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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표지만 보고 책 내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1.
류오린을 그만두고 나는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 일을 위해 나는 정윤호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어떻게 사업은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부동산 투자는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윤호가 대답했다.
문제없다는 말과는 달리 정윤호는 어딘지 힘이 없어 보였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정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무슨 일이든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게 일과 관련된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말이죠.”
“알겠습니다.”
미심쩍어 보이는 부분은 있지만,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더는 묻기 어려웠다.
“오늘 제가 정 대표님은 부른 것은 예전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했던 일 때문입니다.”
“처음 만날 때라면?”
“예, 아버지에 대한 일이죠. 전에 이야기했을 때 배승윤을 검찰과 국정원이 조사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배승윤은 아버지의 운전기사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한국을 떠난 이후 갑자기 부동산을 꽤 가지게 되었고 그 재산을 바탕으로 경기도 남부에서 건설업을 했었다.
처음 재산 형성 과정에 수상한 부분이 많았고 운전기사의 특성상 당시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게 내가 그를 처음 목표로 정했던 이유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으로 정윤호를 통해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엉뚱하게도 그가 정관계 인사는 물론이고 대통령 아들들과도 연관된 비리에 연루되어 검찰과 국정원의 내사를 받고 있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배승윤이 연루된 아파트 건설 사업에 대한 검찰 공개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예. 현 정부 최대 비리 사건 중 하나로 강도 높은 검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다니, 대통령이 검찰에 대한 장악력을 잃기는 잃은 모양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되는지야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그게 배승윤에 관련됐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미 검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면 배승윤을 데려와서 정보를 캐내는 것은 어렵겠군요.”
“예.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배승윤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복수라도 해야겠죠.”
이미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면 과거 아버지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복수는 오히려 쉬울 수도 있었다.
“내일까지 지금까지 조사한 배승윤의 가족 관계, 인간관계 그리고 사업과 재산 상황을 모두 정리해서 보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다음 날 정윤호는 배승윤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이게 전부 다 배승윤에 대한 서류입니까?”
나는 그가 가져온 분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류 상자로 두 상자가 넘는 양이었다.
“거의 다 회사 서류와 이번에 조사받고 있는 사건 자료들입니다.”
수사 자료라는 말이었다.
더구나 대통령 아들이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 담긴 자료였다.
이런 자료를 도대체 정윤호가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했다.
“그런 자료를 어디서 입수한 겁니까?”
내 질문에 정윤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야당 의원 쪽에서 입수한 자료입니다.”
나는 정윤호의 말을 들으며 상자 안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번 조사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 아들들에 대한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아무리 야당 의원이 경찰이나 검찰에 자료를 제출 요구를 했다고 해도 넘길 수 있는 자료가 아니었다.
“이런 자료가 정식으로 넘어간 자료는 아닐 테고······. 검찰에서는 이미 다음에 야당이 정권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나 보군요.”
“요즘 분위기로 봐서는 거의 가능성이 크죠.”
정윤호가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료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마침 직원 중에서 차기 대선 주자의 최측근 의원 보좌관과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어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인맥이라면 잘 관리할 필요가 있겠네요.”
한국의 대선은 이제 겨우 반년 정도 남았다.
이미 여당의 후보는 결정됐다.
야당의 후보는 5년 전 대선에 나왔다가 박빙으로 낙선했던 인물로 오래전에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와 어떤 식으로도 닿은 인맥이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좌관에게 꽤 두둑한 보상을 했습니다. 물론 직원에게도 성과급을 지급했고요.”
“잘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를 잠시 서류 박스를 보다가 정윤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회사나 이번 사건 서류 말고 가족 관계나 재산 상태가 나온 서류는 어디에······?”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정윤호는 내가 열어 봤던 서류 박스 옆에 있던 다른 서류 박스를 열어서 가장 위에 있는 문서철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정윤호에게 받은 서류를 살펴보았다.
“가족은 아들만 두 명이고······. 두 아들이 나이가 약간 차이가 있네요. 어머니도 다르고요. 큰아들이 꽤 나이가 많네요? 아버지 운전기사를 할 때 이미 아들이 있었네요?”
첫째 아들은 이미 30대 초반이었다.
“예. 첫째 아들은 배승윤이 19살 때 첫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12살 차이가 나는 셈이죠. 한국에서는 흔히 띠동갑이라고 부르는 나이 차이입니다.”
“둘 사이는 어떤가요?”
“둘 사이는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배승윤의 현 부인과 첫째 아들 사이는 좋지 않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계모와 구박받는 전처 아들 뭐 그런 건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배승윤이 첫째 아들을 사업에 참여시키는 데 부인이 불안감을 느끼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 중 상당 부분을 계모 명의로 돌린 것에 불만을 터트리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재산 문제군요.”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나는 페이지를 넘겨 배승윤 일가의 재산에 관한 서류로 살펴보았다.
“경기도에 땅이 아주 많네요?”
“예. 예전에는 그렇게 큰 가치가 없었습니다만 제가 따로 조사한 바로는 앞으로는 꽤 개발될 가능성이 높은 땅이 많습니다.”
아마 이 중 상당수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땅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재산을 바탕으로 이룩한 재산일 것이다.
어차피 배승윤을 직접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의 재산이라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런 작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배승윤이 밖에 있어서는 곤란했다.
“우선 배승윤을 감옥에 보내야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검찰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아마 최소 3년 동안은 나오기 어려울 겁니다.”
정윤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이대로 감옥에 보내는 것은 좀 약하죠. 지금은 변호사를 통해서 대비하고 있을 테고요.”
내 이야기에 정윤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
“사람 하나 구해 보세요.”
내가 말했다.
“사람이라면?”
