
전혀 예상외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바로 장샤오이 같은······.
“재미있네······.”
쫄깃쫄깃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3.
W&R에 오랜만에 온 나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조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온 것은 류오린과는 상관없는 일 때문이었다.
어차피 류오린 지분 매각 배후에 누가 있든 지분 매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찾아올 리가 없었다.
“예상한 대로 휴렛팩커드의 컴팩 인수 합병이 통과됐어요. 공매도는 어떻게 할까요?”
조민이 나를 찾아온 것은 휴렛팩커드의 컴팩 인수 표결 때문이었다.
“저도 확인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표차가 박빙이더군요.”
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놀랐어요. 조금 더 표차가 날 줄 알았는데 겨우 2.3% 차로 겨우 통과됐더라고요.”
나와 조민이 휴렛팩커드의 컴팩 인수가 성공을 확신했던 이유는 의결권 자문 기관들이 휴렛팩커드의 컴팩 인수에 찬성 의견을 냈기 때문이었다.
그 의견에 영향을 받는 연기금의 지분은 최소 15%에서 20%였다.
“조민 씨는 이번 표결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만큼 PC 사업의 전망이 어둡다는 말 아닐까요? 저도 이번 결정은 완전히 실수라는 생각해요. 설사 PC 사업의 전망이 있다고 해도 컴팩 인수 금액이 너무 비싸고요. 컴팩 인수가 지연되면서 컴팩 주가가 너무 많이 올랐어요. 이번 표결 결과는 그걸 말해 주고 있고요.”
조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것을 보면 상황을 분석하는 면에서는 리안보다 오히려 조민이 나은 점이 있었다.
리안은 일을 지시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소극적이었고 당장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한 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리안과 조민은 결혼을 인수 합병이라고 생각한다면 휴렛팩커드와 컴팩의 인수 합병보다 훨씬 시너지가 날 것 같았다.
“컴팩의 인수 합병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인데······. 그러면 공매도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계속 끌고 갈 생각입니까?”
흔히 인수 합병 관련 주식 매매에 대한 잘 알려진 투자 방침은 소문에 사서 팩트에 팔라는 것이었다.
인수기업이든 피인수 기업이든 인수 합병이 처음 알려질 때는 주가가 올라갔다가 인수 합병 후에는 주가가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는 공매도를 했으니 인수 합병 후에 주가가 내려간다면 계속 공매도를 유지하는 것이 맞았다.
더욱이 조민이 컴팩을 인수한 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공매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렇지만 조민은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단 다음 주 정도에 청산할 생각이에요.”
“휴렛팩커드의 주가가 올라갈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조민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시적으로는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떨어질 거로 생각해요.”
“그런데 왜?”
“공매도를 해 보니 드는 노력에 비해서 수익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요.”
조민이 말했다.
“이번 공매도 수익이 어느 정도죠?”
“처음 시작할 때에 비해서 20% 정도 떨어졌어요. 약간 보수적으로 공매도를 하다 보니 수익률도 그 정도고요.”
“적은 수익률은 아니네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조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계산해 보니 같은 기간에 코스피에서 얻은 수익률이 17% 정도 되더라고요.”
조민은 몇 달 사이에 20% 가까운 수익률에도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들은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그동안 팀원들이 기준점이 너무 높아진 것 같네. 투자금이 늘어난 만큼 앞으로는 이런 투자 수익률을 기록하기 어려울 텐데······.’
앞으로 일이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한창 기세가 오른 조민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