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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막을 수 없다면 이용해라
1.
조민과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리안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 앞에서 비서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맞았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사무적인 말투였다.
“새로 왔나 보죠?”
“지난주부터 출근했습니다만, 누구신지?”
“에드릭이 왔다고 안에 전해 주시죠.”
내 이름을 들은 비서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에드릭이라면 전 팀장이셨던 미스터 손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안에 들어가도 되겠죠?”
“잠시만요!”
여비서가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나를 막아섰다.
“팀장님은 오늘 새벽까지 근무하시고 지금은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
“아······.”
리안은 미국 나스닥 투자를 전담하다 보니 낮과 밤이 바뀌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보통은 낮에도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가끔은 출근을 늦게 하는 때도 있었다.
마침 오늘이 바로 그날 중 하나인 듯했다.
“집에 직접 가 봐야겠네······. 그럼 다음에 다시 보죠.”
나는 여비서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회사를 나갔다.
카이 황이나 브레이크가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홍콩에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외신에서 지적한 한국의 신용카드 위기에 대한 조사 결과를 확인하는 것도 확인한 것이지만 일단 서둘러 일본으로 단테 패트릭도 찾아가 봐야 했다.
단테 패트릭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연락을 해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주에 또 하락한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2.
W&R 건물을 나온 나는 곧바로 리안의 집으로 향했다.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리안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 거야?”
“아침!”
내 질문에 리안이 짧게 답했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홍콩에는 무슨 일이야?”
리안이 물었다.
“류오린 퇴사 관련해서 변호사랑 처리할 문제가 있어서······.”
“바쁘겠네. 보름 정도 남았나?”
리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남았지.”
“아쉽네. 같은 직장에 다닐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지금 같아서는 류오린을 그만둬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대사관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임시직이고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금도 홍콩에는 한 달에 두 번도 오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나와 리안이 나란히 옆에 앉아서 근무한 적은 별로 없었다.
“너무 마음 놓고 있는 것 아니야?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잖아.”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
“그렇기야 하지.”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투자 회의를 하자는 걸 테고······. 내가 출근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온 것을 보니 바쁜 일이 있나 보네.”
“맞아. 생각 같아서는 너 회사에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오늘 바로 홍콩을 떠나야 할 것 같아.”
“뭐가 그렇게 바빠. 혼자 세상의 일을 다 하는 줄 알겠네.”
리안이 말했다.
나는 그런 리안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바쁜 것으로 말하면 너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얼마나 바쁘면 비서 두고 일하겠어.”
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낮에 내가 회사에 없을 때 전화받을 사람이 필요해서 구했어.”
“미인이던데······ 조민이 뭐라고 안 해?”
내 질문에 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하지.”
“예상 밖이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약혼자 옆에 미인 비서가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는데? 회사에서 같이 일해서 그런가?”
내 질문에 리안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민 집안 사람이야. 본토 출신이라고 하는데 팔촌 정도 된다고 하더라고.”
“어쩐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감시를 붙였네.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인가?”
조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봤을 때 받았던 인상과 지금의 조민에 대한 인상은 꽤 많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바로 리안에 대한 조민의 태도였다.
전에도 계속 생각해 왔지만, 점점 결혼 후에 잡혀 사는 리안의 모습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리안이 화제를 돌렸다.
“바쁘다면서 남의 비서가 어디 출신인지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 투자 회의 빨리해야 하는 것 아니야?”
리안의 말에 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고서야 시계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에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계를 한국에 풀어 놓고 온 것이다.
평소 차고 다니던 시계가 고가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명품 시계를 차고 다니는 스파이란 영화에서나 있는 존재였다.
나는 손을 뻗어 리안의 손목에 찬 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없었다.
“너 뭐야······?”
“네 말대로 시간이 없네.”
리안이 내 행동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어서 회의 시작하자.”
리안은 내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책상에서 보고서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난주에는 네 말대로 전반적으로 주가가 상승했어. 가장 많이 상승한 시장은 8.7%나 오른 한국이야. 이번 주에 전반적으로 상승해서 다음 주에는 조정 장세가 올 것 같은 데 네 생각은 어때?”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특히 다음 주에 AOL 타임워너가 예정대로 대규모 감가상각한다면 아무래도 나스닥에도 영향이 있겠지.”
2000년 닷컴 버블이 절정일 때 AOL과 타임워너가 합병을 발표했다.
1,650억 달러로 기업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합병이었다.
당시에는 구세대 기업과 신세대 기업의 결합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곧 실패로 밝혀졌다.
그리고 올해 들어 AOL 타임워너는 합병으로 입은 손해를 회계 처리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두 회사가 합병으로 입은 손해로 비용으로 처리할 액수가 542억 달러였었나?”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지간한 국가의 1년 GDP에 맞먹는 금액이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의 GDP가 700억 달러에서 800억 달러 정도였다.
그런 엄청난 액수가 합병 2년 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간 것이다.
“그런 발표가 있으면 사람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겠네.”
“그렇지.”
내가 대답했다.
