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11화 (212/270)

(211)

212.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울 필요는 없다

1.

조민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순순히 포기했다.

의외였다.

하지만 조민이 포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한국 지사도 생겼는데 제가 계속하는 게 더 이상하죠. 대신 이전처럼 다른 거래를 해 보고 싶어요.

조민이 조건을 제시해 왔다.

“엔론이나 HP 공매도 같은 거요?”

- 꼭 공매도를 해 보고 싶은 것은 아니고요. 파생 상품 거래 말고 다른 거래도 해 보고 싶어요.

조민에게 다른 거래를 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특혜를 조민에게만 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제 내가 한동안 회사 일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임시직이지만 주한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이상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매일 대사관에 출근해야 했다.

대사관 내에서 급한 일이 아닌 이상 회사와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갑자기 특권이나 재량권을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맡은 일만 제대로 한다면 남은 시간에 다른 거래를 하는 것은 조민 씨 자유입니다. 다만 그 거래에 회사 투자금을 이용하려면 미리 허락을 받아야겠죠?”

나는 사실상 조민의 제안을 거절했다.

진짜로 그런 투자를 하고 싶으면 조민 본인이나 집안의 돈으로 하거나 따로 투자를 받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조민은 실망한 목소리였다.

나까지 힘이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대신 생각해 놓았던 당근을 주기로 했다.

물론 순간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리안과 대표인 카이 황과 의논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조민의 태도로 보아서는 다행히도 리안이 조민에게 비밀을 지킨 것 같았다.

“대신 지금 한국 선물에 투자된 자금 중에서 2억 달러 정도를 조민 씨에게 계속 맡기죠. 기존 닛케이와 자취안 지수에 나눠서 투자하시면 됩니다.”

- 감사합니다.

조민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그럼 5월 1일부터 2억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투자금이 들어 있는 증권 계좌를 한국 지사에 넘겨줄 준비를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몇억 달러나 되는 투자금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민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줬다.

그 전날인 4월 30일은 내가 공식적으로 류오린을 퇴사하는 날이기도 했다.

2.

한국 투자금을 회수한다는 통보를 한 후 하성철을 내 사무실로 불렀다.

“홍콩 본사에서 한국 지사에서도 한국 파생 상품에 대해 투자를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성철이 기뻐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하성철이 말했다.

“그리고 홍콩 본사에서 관리하던 한국 투자금을 이제부터 정확하게는 5월 1일부터 한국 지사에서 관리하게 될 겁니다.”

내 이야기에 하성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정말입니까?”

“예, 이미 결정이 끝난 사항입니다.”

“그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홍콩에서 관리하는 한국 관련 자금 전부가 넘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절반 조금 안 되는 자금은 본사에 남고 나머지만 넘어올 겁니다.”

내 말을 듣던 하성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팀원들을 미리 준비시키려면 대략이라도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아야······.”

“잠시만요.”

나는 책상에 놓은 컴퓨터로 홍콩 본사에 접속해서 현재 한국에 투자된 자금을 확인해 보았다.

“현재 4억 1천만 달러 정도 되네요. 이 중에서 2억 달러 정도가 홍콩에 남고 나머지 2억 1천만 달러를 한국 지사가 넘겨받게 될 겁니다.”

“한국 파생 상품 시장에만 4억 1천만 달러나 투자하고 있었나요?”

하성철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현재로서는 그 정도 되네요.”

내 대답에 하성철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사가 한국 파생 금융 시장에만 그런 거액을 투자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성철이 W&R 본사 출신이지만 그렇다고 W&R의 투자 규모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현재 W&R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W&R의 직원들도 전체 규모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유럽 정확하게는 독일 투자를 책임지고 있는 브레이크나 일본 한국 타이완에 대한 투자를 책임지고 있는 조민도 공식적으로는 전체 투자 규모를 알지 못했다.

