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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잠시 고개를 돌려야 할 때도 있다
1.
장샤오이와의 만남은 의미가 있었다.
“저도 대강은 리안 씨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공청단 쪽에서 파키스탄에 대한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내 이야기를 들은 장샤오이는 자신이 리안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에드릭 씨가 저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제가 도울 방법이 없나 해서겠죠?”
“예,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본토에 있는 제 인맥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가요?”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바로 어렵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실망이었다.
“예. 파키스탄에 대한 투자는 단지 리안 씨에게만 요구되는 일은 아니에요. 현재 본토에서는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국가에 대규모 항만을 건설하는 일을 추진 중이에요. 본토의 기업들은 물론이고 홍콩의 해운 기업들에게도 진출하라는 압박이 가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장샤오이의 말을 들으니 CIA 정보 보고서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중국 정부가 중동까지 남중국해를 따라서 해양 운송만을 건설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파키스탄에 대한 투자는 공청단 핵심부에서 집권 후를 대비해서 준비하는 계획 중 하나라서 그걸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역시 그렇군요.”
만약 장샤오이의 말대로라면 리안이 투자 요구를 거절했을 때 받을 불이익은 예상보다 더 클 것 같았다.
상하이방과 사이가 좋지 않은 리안이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았던 것은 공청단이 리안을 보호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 공청단과도 사이가 나빠진다면 단순히 리안이나 리안 집안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W&R도 타격을 입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내 질문에 장샤오이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의외네요. 저는 에드릭 씨가 W&R을 다른 지역으로 옮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어떻게 W&R의 대표는 카이 황 씨고······.”
“저를 바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면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W&R의 진짜 주인이 제 앞에 있는 에드릭 씨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장샤오이 말에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W&R의 주주 명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W&R은 엄격한 규제를 받고 실적을 발표해야 하는 공모 펀드가 아니었다. 심지어 소수의 투자자를 모아서 비교적 자유롭게 투자하는 사모펀드도 아니었다.
회사가 소유한 자금으로 투자하는 패밀리 오피스였다.
당연히 주주가 누구인지나 그 주주의 소유 지분이 얼마인지도 비밀이었다.
“W&R이 아니라 저를 통한 거래를 통해 얻는 수익률만 봐도 누가 투자를 주도하는지 답이 나오는 이야기죠.”
내 투자 수익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장샤오이였다.
브릭스와 아시아에 주로 투자하고 있는 기존 AAM은 물론이고 W&R 한국 지부라는 명칭을 가지고는 있지만 내가 지분 100%를 가진 한국 투자도 형식적으로는 류오린 2팀, 즉 장샤오이를 통해서 하고 있었다.
“수익률을 보면 W&R의 전체 투자 방향을 정하는 것도 에드릭 씨라고 생각해요. 그런 놀라운 투자자가 두 명이나 있다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아닌가요?”
“맞습니다.”
“다음 답은 간단하죠. 에드릭 씨가 박애주의자도 아닌데 자신의 회사도 아닌 W&R의 투자를 주도할 리가 없죠. 리안 씨도 W&R에 지분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저는 에드릭 씨가 W&R의 지분 중에서 최소 70%에서 많게는 80% 정도를 소유하고 있을 거로 생각해요.”
내가 가진 지분이 83%였으니 거의 정확한 예상이었다.
“기존 AAM의 투자금도 다른 투자자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저도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어쨌든 저는 에드릭 씨가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리안 씨를 도와주시려고 저를 찾아오신 것을 대단하게 생각해요.”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너무 띄워 주시니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내 이야기를 듣던 장샤오이가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제가 돕기는 어렵겠지만 도와줄 분들을 소개해 드릴 수는 있어요.”
“도와줄 분들이요?”
“예. 첫 번째는 저와 같은 태자당 출신으로 현재 푸젠성의 성장인 시진핑 씨에요.”
“시진핑이라······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분이죠?”
내가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푸젠성의 성장인 시진핑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거물이기는 했다.
50살도 안 된 나이에 중국 개방의 상징적인 지역인 푸젠성의 성장이 되는 것은 어지간한 배경과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공청단 핵심에서 추진하는 파키스탄 투자를 거절하려는 리안을 위해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리 중요한 지역이라도 지방의 일개 성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름이 생소하시겠지만, 태자당 핵심 중의 핵심인 혁명 8대 원로 중 하나인 시중쉰 원로의 아드님이죠. 저희 집안과는 달리 개방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신 분이셔서 당 내에서 저희 집안보다는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양가장의 중심인 양상쿤과 양바이빙은 공산당 내에서 보수파에 속한 것에 비해 시중쉰은 개혁파에 속했다.
특히 시중쉰은 현재 상하이를 비롯한 저장성 그리고 푸젠성과 함께 이른바 중국 개방을 주도하는 광둥성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시중쉰 원로라면 직접 활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지 않을까요?”
