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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거품은 언젠가는 꺼지게 마련이다
1.
고이즈미의 전격적인 야스쿠니신사 방문은 일본 뉴스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총리의 비서라고 할 수 있는 관방장관 발표에 따르면······ 총리의 신사 방문은 관방장관도 모르는 극비였다.
아침까지 아무도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내가 신사 내막을 들은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방문 이틀 후 단테 패트릭을 통해서였다.
“그러니까, 고이즈미 총리도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할 예정이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더군.”
단테 패트릭의 대답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다.
“어쩐지 제 예상보다 너무 빨리 방문했다고 했습니다.”
“자네와 고이즈미 쪽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묘하군.”
단테 패트릭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아쉽네요.”
“뭐가 말인가? 자네 생각대로 신사를 방문하지 않았나?”
“제 생각에는 이왕이면 해외로 나가기 직전에 방문했는데, 너무 빠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단테 패트릭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너무 선거를 위해서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했다는 게 드러나니 나름 시기를 조정한 거겠지.”
“글쎄요. 지금 방문한다고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할까요? 역시 명문가 출신 도련님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체면을 차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네. 명문가 출신의 도련님 이미지가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 초부터 인기가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네. 직전 총리이자 막말과 실언을 일삼던 모리 총리와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지. 보궐선거 이기자고 그런 이미지를 바란다면 그거야말로 실수지.”
단테 패트릭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맞을 수도 있겠네요.”
잠시 침묵이 흐리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가 문제네요. 아무리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 깜짝 카드를 쓰기는 했지만 보궐선거에서 자민당의 패배는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고이즈미가 가장 큰 힘이 높은 지지율을 통한 선거에서의 승리였는데······.”
“그러게 말이야. 앞으로가 걱정이군.”
단테 패트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너무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어쨌든 여전히 고이즈미는 내년 총선 때까지는 총리일 테니까요.”
아무리 지지율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세계 두 번째 경제 대국의 지도자였다.
설사 내년에 총리직에서 밀려난다고 해도 그사이에 이용할 방법은 많았다.
“이왕이면 내년에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더 좋겠죠. 고이즈미도 그걸 바랄 테고요.”
“그렇기야 하지만······. 그러자면 내년 선거 때까지 일본 경제가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어려워 보이니 큰일이야.”
“잘되기를 바라야죠.”
“자네만 믿겠네.”
단테 패트릭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저는 일단 처리할 일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일본까지 와 줘서 고마웠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하는 단테 패트릭에게 서둘러 인사하고 헤어졌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2.
한국에 돌아오자 하성철이 나를 찾아왔다.
“지난번에 지시했던 조사를 한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어느 지시를 말하는 거죠? 두 가지였는데요.”
내가 하성철에게 지시한 것은 가이닉스 채권단과 경영진이 마이크론 인수 합병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소문과 한국 카드사 상황에 대한 조사였다.
“두 가지 모두입니다.”
“두 가지 모두 벌써 끝났나요?”
내가 되물었다.
“예. 생각보다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성철은 손에 들고 온 보고서를 나를 향해 내밀었다.
“여기 두 가지에 대한 조사 보고서입니다.”
나는 보고서를 시선을 떼고 하성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하성철의 대답과 표정을 통해 나는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쉽게 조사를 마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커서 감출 수 없을 정도라는 의미였다.
나는 하성철의 손에서 보고서를 받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고서는 일단 두고 말로 보고해 보세요.”
하성철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이닉스 채권단과 경영진의 동향에 대해 보고를 드리자면 먼저 이야기하신 것처럼 알려진 것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채권단보다 경영진의 분위기가 훨씬 나쁩니다.”
“인수 합병 결정이 일주일 정도 남았나요?”
“그 정도 남았습니다.”
“그럼 인수 합병 조인식 날 가이닉스 경영진이 합병에 반대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성철이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듯이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는 단순히 마이크론 회사 차원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구한 사항이었다.
그것도 재무부장관이 직접 한국 정부에 요구한 것이었고 한국도 대통령이 직접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마이크론이 미국 정부에 대한 로비로 받아 낸 약속이었다.
물론 미국 정부가 단순히 로비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를 통해서 닷컴 버블 이후 침체한 경기를 살리고 미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가이닉스의 채권단인 한국의 은행들이 대부분 한국 정부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요구였다.
그렇지만 한 가지 마이크론과 미국 정부가 간과한 것은 현재 한국의 대통령은 레임덕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건이 이번 달에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검찰이 대통령의 아들들이 관련된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발표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대통령이 3일간 과로를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마지막이 여당의 차기 대선 후보 경선이었다.
내가 홍콩과 일본에 다녀오는 동안 한국의 여당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났다.
그리고 선출된 후보는 대통령이 지원한 후보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늙고 사정 기관인 검찰이나 여당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깊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CIA 요원 신분만 생각하면 당장 본국으로 직접 알리거나 엘리어스에게라도 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면 흔들리는 가이닉스의 경영진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알리자니 걸리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는 내 업무 영역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이런 보고를 본국에 했다는 사실이 한국 CIA 지부에 알려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한국 CIA 지부는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그렇다고 엘리어스에게 알리자니 그것도 웃긴 일이었다.
도대체 엘리어스가 뭐라고 내가 이런 일까지 알려 준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내가 언제부터 미국에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였다고, 새삼스럽게 미국의 국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웃긴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일단 가이닉스 경영진에 집중해서 사람들을 붙이세요.”
“사람을요?”
“예. 정윤호 씨에게 이야기하면 적당한 사람을 알아봐 줄 겁니다.”
정윤호는 전직 국정원 직원이었다.
비록 해외 부서였다고는 하지만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성철이 대답했다.