전체 규모를 아는 사람은 나와 리안 그리고 대표인 카이 황뿐이었다.

그들도 내가 따로 투자하는 브릭스나 개별 투자에 대해서는 몰랐다.

전체 규모를 나 외에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장샤오이뿐일 것이다.

3팀이나 W&R 그리고 나까지 모든 거래를 2팀을 통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해 주실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본사에서도 그동안 한국 지사가 보여 준 성과를 인정해서 한 조치입니다. 만약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으면 회수될 수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성철이 대답했다.

“가이닉스 경영진을 감시하라는 지시는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가이닉스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카드 사태가 장기적인 한국 경제의 악재라면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 협상 결렬은 단기적인 악재였다.

“정윤호 대표에게 사람을 소개받아서 이미 이사진에게 감시를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믿을 만한가요?”

“예. 정보 경찰 출신이라고 그런지 꽤 자세한 내용까지 보고를 해 오고 있습니다.”

“특이한 사항은요?”

“이사진이 회사에서는 물론이고 밤에도 따로 삼삼오오 식당이나 호텔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왕 사람을 붙이는 김에 대표나 주요 간부들 비서나 운전기사도 알아보세요.”

비서나 운전기사는 상사의 생각이나 일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상사들도 비서나 운전기사를 믿을 만한 사람을 쓰고 본인들도 상사에게 충실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가이닉스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가이닉스 자회사 중 상당수는 이미 팔려 나간 상태였다.

당연히 그렇게 매각된 회사에서는 가혹한 구조 조정이 뒤따랐다.

가장 먼저 해고되는 사람 중에는 경영진도 당연히 들어있었다.

모시던 상사가 해고되면 비서나 운전기사는 말 그대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다.

아마 현재 가이닉스의 경영진을 모시는 비서나 운전기사들도 한창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인수 합병으로 어수선한 요즘 같은 때라면 넘어올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하성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된다고 말하세요. 비서나 운전기사 매수하는 비용이라고 해 봐야 가이닉스를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돈에 비하면 얼마 안 되니까요.”

하성철이 사무실을 나간 후 나는 홍콩의 조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매일 하성철을 통해서 가이닉스 경영진 정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가장 큰 성과는 대표이사의 운전기사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이제 가이닉스의 대표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매수하는 데 든 비용은 몇천만 원이 정도에 불과했다.

얼마나 가이닉스의 직원들이 불안해하는지 알 수 있는 액수였다.

이렇게 한국에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예정됐던 보궐선거가 열렸고 예정된 것처럼 자민당은 패배했다.

결과만 보면 고이즈미의 신사 방문은 효과가 없었던 셈이었다.

3.

그리고 다음 날인 29일 밤.

하성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 지금 ××호텔로 급히 와 보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곧장 하성철이 이야기한 호텔로 향했다.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할 때쯤 해서 하성철이 커피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하성철을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커피숍 문 근처 좌석에 앉아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역시 출입문을 확인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 빈 좌석이 있었다.

“저쪽 빈자리로 가죠.”

되도록 저런 좌석에 앉는 것은 CIA에서 교육받은 대로였다.

문가나 창가에 앉는 것은 누군가 침입했을 때 가장 먼저 희생이 될 수 있었다.

꼭 그 교육이 아니더라도 이런 드러난 자리는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커피숍이라는 장소 자체가 은밀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대표이사를 비롯한 가이닉스의 경영진 전부가 지금, 이 호텔 방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요?”

“예.”

하성철이 대답했다.

“이사회 전날 여기 모였다면 뭔가 결심을 할 일이 있나 보네요. 가이닉스 대표가 며칠 전에 미국에 갔다 왔다죠?”

내가 물었다.

오늘 호텔에 이사진을 모은 것은 대표일 테고 그가 이사를 전부 모은 것은 미국에 다녀온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틀 전 입국했습니다. 운전기사 말로는 공항부터 회사로 들어오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고 합니다.”

