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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문을 닫든 열든 한 가지만 해야 한다
1.
리안과 헤어진 후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리안이 명예나 가문에 집착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국 차기 지도부인 공청단의 지시를 거부하겠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리안은 권력의 무서움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당장 리안의 아버지가 중국 현 지도부, 즉 상하이방과의 알력으로 홍콩을 떠나야 했고, 리안은 강제로 가주직을 물려받았다.
그런 리안이 중국 차기 지도부인 공청단의 지시를 거부할 결심을 한 데는 뭔가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 일은 리안과 계속 같이 일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정도의 사안이었다.
내가 이번 일을 물어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번 일에 대해서 알 만한 인물 중에서 리안의 주변 인물을 제외하면 단둘뿐이었다.
바로 류오린의 장샤오이와 다청에서 일하는 임순이었다.
임순은 W&R의 고문변호사이면서 W&R의 관계자 중에서 유일하게 리안보다 나와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나는 약속을 잡고 다청의 홍콩사무소로 찾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출구 앞에는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을 한 임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순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나와 있는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다청의 홍콩사무소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조금 놀랐다.
“홍콩사무소가 꽤 크네요?”
내 질문에 임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크게 벌려 보였다.
“가장 중요한 해외 사무소 중 하나니까요.”
임순의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제 사무실은 이쪽입니다.”
도착한 임순의 사무실 창밖으로 홍콩만이 내려다보였다.
사무실의 위치 자체가 임순이 다청 홍콩사무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사무실 전망도 좋네요.”
“모두가 W&R 덕분입니다. 에드릭 씨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는 데 최소한 몇 년은 더 걸렸을 겁니다. 에드릭 씨에게는 출근할 때마다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임순의 아부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은 실용적인 변호사 사무실로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다.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실내장식이라면 사무실 한쪽 홍콩만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있는 안락의자였다.
금으로 도금이 됐는지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에 번쩍번쩍 빛이 났다.
보통은 약간 촌스러워 보일 만도 한데도 고급스러워 보는 것이 꽤 고가인 듯했다.
내가 안락의자를 보는 것을 눈치챈 임순이 입을 열었다.
“제 전임자가 아끼던 의자인데, 저도 사용해 보니 나쁘지 않더군요. 저녁에 앉아서 해가 지는 것을 보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하게 풀리더군요.”
임순의 나이는 이제 30대 후반······.
안락의자에 앉아서 석양을 즐기기에는 직업이나 나이나 모두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임순이 저 의자를 아낀다면, 그건 아마도 고급스러운 황금빛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인들의 금에 대한 집착은 예전부터 유명하니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W&R에 대한 문제라니 도대체 어떤······.”
임순이 무언가를 생각한 듯 한동안 말을 멈추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를 무슨 자격으로 찾아오셨는지부터 묻는 게 먼저겠네요. 제가 들으니 류오린을 그만두셨다고 하셔서요.”
임순의 표정은 어느새 변호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회사를 그만뒀으니 류오린이나 W&R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뭐 이런 건가요?”
내가 물었다.
“아시겠지만 어느 나라나 변호사에게는 고객 비밀 유지 의무가 있습니다. 에드릭 씨가 저를 류오린과 W&R에 소개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이제 더는 관계자가 아니라면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임순이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임순의 반응이 일에 철저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회사를 그만뒀으니 더는 잘 보일 필요가 없어서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내 전화 한 통이면 W&R과 다청의 법률 계약이 끝난다고 해도요? 그래도 말하기 어려운가요?”
내 협박성 말에 임순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전히 W&R에 영향력이 있다는 말이군요. 그건 관계자라는 말이고요.”
“아니라고 생각하셨나요? 그 정도 정보력은 있는 줄 알았는데요. 실망이네요.”
“비공식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것과 법적으로 관계자인 것은 다르니까요. 죄송하지만 그럼 지금 W&R 카이 황 대표님께 전화를 걸어서 제가 에드릭씨에게 회사 일을 이야기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지금요?”
내가 되물었다.
“예. 될 수 있으면 팩스로 된 문서나 그게 안 된다면 카이 황 대표님의 허락을 녹음하는 것이라도 허락해 주시도록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국, 허락이 없으면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 뭐 이런 이야기인가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당신 방식인가?”
나는 화난 표정으로 임순을 압박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지만, 다청과 법률 계약을 맺은 회사에 관한 비밀 이야기라면 관계자가 아닌 사람에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임순이 말했다.
그는 나에게 굉장히 미안한 표정이었다.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만은 고객 비밀보장에 충실한 변호사의 모습이었다.
“직업에 충실한 모습 마음에 드네요.”
나는 일단 임순을 칭찬했다.
그의 모습이 진실이든 아니면 꾸민 모습이든 현재 보여 주는 모습에 어울리는 칭찬을 해 준 것이었다.
“내가 오늘 온 것은 W&R 회사 일 때문이 아니니 비밀 유지 의무 조항은 관계가 없습니다.”
내 말에 임순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아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고요.”
내 말에 임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무슨······?
“제가 물으려고 하는 것은 W&R 내부 비밀이 아니라 여기 홍콩 현지에서 W&R에 대한 평판이 어떤지, 그리고 리안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내 이야기에 임순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씀대로 고객 비밀 유지 조항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문변호사로서 고객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고객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도의적으로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임순 변호사께 그 정도 호의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닙니까?”
