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14화 (215/270)

(214)

215.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1.

엘리어스와 헤어진 이후 나는 그의 말대로 한동안 휴식을 보냈다.

정확하게는 배승윤의 아들들에게 접근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자주 가는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방문했다.

배승윤을 직접 만난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두 아들은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들이었다.

아버지가 한창 검찰 조사를 받고 재판을 앞두고 있고 회사가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도 밤이면 밤마다 술집을 전전했다.

몇 번 합석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내 나이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중간이다 보니 어울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니까 동생이 홍콩 투자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일한다는 거죠?”

배승윤의 첫째 아들은 나를 자기 마음대로 동생으로 불렀다.

어이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나이를 굉장히 따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였다.

그나마 반말을 쓰지 않았다.

“예.”

아마 반말까지 들었다면 아무리 복수가 목적이라고 해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IMF 이후에 자네 같은 재미교포 출신 투자 회사 직원들이 그렇게 잘 논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요.”

배승윤의 아들이 하는 이야기는 어느 신문에 난 외국계 투자회사 직원이 이야기였다.

“그런 놈도 있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죠. 우리 회사는 홍콩 회사라서 나름 놀 때는 놀지만 일할 때는 일 열심히 합니다.”

미국이나 홍콩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런 식으로 해도 통할 만큼 한국 금융 시장은 외국계 투자사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 이거 믿음이 생기는걸······.”

배승윤의 아들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언제 한번 회사로 찾아와 봐요. 그렇지 않아도 사업 하나 끝나서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으니까.”

“이거 놀러 와서 좋은 분을 만난 것 같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배승윤의 아들과 헤어진 후 클럽을 나오고 한동안 걸었다.

둘째 아들도 큰아들과 별다른 바가 없는 철부지였다.

저런 한심한 놈들이 상대라니, 조금 힘이 빠지는 일이었다.

이건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잠시 후 차가 다가와 섰다.

구르카 출신들은 유능했지만,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새로 고용한 한국 출신 경호원들이었다.

나는 차에 타자마자 목적지를 말했다.

“인천 공항으로 가죠.”

홍콩으로 갈 생각이었다.

낮에 리안의 전화를 받고 조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굳이 갈 필요는 없지만 여기서 저런 놈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배승윤의 아들들을 보니 명문가 출신과 졸부 출신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홍콩에는 무슨 일이야?”

내가 회사로 찾아갔을 때 리안은 밤에 회사에 남아서 나스닥 지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

내가 말했다.

“다 정신이 없는데 혼자 한가하네.”

리안은 한가하다는 내 말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도 이럴 때가 있어야지.”

“하긴 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때?”

“뭐가?”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낮에 파키스탄 투자를 진짜 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이야기했잖아.”

“아······.”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아니 지금 시간이면 어제지. 하여간 어제 파키스탄 민병대가 카슈미르에서 인도군 캠프를 공격했거든······.”

“그런데?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 민병대하고 인도군이 서로 공격하는 일이 뭐가 이상하다고?”

카슈미르는 팔레스타인만큼이나 분쟁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전투는 말 그대로 일상이었다.

“그게 인도 측 희생자가 30명 정도인데······. 대부분이 캠프에 남아 있던 병사들의 부인과 아이들이라고 하더라고.”

“흠······ 좀 심각하네.”

“그렇지.”

같은 희생자라도 여자와 아이가 죽는 것과 성인 남자가 죽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사람의 목숨은 다 똑같은 것이지만 어느 쪽이 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인가는 분명했다.

“너도 알겠지만 지난번 인도 의회에 대한 테러 이후에 무샤라프 대통령이 카슈미르 민병대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이번 일은 군을 통한 민병대에 대한 통제가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미지.”

지난번 인도 의회 습격 이후 파키스탄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인도에 대한 양보를 통해서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파키스탄 정부가 알았다면 인도 군부대를 공격해서 여자와 아이들에 학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카슈미르 지역의 민병대는 민병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파키스탄군의 통제를 받는 준군사 조직이었다.

이번 일은 단순히 민병대가 정부의 방침을 어긴 게 아니라 군이 그런 행동을 방조했다는 의미였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말이 대통령이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군부독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군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지난주에는 파키스탄 내부에서 폭탄 테러로 15명이 사망했어. 지금까지 파키스탄 내부에서 테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그 목표가 외국인이었다면 이번에는 같은 파키스탄인을 노린 테러야.”

“그래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이 정국 장악력을 잃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야. 아무래도 대통령 임기 연장 선거에서 저조한 투표율로 생각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아.”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 공청단 고위층에서 내려온 지시라며?”

나는 리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키스탄에 투자하는 것은 처음부터 합리적인 판단으로 내려진 결정이 아니었다.

2년 후면 중국의 지도자가 될 후진타오의 권력 기반인 공청단의 지시였다.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포기할 수 있는 투자가 아니었다.

연기는 가능하지만, 포기가 가능한 투자가 아니었다.

“그랬지.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내가 파키스탄에 투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왜 갑자기?”

다시 물었다.

“처음 투자할 때와는 내 위치가 다르니까.”

“다르다고?”