“마이크론의 요구 조건이 알려진 것보다 더 나쁜가 보네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사회 전날 이사진을 따로 호텔로 불러들였다는 것은 인수 합병 제안을 거부할 생각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따로 불러낼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오늘 이사진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서 만장일치로 거절하려는 생각이겠죠.”

하성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하성철과 같은 생각이었다.

마이크론이 가이닉스를 협상 상대라고 했다면 지금쯤은 가이닉스 경영진의 동요를 눈치챘어야 맞았다.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협상 파트너인 가이닉스 경영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가이닉스를 협상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데 가이닉스 대표가 미국에 왔다고 양보할 리가 없었다.

아마 마이크론이 협상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국 정부 조금 양보하면 한국 정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이닉스 채권단 정도일 것이다.

그나마 채권단을 협상 대상에 끼워 넣은 것도 인수 후에 추가 자금을 받아 내려면 채권단을 설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긴 마이크론으로서는 이미 인수가 결정됐다고 생각할 테니······.’

마이크론이 간과한 것은 아무리 미국 정부, 한국 정부 그리고 채권단을 설득해도 결국 인수 합병 문서에 서명하는 것은 가이닉스 대표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한국의 대통령이 결정한 일을 추가 자금 지원이 없으면 부도가 날 위기인 회사의 경영진, 그것도 오너도 아니고 전문 경영진이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검찰은 대통령의 측근을 넘어서 아들들을 비롯한 가족을 조사하고 있었다.

여당은 차기 대선 주자를 결정했다.

심지어 여당 내에서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었다.

현재 한국의 대통령은 ‘레임덕’을 넘어서 이른바 ‘데드덕’ 상태였다.

“역시 이렇게 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성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 합병 막후에 있는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 협상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 합병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고 있었다.

“한동안 한국 주식 시장이 얼어붙겠네요.”

“그렇겠죠.”

아마 가이닉스의 미래는 하성철의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구한 것이었다.

가이닉스 경영진은 한국 대통령만 생각해서 거절했는지 모르지만 처음 인수 합병을 한국 정부에 제안한 것은 미국의 재무부였다.

미국 재무부는 이런 망신을 당하고 그냥 넘어가는 조직이 아니었다.

아마 어떤 식으로든 가이닉스는 이번 일에 대한 보복을 당할 것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합병 무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기업인 가이닉스를 어떤 식으로든 보호하려고 하겠지만······.

한국 정부는 레임덕 상태였다.

“이미 한국 주식은 다 정리했겠죠?”

“예. 오늘 낮에 다 정리했습니다.”

“잘했습니다. 일단 한국에 있는 자금은 계좌에 묶어 두고 상황을 지켜보세요. 한국 파생 상품에 대한 투자는 홍콩 본사에서 자금이 넘어오는 5월 1일부터 시작합니다.”

“알겠습니다.”

“너무 상황을 미리 걱정하지는 맙시다. 어쨌든 한국 경제가 가이닉스 인수 실패와 카드 사태 정도로 무너질 리는 없으니까요. 길어야 6개월에서 1년입니다. 그 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살아날 겁니다.”

“저도 한국 경제가 이대로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성철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다음 날 가이닉스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마이크론의 인수 합병 제안을 거절했다.

5월 1일 홍콩에서 넘어온 코스피 파생 상품 계좌의 잔액은 4억 7천7백만 달러였다.

지난주보다 6천 7백만 달러가 늘어나 있었다.

모두 가이닉스 인수 실패에 따른 주가 폭락으로 벌어들인 금액이었다.

W&R 본사는 이번 일로 또 다른 대박을 터트렸다.

마이크론은 가이닉스 인수 실패로 하루 사이에 10% 이상 주가가 폭락했고 W&R은 마이크론 주식 공매도로 거액을 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5월 1일 드디어 나는 류오린을 퇴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CIA 퇴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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