“배승윤과 대통령 아들을 연결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우면 배승윤 측근도 좋고 대통령 아들 주변 인물 중에서 약점이 있는 인물도 좋고요.”
아무래도 두 사람을 연결한 사람은 검찰의 집중 조사를 받고 있을 테니 접근하거나 매수하기가 어려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꼭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건설업을 하는 사람이나 대통령의 아들들이나 주변에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시키려고 하는지···?”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승윤에게서 돈을 받아서 대통령 아들들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을 시키려고요.”
“예?”
내 말에 정윤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그런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요? 한 10억 주면 그런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 줄 설 것 같은데요?”
한국은 아직 외환 위기에서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10억이면 대통령 아들이 아니라 대통령 아들이라도 무고할 사람은 많았다.
“그건 아니지만······. 대통령 아들을 목표로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증거는 있어야······.”
“제가 따로 관리하는 해외 계좌 중에서 200만 달러 정도 든 통장이 있습니다. 물론 추적이 불가능한 계좌죠. 이 계좌 번호를 증거로 제출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예. 배승윤이 대통령 아들에게 이 해외 계좌로 돈을 입금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 추적해 봐라. 이런 증언을 검찰에 하는 거죠. 듣자니 감찰도 특별한 증거가 없어서 대통령 아들을 기소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데 이런 증거라면 개떼처럼 달려들 겁니다.”
검찰로서는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야당 대표를 위한 사냥개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계좌에 있는 돈을 찾을 수가 없을 텐데요?”
“배승윤을 감옥에 오래 보낼 수만 있다면 200만 달러 정도야 큰 손해가 아니죠.”
일단 배승윤을 감옥에 보내면 남은 첫째 아들과 배승윤의 부인에게서 재산을 토해 내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정윤호가 대답했다.
“사람을 구할 때는 나름 믿을 만해 보이는 사람을 구해 보세요. 아무리 책 표지와 내용이 다르다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믿을 만한 인물이 필요하니까요.”
“그런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건설업이나 여의도나 겉으로는 멀쩡한 놈들이 많으니까요.”
“적당히 무대가 마련되면 우리가 드러나지 않게 정보를 전달해 줬다는 보좌관을 통해 제보할 생각입니다. 직원에게도 미리 준비시키세요.”
“예.”
배승윤을 감옥에 보내기 위한 과정에서 대통령의 아들도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별다른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해 봐야 나에게는 필리핀의 에스트라다나 인도네시아의 와히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전직 대통령에게도 개인적인 원한이 없었지만, 그들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빼앗고 감옥에서 나오는 것을 막았다.
말 그대로 일일 뿐이었다.
물론 이번은 CIA가 아닌 내 개인적인 일이지만 말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게 대통령의 아들이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변명하자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비슷한 증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조금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할 뿐이었다.
2.
그날 밤 나는 홍콩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시아 주식시장이 닫힌 시간이지만 미국 나스닥에 투자하고 있는 리안은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나스닥 분위기는 어때?”
- 그저 그래. 곧 시스코가 실적을 발표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사람들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실적 전망은 어떤데?”
- 꽤 괜찮다고 하더라고. 듣자니 발표될 미국 생산성 지수도 좋다고 이야기는 있는데 아직은 확실하지는 않고······.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작년에 워낙 나빴으니 오르기는 올랐겠지. 다만 그런 생산성 향상이 기업 수익 증가로 이어지느냐가 문제지.”
- 기업 실적까지 오르려면 좀 걸리겠지.
“그래도 목소리는 나쁘지 않네.”
- 나야 뭐 나스닥만 오르면 되니까. 시스코 정도면 이번 주는 오르지 않겠어.
리안이 말했다.
말한 대로 리안의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조민 씨는 어때?”
- 자꾸 투자금을 모아서 공매도하려고 해서 내가 미치겠어. 공매도가 잘못하며 얼마나 위험한 투자인데······.
리안이 조민에게 시달리는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투자금을 모은다면 가장 먼저 자신의 집안과 리안이 첫 번째 대상일 것이다.
“이번에는 어디에 하려고 하는데?”
-다이너지라나? 예전에 공매도했던 엔론 경쟁회사라는데 여기도 위험한 건가 봐.
“아주 완벽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당한 선에서 말려. 제시 리버모어가 공매도로 파산한 거 알지?”
제시 리버모어는 20세기 초 월 스트리트의 전설로 불리던 투자자였다.
무일푼에서 수억 달러까지 재산을 모았다는 투자자들의 신화로 그가 만든 추세 매매는 아직도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모든 것을 잃고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공매도는 자칫하다가는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을 수도 있는 투자였다.
- 그래야지. 말린다고 그냥 포기할 리는 없으니 계속 살펴봐야지.
“그래. 투자 전략은 네 메일로 보냈지만 대충 나스닥을 중심으로 이번 주는 전 세계 증시가 많이는 아니어도 전체적으로 상승할 것 같아.”
-다른 나라도 전부?
“당연히 전부는 아니지. 유가가 안정됐으니 유가 상승 덕분에 주가가 오른 러시아는 조정을 거칠 테고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가 무산됐으니 반도체 회사 비중이 큰 타이완은 크게 내릴 것 같아. 더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 놓았어. 보고 내일 회의에서 이야기해 봐.”
- 알았어. 그런데 너 주한 미국 대사관에는 언제 들어가는 거야?
리안이 물었다.
“글쎄······ 곧 들어가지 않겠어?”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CIA를 그만둬야 했다.
지금 미국에서 존 베비스와 엘리어스가 내 퇴직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존 베비스는 민주당 상하원 정보위원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움직인다면 엘리어스는 직접 미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통해 백악관과 국무부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나는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나에 대해 지나친 관심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