가이닉스에 대한 정보를 이용할지 결정을 미룬 나는 다른 문제에 관해 물었다.
“카드사 상황은 어떻습니까? 정말 외신들 보도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태입니까?”
내 질문에 하성철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조사를 지시받기 전에도 저도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한국 카드사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래요? 도대체 얼마나 심각하기에······?”
“한국에서 몇 년간 발행된 카드가 1억 장을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제 인구를 생각하면 대략 한 사람이 최소 4개에서 5개 이상의 카드를 발급받았다는 말입니다.”
“본국이나 유럽도 한 사람이 그 정도 카드는 가지고 있으니 카드 발급량 자체는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문제는 최근에 카드 발행량이 급증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특히 20대와 40대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행되었고 심지어 고등학생들에게까지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카드를 그런 식으로 무자격자에게도 발행했다면 연체가 만만치 않을 텐데, 재원은 어떻게 조달한 겁니까?”
“상당수의 카드사가 채권을 발행해서 조달하고 있다고 합니다.”
재원 조달 방법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나라의 금융기관도 비슷한 방법으로 재원을 조달했다.
“금액은요?”
“그게 진짜 문제입니다. 지금 상태라면 연말이면 카드채 관련 금액이 원화로 100조 원, 달러당 1,250원 기준으로 800억 달러에 달할 것 같습니다.”
“800억 달러요?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800억 달러면 한국이 외환 위기 때 해외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차관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작년 전 세계 주식시장 중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오른 국가 중 하나였는데······. 그게 다 카드 빚으로 이룬 성과네요.”
“카드사 상황만 보면 틀린 말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년 주요 국가 중에서 주식시장이 가장 많은 상승 폭을 보인 국가는 러시아였고 그다음이 한국이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는 IMF 체제 공식 종식을 알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런 문제가 숨어 있었다.
“거품은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가이닉스 경영진 상황과는 달리 카드사 상황은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는 하성철과도 직접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100조 원이면 단순히 카드사에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외신에서 보도된 이상 한국 카드사나 금융기관이 해외에서 자금을 더 빌리는 것이 불가능해질 겁니다.”
“그렇겠죠.”
지금 한국의 카드사가 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저리로 돈을 빌려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전혀 갚을 능력이 없거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카드사가 조폭이 아닌 이상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재산보다 많은 돈을 받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카드사 대부분이 부도 위험에 빠지게 될 텐데······. 아시겠지만, 한국의 카드사는 대부분이 재벌 계열사이거나 은행 계열사들입니다. 카드사 상황이 한국 경제 전반을 어렵게 하겠죠.”
하성철이 대답했다.
한국 카드사 상황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만큼 심각했다.
아예 몰랐다면 더 지속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외신에서 보도가 된 이상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카드사는 물론이고 그 모회사인 재벌 기업과 은행들도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 정부도······.
하지만 문제는 한국 정부가 지금 레임덕 사태라는 점이었다.
이미 여당에서도 차기 대선 후보가 결정된 이상 권력은 차기 대선 후보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여당의 대선 후보는 야당의 대선 후보보다 지지율이 훨씬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서 단기간에 이 상황을 수습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어느 나라나 레임덕 상황에서는 공무원들은 극도로 몸을 사리는 법이었다.
나는 순간 가이닉스에 대한 인수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첫 번째 보고가 생각났다.
“가이닉스 인수 합병이 진짜로 무산되면 주식시장의 폭탄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내 이야기에 하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곪고 있는 상황에서는 작은 불씨가 전체 상황을 바꿔 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가이닉스는 지난 몇 달 동안 한국 증시를 주도해 온 이슈였다.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 실패는 작은 불씨 정도가 아니라 핵폭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성철 씨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대응 방안을 물었다.
상황에 대한 분석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분석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우선 가이닉스 인수가 확정되기까지 모든 주식을 팔아야죠. 이미 올라오기 전에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려 놓았습니다.”
경제는 물론이고 주식시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불확실성이었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가이닉스 인수가 불확실하게 된 이상 하성철의 판단은 적절했다.
“그리고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다음은 물론 본사의 허락이 필요한 일입니다만······.”
하성철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제 생각 같아서는 만약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 실패가 사실이 된다면 선물이나 옵션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물론 매도 포지션으로요. 최소한 반년 동안은 한국 기업들 대부분이 바닥까지 떨어질 테니까요.”
현재 한국 코스피나 코스닥에 대한 선물 옵션거래는 홍콩에서 조민이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 지사의 하성철은 개별 주식에 대한 투자만 허락받은 상태였다.
“좋습니다. 제가 본사에 이야기해 보죠. 현재 홍콩에서 전담하고 있는 한국 파생 시장에 대한 거래를 한국 지부에서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보겠습니다.”
내 말에 어두웠던 하성철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파생 금융시장에 대한 거래를 한국 지부로 옮기는 것은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었다.
한국은 911 이후 파생 금융시장 거래액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911 테러 직후에 풋옵션으로 수백 배의 이익을 봤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박은 911 테러 같은 엄청난 사건으로 발생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대박에 눈이 먼 투자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한국 투자자들의 돈을 노리고 외국계 투자회사들도 덩달아 한국 파생 시장에 대한 거래액을 늘리고 있었다.
한국 파생 시장 거래를 한국 지사로 옮기면 조민이 반발할지도 모르지만, 그 반발은 충분히 누를 수 있었다.
한국 거래를 가져와도 조민에게는 일본 닛케이와 타이완 자취안 지수가 남아 있었다.
문득 조민에게서 한국 관련 부분을 가져오면 하성철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해졌다.
한국 관련 선물옵션 거래액만 4억 달러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