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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체리 하나를 두 번 씹을 필요는 없다
1.
내가 지시를 내리고 얼마 후 정윤호는 가짜로 자백을 할 인물을 골라왔다.
“어떤 사람인가요?”
“대통령 아들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경기도에서 유통업을 하고 있습니다. 배승윤과는 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요.”
두 사람과 모두 아는 사이였다니 그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특별히 이 사람을 고른 이유는요?”
“작년부터 사업이 위기라더군요. 이 정부 들어서 대통령 아들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사업을 확장했는데 작년부터 검찰 조사로 자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니 그 권력이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권력의 압박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아마 이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은 기회를 이용해서 친구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 확장을 하고 나중에 내실을 다실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신이 검찰의 압박을 받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10억 가지고 되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10억이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업을 한다면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도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회사는 회생 불능이나 마찬가지여서 당장 회사가 망하면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상황입니다. 10억이면 친구가 아니라 형제라도 팔 상황이죠.”
“알았습니다. 이 사람으로 하죠.”
“그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정윤호 씨도 직접 움직이지 말고 직원을 시키도록 하세요.”
어쨌든 대통령의 아들이 돈을 받았다고 검찰에 자백을 시키는 상황이었다.
사실이어도 문제가 될 텐데 이번 일은 모함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정윤호가 뒤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큰일이었다.
아무리 검찰이나 여당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임기가 10개월 이상 남은 대통령이었다.
그것도 정계에서 수십 년간 살아남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
이번 일이 드러나는 순간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일이 어려웠다.
“이미 저나 회사가 드러나기 곤란한 일에 쓰기 위해 구해 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에 출근한 적이 없어서 저를 제외한 다른 회사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죠. 자수시킬 사람에게도 야당 쪽 인물로 소개할 생각입니다.”
부동산 투자 회사가 왜 은밀한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국정원 출신이라서 미리 대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미리 준비한 것인지······.
하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나는 정윤호에게 가짜 증인이 검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익명으로 언론사에 제보했다.
체리를 두 번이나 씹을 필요는 없었다.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은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바로 다음 날 대통령 아들이 200만 달러를 해외 비밀 계좌로 받았다는 뉴스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에 검찰이 해당 계좌를 확보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당연히 대통령 아들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대통령 아들에 대한 전격적인 소환 조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대통령은 아들의 비리에 대한 사과와 함께 집권 여당에서 탈당을 발표했다.
모두가 승자라고 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당으로서는 대통령의 비리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었고 야당은 선거에서 혹시 모를 정부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야당이 가진 불만이라면 야당 대선 후보가 결정된 뉴스가 대통령의 아들 비리와 대통령 탈당 기사에 가려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렇지만 결정된 야당 후보는 5년 전에도 현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겨뤘던 야당의 총재였다.
인지도가 부족할 염려는 없었다.
패자는 이제 완전한 식물 대통령이 된 대통령과 확실한 증거에 더는 부인하지 못하게 된 대통령의 아들 그리고 그 뇌물을 제공했다는 배승윤이었다.
특히 배승윤은 거액의 자금을 해외에 빼돌렸다는 혐의에 횡령 혐의까지 추가되면서 형량이 늘어날 것이 거의 확실했다.
남은 배승윤의 큰아들과 부인에 대한 접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들도 언론의 집중 취재 대상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국이 대통령 아들 문제로 시끄러울 때 미국에 있던 엘리어스가 귀국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갔던 일들은 잘되셨는지?”
“대충 모든 일이 어느 정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엘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예. 이제는 남북 문제에서 손을 떼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어스는 CIA 퇴직 문제 대신 다른 문제를 먼저 꺼냈다.
엘리어스가 미국에서 내 퇴직 관련 일을 처리한 것은 맞지만 그가 미국을 방문한 목적은 다른 것이었다.
바로 지금까지 해 왔던 남북 관계 조정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나는 남북 관계보다는 내 일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렇지만 엘리어스에게 내 일이 어떻게 됐는지 묻지는 않았다.
내가 초조해 보일수록 엘리어스는 그걸 이용하려고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습니까? 잘됐네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엘리어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내일 미국에서 특사가 평양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내가 물었다.