8대 원로는 말 그대로 원로였다. 은퇴한 시중쉰이 아무리 아들인 시진핑을 통한다고 해도 움직일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저도 시진핑 성장님을 통해서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번 일을 도와주실 분은 시진핑 성장님 통해서 소개받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바로 현 푸젠성의 송더푸 당서기님이죠.”
장샤오이의 입에서 송더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공청단의 송더푸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장샤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만큼 송더푸는 거물이었다.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에서는 성의 공식적인 대표인 성장보다 공산당의 당서기가 훨씬 요직이기도 하지만 송더푸는 그런 지위로 평가될 인물이 아니었다.
송더푸는 중국 문제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있던 나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차기 중국 지도자가 후진타오라면 차차기 지도자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송더푸였다.
19살에 군에 입대해 30대에 후진타오 뒤를 이어서 공청단 제1당서기가 된 인물로 동년배 중에서 가장 앞선 인물이었다.
군에서 전역하기 직전에는 중국군의 핵심이라는 사군부 중 하나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2000년 푸젠성의 당서기가 되기 전에는 베이징에서 인사를 총괄하는 장관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당시 송더푸는 주요 직책 대부분을 60대 이상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서 유일한 40대 장관이자 당연히 가장 나이가 어린 장관이었다.
말 그대로 당과 군 그리고 정부의 요직을 다 거친 인물이었다.
그에게 푸젠성의 당서기는 말 그대로 중앙에서 권력을 잡기 전에 현장을 보고 오라는 경험을 쌓는 자리일 뿐이었다.
“송더푸 푸젠성 당서기가 도움을 준다면 당연히 이번 일은 쉽게 해결되겠지만 그런 거물에게 뭘 줘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네요.”
송더푸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그의 경력도 아니고 인맥도 아니었다.
송더푸는 말 그대로 중국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온 인물이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그가 후진타오 다음을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연말인 2002년 11월 15일 후진타오는 당 총서기에 물려받을 예정이니 송더푸가 바로 중앙으로 진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 후진타오 2기가 시작되며 차세대 지도자들이 결정될 때 그 자리는 송더푸가 차지할 것이 확실했다.
다음 중국을 이끌 공청단 핵심 멤버들이 송더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 당서기인 장쩌민이나 당장은 장쩌민에게서 온전한 권력을 물려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는 후진타오보다 훨씬 나은 꽌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에드릭 씨가 생각해야 하는 문제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직접 돈이나 선물로 회유할 생각이라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시진핑 성장님이나 송더푸 당서기님이나 돈보다는 꿈을 더 우선시하는 분이니까요. 그분들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선물이 필요할 거예요.”
장샤오이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어차피 뇌물을 줄 생각은 없었다.
시진핑은 모르겠지만 송더푸 정도의 거물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리안을 돕는 일이지 중국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아니었다.
송더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샤오이는 시진핑 성장을 통해서 송더푸 성서기를 소개해 준다고 이야기했었다.
중국적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장샤오이의 꽌시를 통해 시진핑 성장을 소개받고 그 시진핑 성장의 꽌시를 통해서 다시 송더푸 성서기를 소개받는 셈이었다.
실제로도 송더푸 성서기와 함께 시진핑 성장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장샤오이에게야 나중에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지급해도 되지만 송더푸는 물론이고 시진핑도 만족시킬 선물이 필요했다.
나는 무거운 숙제를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간이 지나고 다음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할 시기가 왔지만, 무엇으로 두 사람을 움직일까를 생각해 봤지만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처음 생각했던 자동차 부품 공장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2.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홍콩으로 다시 가서 리안이 투자를 포기하겠다고 통보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나는 장샤오이와의 대화를 이야기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지금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니 일단 공청단 쪽에 통보하는 것은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리안이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W&R을 위해서 하는 일이야. 홍콩에서 사업을 하면서, 6개월 후면 당 총서기가 되어서 중국 지도자가 될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겠다니 제정신이야?”
“확인해 보니 파키스탄 투자가 공청단 지도부에서 나온 것은 맞는데 정확히 후진타오의 의사는 아니야.”
리안도 투자를 거부하기로 하고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기는 한 듯했다.
“W&R 입장에서는 공청단 어지간한 인사 눈 밖에 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야.”
“그렇기야 하지.”
홍콩은 현재 중국의 일개 지역일 뿐이었다.
직접 지배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자치를 허용한다고 해서 중국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직접 제재는 못 하겠지만 W&R의 투자를 방해하려고 들면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파키스탄 카슈미르 민병대의 인도군 캠프 공격으로 지금 두 나라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상황이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야. 지금 투자를 하라는 말은 못 할 테니까 말이야.”
30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죽고 두 나라가 전쟁 일보 직전인 상황을 다행이라고 말하는 상황이 역겨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더구나 내가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일을 신경 쓰는 것도 모순이었다.
작년에만도 내가 계획한 작전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빌라도처럼 내 손에는 이미 씻기지 않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제 자유가 그리고 찬란한 미래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은 양심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현실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