“알았어. 어쨌든 그런 큰 이벤트가 있으면 투자 방향을 정하기는 쉽지.”
고개를 끄덕이던 리안이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정도면 굳이 찾아올 필요 없이 전화로 해도 되는 것 아니야?”
“그냥 홍콩까지 왔으니 보고 가려고 한 거지.”
내 대답에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 감격스럽네.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지 몰랐는데.”
리안과 전화를 자주 하고 직접 만나서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리안이 관리하는 투자금은 거의 50억 달러였다.
리안이 원하는 것이 가문의 재기였기 때문에 가문의 명예를 송두리째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나를 배신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만을 믿고 있기에는 50억 달러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3.
리안의 집을 나와서 나는 곧장 홍콩 공항으로 향했다.
바로 옆이 내 집이었지만 집에 들르지도 못했다.
따지고 보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딱히 집에 들를 이유도 별로 없었다.
고용인들만이 지키는 집일 뿐이었다.
홍콩에서 도쿄 사이를 오가는 항공편은 하루에도 수십 편이 있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좌석은 여유가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국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출국 절차와 4시간 30분 정도의 비행시간 그리고 입국 절차를 거쳐서 도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다.
호텔에 도착해서도 나는 쉴 시간이 없었다.
내일 단테 패트릭을 만나서 그를 안정시키려면 겉으로나마 그럴듯한 해결책을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밤새 일본 신문과 가지고 온 자료를 검토해야만 했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는 오전 단테 패트릭을 만났다.
“어서 오게.”
단테 패트릭은 지난번 봤을 때보다 표정이 더 좋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잘 지내셨냐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티가 많이 나나 보군.”
“예, 조금······.”
아무리 행정 쪽이었다고 해도 어쨌든 단테 패트릭도 CIA의 베테랑 요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었다.
스파이로서만이 아니라 단테 패트릭은 원하는 목표를 이루려면 저렇게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곤란했다.
단테 패트릭의 목표는 올해 안에 CIA 본부로 돌아가서 CIA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어디나 그렇듯, 아니 CIA는 오히려 다른 곳보다 더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정치적인 감각이 필요했다.
CIA의 고위직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정부 관리들이나 혹은 미국의 상, 하원 의원 그리고 관리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나는 곧 CIA를 그만둘 예정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단테 패트릭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이 없잖아?’
지금 당장 할 일은 단테 패트릭이 나로 인해 생긴 문제를 위에 보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달래는 일이었다.
“휴······. 내가 요즘 여론 조사가 나오는 전날이면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네.”
단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단테 패트릭이 일본 지부에 와서 한 일 중 가장 큰 일은 바로 총리가 될 가능성이 낮았던 고이즈미를 총리로 당선시킨 일이었다.
그 후 단테 패트릭은 고이즈미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일을 이뤄 냈다.
일본 정계에서 CIA, 정확하게는 단테 패트릭이 작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관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렇지만 일본 자민당 내에서 거물들은 주일 미국 대사관의 외교관인 단테 패트릭이 고이즈미 총리와 사이가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테 패트릭은 고이즈미 총리를 이용해서 미국 CIA 본부로 금의환향하고, 그렇게 본부에 돌아간 이후에도 고이즈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고이즈미가 내년 총선에서 패해서 총리에서 낙마한다면 단테 패트릭으로서는 고이즈미 총리와 밀월 관계였던 관계였던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나는 근심에 찬 단테 패트릭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 지난번에 재보궐선거 때 고이즈미 총리를 해외로 내보내자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이미 그 일은 결정됐네. 다음 주 초에 나갈 예정이야.”
단테 패트릭이 대답했다.
“잘됐네요. 그러면 그 전에 작은 이벤트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벤트?”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예. 지지율이 떨어져서 재보궐선거에서 불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자민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은 고이즈미 총리입니다. 재보궐선거 때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자면 고이즈미 총리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있나?”
“있습니다.”
단테 패트릭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 겁니다.”
“자네 제정신인가?”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국을 방문하기 전에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자니! 당장 중국과 한국이 들고 일어날 거네. 무엇보다 올해 일본은 한국과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는 침착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고이즈미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올 때부터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습니다. 실제 패전일은 8월 15일 이틀 전인 8월 13일 신사를 방문했고요. 올해도 언젠가는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할 겁니다.”
“음······ 그래서? 그 한 번 방문하는 것을 이번에 하자는 말인가?”
“예.”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방문하는 것이 8월 15일을 전후해서 방문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해야 한다면 기왕이면 선거에 도움이 되는 날이 낫겠죠.”
내 이야기를 듣던 단테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자네 중국계로 알고 있는데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단테 패트릭의 말과 달리 나는 중국계가 아니라 한국계 2세지만, 전과는 달리 한국에 머무는 지금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방문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뭐 저도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죠.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거에 도움이 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본국은 물론이고 CIA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요.”
어차피 방문해서 항의를 받을 거라면 그나마 다른 나라가 기분이 덜 상하고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을 때 방문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알았네. 내가 한번 이야기는 해 보지.”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다음 날 나는 호텔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전격적인 방문했다는 뉴스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