미국에서 특사가 평양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뜻밖이기는 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나름 북한을 관리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본국이 북한을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지 몰랐습니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악의 축 중 하나로 북한을 지적하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가 보니 지금 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쟁과 중동 문제만으로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보이더군요.”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쪽이 정신이 없기는 하죠.”
“공화당 인사들이 이스라엘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은 조금 심했죠. 아라파트를 사실상 감금한 것이야 정치적인 문제지만 난민 캠프에 탱크로 진입시킨 것은 다른 문제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작년부터 분쟁 중이었다.
현재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는 문제는 바로 난민 캠프를 탱크로 동원해서 점령한 일이었다.
“난민 캠프에 탱크가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미국과 유럽에 방영되면서 미국과 유럽 내에서 이스라엘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총을 든 채 탱크 옆에 서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
“그 문제로 국무부 내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그래요?”
“예. 그렇지 않아도 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유럽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해서······. 지금 유럽에서는 아랍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지만 실제로는 911도 포함될 수도 있는 이야기네요.”
“뭐 그렇죠.”
엘리어스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엘리어스도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의 행동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런 불만을 대놓고 말할 리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절대 공개 석상에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3대 금기가 있었다.
바로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 흑인에 대한 혐오 발언 그리고 마지막이 유대인에 대한 혐오 발언이었다.
이런 금기가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911 테러 이후에 이스라엘과 유대인 때문에 미국이 테러의 대상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다.
무슬림만큼이나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는 사람이 꽤 늘어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디어와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금융을 장악한 유대인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공무원으로 일하는 나나 엘리어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더 격의가 없어진 뒤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직 공개되면 약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 참······.”
엘리어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에드릭 씨는 이번 달에 CIA를 퇴직하게 될 겁니다.”
기다렸던 이야기였다.
“확실히 결정된 겁니까?”
“예. 다만 지난 2년 동안 받은 연봉에서 교육비는 공제한다고 하더군요. 전문가 양성 과정 중에 그만두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CIA에서 받는 돈은 보안 계좌로 처리된다.
나는 이 보안 계좌를 지난 2년 동안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본격적으로 투자에 나서지 않고 에디 미첼의 뒤처리를 하던 때도 그랬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이야기할 거리도 아니었다.
CIA 연봉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내가 버는 돈에 비하면 말 그대로 새 발의 피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엘리어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 가서 서류 처리는 이미 거의 다 끝냈습니다. 이번 달까지 푹 쉬시고 다음 달부터 대사관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내 감사 인사에 엘리어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뭘요. 서로서로 돕는 거죠.”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엘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에드릭 씨, 중국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홍콩에 있다 보니 조금은······.”
“잘됐네요. 본국에 갔을 때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라는 후진타오가 방문했습니다.”
후진타오는 올 초부터 활발하게 외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지난번 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미국을 방문했다.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을 때를 대비해서 본격적으로 정상외교를 위한 준비를 하는 셈이었다.
“뉴스는 봤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연말에 중국 대사관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래서 북한 문제도 이번에 정리한 거고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대사관에 들어오시면 중국 쪽 일을 하는 데 가끔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가끔이라······.’
말 그대로 불확실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CIA를 그만두는데 엘리어스와 그의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물론 이 둘의 도움만으로 내가 CIA를 퇴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빚을 진 것은 분명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퇴직을 하는 데는 다른 분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그분 일도 도와드려야 해서 엘리어스 씨만을 신경 쓸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은 존 베비스였다.
존 베비스도 내 퇴직을 위해서 따로 움직였다.
그는 CIA에서 일하는 동안 알던 상하원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움직였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직간접적으로 상하원 정보위원회의 영향력이 강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활동은 꽤 도움이 됐다.
물론 내 퇴직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쓸데없는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존 베비스는 자신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CIA에서 같이 일하던 부하가 퇴직해서 도와줬으면 한다는 식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한창 베테랑 정보분석 요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CIA 내부를 설득하는 데는 존 베비스의 도움이 컸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제가 도움을 달라고 해서 너무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사관에서 제 부하이기는 하지만 형식적이니까요.”
엘리어스가 내가 자신의 부하라는 사실을 은근슬쩍 강조했다.
나는 그런 엘리어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착각은 그의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