“몰라서 물어? 다음 달이면 우리 팀이 W&R에 들어오잖아.”

“그런데? 나는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둘 다 오래전에 결정된 일이잖아.”

3팀은 W&R이 세워졌을 때부터 내가 회사를 그만두던 것과 동시에 W&R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파키스탄 투자도 연이어서 터지는 사건 때문에 미뤄졌을 뿐 몇 달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사실 중국 본토에서 이런저런 사정을 이유로 지금까지 투자를 미뤄지는 것을 이해해 준 것도 나름 배려해 준 것이었다.

“처음 계획과의 차이를 정말 모르겠어?”

“글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가 없잖아.”

“그야······.”

“홍콩 투자가들에게 3팀은 물론이고 W&R도 너와 내가 같이 만든 팀이고 회사야. 네가 나나 아저씨 뒤에 숨어 있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네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어. 일단 W&R의 투자자나 주주들이 명목상으로는 네가 끌고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걸.”

투자자나 주주 모두 내가 소유한 회사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리안과 카이 황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적어도 W&R의 투자자나 주주들이 홍콩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기간에 그 정도 돈을 벌었다면 티가 나거나 어떻게든 소문이 나야 하는데 홍콩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네가 파키스탄 투자를 포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네가 빠지고 나랑 아저씨 여기에 나랑 결혼할 조민까지 있어. 브레이크가 있다고는 하지만 W&R이 어떻게 보일 것 같아?”

“리안 네 회사?”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W&R을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런데 그런 내가 비록 W&R과는 관계가 없는 투자라도 파키스탄에 투자하면 어떨 것 같아?”

“멍청한 투자를 했다고 생각할까?”

“그럴 사람도 있겠지만 파키스탄 투자를 따라 하는 사람이 더 많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

W&R은 설립 이후 경이적인 투자수익률을 올렸다.

그런 회사의 투자를 따라 하는 사람이나 회사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현재 투자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워런 버핏이었다.

그의 투자를 따라 하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았다.

미국 투자 회사 중에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회사는 워런 버핏의 투자를 따라 한다면서 투자자를 모으는 곳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투자한 사실이 알려지면 홍콩 투자자들이 파키스탄에 몰릴 거야.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파키스탄이 그렇게 좋은 투자처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리안이 말했다.

“나는 네가 걱정을 사서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이상한 거야? 투자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잖아. 설사 네가 투자금을 받아서 다른 곳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왜 네가 책임질 수 없는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아니, 왜 네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라서 투자한 것까지 책임감을 느껴?”

내 이야기를 들은 리안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야 하니까.”

침묵을 지키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단순히 돈을 벌고 싶은 게 아니야. 내 목표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거야. 홍콩 사람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가문을 아는 사람들이 저 가문은 믿을 수 있고 따르고 싶어 하는 그런 가문 말이야.”

“꿈 같은 소리네.”

존경받는 부자도 거의 없었다.

존경받으면서 부자가 되기 쉬운 세상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존경받는 부자도 아니고 존경받는 가문이라니······.

돈을 벌면서 존경까지 받겠다니······.

“겨우 네 덕분에 예전 자리를 찾아가는데 우리 가문을 따라서 투자했다가 돈을 날리면 처음부터 목표를 벗어나는 거잖아.”

“나 참, 욕심도 많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몰라.”

“그냥 돈만을 생각하면 지금도 충분해. 예전에도 적은 돈은 아니었고······.”

리안은 뭔가 자신의 말에 취한 듯 감격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솔직하면 말하면 어이가 없었다.

나와 함께 투자하기 전 리안의 재산 대부분은 건물과 부동산이었다.

다른 재화가 그렇듯 땅과 집이 부족한 홍콩에서 누군가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적게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홍콩 사람들 상당수는 겨우 몸이 누울 공간에서 살아간다.

더구나 나와 함께 투자에 나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돈을 번 곳은 주식이 아니었다.

주로 돈을 번 것은 선물거래였고 옵션이나 몇 번의 공매도도 있었다.

모두가 다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 돈을 잃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가격이 오르면 다 돈을 버는 주식과는 달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존경받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니······.

예전 리안의 집안이 홍콩 내에서 어떤 가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방법은 다를 뿐 그게 노골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리안의 선대도 누군가를 희생시켜서 돈을 벌었을 것이다.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말처럼 이런 말을 리안에게 바로 직설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목표인 리안을 적으로 돌린다는 말인데······.

내가 그래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존경받는 부자가 되겠다니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를 먼저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적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공청단에는 어떻게 파키스탄 투자 포기를 설득하려고?”

현실적인 내 이야기에 감상에 빠져 있던 리안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낮에 아저씨를 베이징으로 보냈어. 정 안되면 1억 달러를 모두 쓰더라도 파키스탄 투자를 포기한다는 약속을 받아 낼 생각이야.”

리안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파키스탄 투자를 포기하는 이유도 그걸 위해 1억 달러를 모두 써 버릴 생각이라는 말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리안이 이런 ‘꼴통’이라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W&R과 별개로 장샤오이를 통한 거래 규모를 늘려야 할 것 같았다.

흔히 말하지 않던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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