나는 말을 마치고 임순을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알겠습니다.”
마침내 임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2.
나는 장샤오이를 기다리면서 임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리안의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임순의 말에 의하면 리안의 현재 상황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가 간과했던 부분은 바로 사람들의 질투였다.
지난 일 년이 조금 동안 리안과 W&R은 말 그대로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미국 나스닥이었다.
그렇지만 나스닥에서 벌어들인 수익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 타이완에서 벌어들인 수익에 대해서는 홍콩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적었다.
홍콩 부호들이 아는 것은 그중 일부인 홍콩 항셍 지수에 대한 투자와 러시아에 투자했던 RAM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 홍콩 항셍 지수는 25% 가까이 떨어졌다.
홍콩에 투자한 투자자들 대부분이 돈을 잃었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W&R만 돈을 벌어들였으니, 미움을 받을 조건은 충분했다.
하지만 홍콩에서 벌어들인 돈은 단순히 사촌이 땅을 산 것에 대한 질투 수준이 아니었다.
W&R의 홍콩 항셍 지수에 대한 투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선물과 옵션 투자였다.
이런 거래는 근본적으로 제로섬게임이다.
W&R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만큼 항셍 지수 선물 옵션에 투자한 누군가는 돈을 잃었다는 의미였다.
홍콩이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금융 중심지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홍콩 파생상품 시장에 투자하는 투자자 중 많은 수는 홍콩인, 그중에서도 홍콩의 금융기관이었다.
그리고 그 홍콩 금융기관의 투자자 혹은 주주는 바로 홍콩의 부호들이었다.
최근에 확인한 카이 황이 관리하는 홍콩 항셍 지수 관련 투자금의 규모는 8억 달러 정도였다.
초기 투자금을 생각하면 W&R은 8억 달러를 홍콩 항셍 시장에서 벌어들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본 그 누군가 중 상당수는 바로 홍콩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홍콩의 부호들이었다.
자신은 지난 한 해 동안 엄청난 재산을 잃었는데 누군가가 그런 자신의 돈을 가져갔으니, 상대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홍콩 부호들 상당수는 돈을 찾아서 중국에서 넘어올 정도로 돈에 집착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 미움이 W&R을 실질적으로 운영한다고 알려진 리안에게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사실 여기까지라면 리안의 아버지가 다른 홍콩 사람들, 정확하게는 홍콩 부호들을 위해 나섰던 과거를 생각하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임순에게 들으니 리안의 아버지는 쫓겨났지만, 리안의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한 덕분에 홍콩 부호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중국 정부로부터 꽤 지켜 낼 수 있었다.
리안 혼자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면, 그냥 자신들이 졌던 과거의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RAM이었다.
RAM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홍콩 내에서 꽤 알려졌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냥 러시아에 투자해서 운 좋게 벌었다는 정도가 알려진 전부였다.
직접 투자한 투자자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익은 작년 러시아 지수가 상승한 90% 정도였다.
중국 상하이 지수가 21% 떨어지고 항셍 지수가 25% 가까이 떨어지는 와중에 오른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해도 부러움을 받을 만한 수익률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LOB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RAM의 작년 수익률이 외부로 유출됐다.
내가 매각하던 당시 RAM의 수익률은 무려 1,600%에 가까웠다.
5천만 달러를 투자해서 무려 8억 달러 넘게 벌어들인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홍콩 부호들 사이에 엄청난 파문이 생겼다고 한다.
이번에는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관련된 일이었다.
그 뒤로는 예상하는 그대로였다.
예전부터 W&R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은 있었지만, RAM의 수익률이 알려진 이후로는 압박의 강도가 예전과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그런 압박에 이기지 못해 RAM도 투자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20억 달러 정도 투자금이 늘었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걱정이었다.
RAM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빈껍데기 회사였다.
직원은 다 유령 직원이었고 실제 투자 운용은 나와 브레이크가 전담했다.
20억 달러의 투자금을 운용할 인력이 없었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성과가 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RAM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리안이 운영한다고 생각하는 W&R에 직접 투자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실질적인 주인인 나는 투자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그 점은 리안에게도 분명히 했다.
그 와중에도 W&R은 홍콩 파생 시장에서 선전했으니, 리안이 받았을 압박은 내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리안의 말대로 파키스탄에 투자하면 홍콩 자금이 파키스탄으로 우르르 몰려갈 수도 있었다.
그들은 파키스탄이 위험하다는 생각보다는 러시아에서 RAM이 1,600%의 수익률을 얻은 것만 떠올릴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을 나에게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리안이 나름대로 해야 할 바를 한 셈이었다.
언뜻 이해할 수 없었던 리안의 행동은 단순히 가문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내가 리안과 카이 황을 홍콩에서 방패막이로 내세웠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나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홍콩에서의 일은 어쩔 수 없지만, 파키스탄 투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중국 본토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문을 열거나 닫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였다.
중국과 거리를 둔 채로 이번 일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임순에게 부탁을 해 놓았다.
이제 다른 한 사람······.
장샤오이를 통해서 이번 일의 돌파구를 찾을 생각이었다.
장샤오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샤오이를 맞았다.
오래 미뤄졌던 중국 자동차 부품 회사 설립을 시작할 때였다.
그걸 시작으로 파키스탄 투자를 자연스럽게 무산시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