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19화 (220/270)

(219)

#220화. 가치 없는 약속에 넘어가지 마라

홍콩에서 서울로 돌아간 나는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호텔 방에서 쉬었다.

며칠을 호텔 방에서 뉴스와 자료를 보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잠을 자면서 보냈다.

쉰다고 쉬는데도 시간이 지나도 무거운 몸이 좋아지지 않았다.

아마도 CIA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특히 지난 1년 반 동안은 아시아 각국을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했다.

더구나 CIA 요원을 만날 때마다 항상 내 정체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길을 걸을 때도 누군가가 나를 미행하지 않는지 항상 주위를 살펴야 했다.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올 때마다 내가 없는 동안 누가 왔다 간 것은 아닌지 자세히 관찰한 것은 일상이었다.

나머지 시간도 쉰 것은 아니었다.

투자금이 점점 커질수록 뉴스와 자료를 보는 시간도 늘어나기만 했다.

특히 911 이후에는 4시간 이상 자본 기억이 없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겨우 며칠 호텔에서 쉬었다고 피로가 풀리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무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호텔에서 5일 정도를 쉬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스터 에드릭 손 전화 맞습니까?

전화기로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에드릭 손 맞습니까?

상대가 다시 물었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요?”

-회사입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것 맞습니까?

회사가 류오린이나 W&R일 리는 없었다.

그럼 나를 찾을 회사는 CIA뿐이었다.

내가 CIA 직원으로 있는 기간은 이제 5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공식 절차대로라면 랭글리에 있는 본부로 가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나는 이 절차를 존 베비스와 엘리어스를 통해서 해결했다.

이미 내가 연수 기간 받은 돈은 반납했고 사실상 퇴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내가 에드릭 손이라는 이름으로 CIA와 통화를 한 것은 존 베비스가 퇴직한 이후 처음이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 이름으로는 꽤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에드릭 손 이름으로는 보고서 몇 개를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1년 넘게 먼저 연락이 없던 CIA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불안에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울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인지?”

-다음 주에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국방부 장관 회의가 있습니다. 그 회의 전까지 싱가포르에 오십시오.

“싱가포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뜬금없는 명령에 내가 되물었다.

하지만 상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을 했다.

-공항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자세한 지시 사항은 싱가포르에서 들으십시오.

일방적인 명령도 명령이지만 다음 주면 내가 퇴직한 다음이었다.

내가 이 지시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네요. 저 근무 기간은 이번 달 말까지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제 업무 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미스터 손에게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내 항의에도 자신의 말만을 계속했다.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다음 주면 다른 직장에 들어간 다음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시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나는 전화기를 들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잠시 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퇴직과 상관없이 싱가포르로 가라는 지시입니다.

“다른 곳에 출근해야 하는데도 말입니까?”

-예. 회사를 퇴사하더라도 2년 동안은 여전히 회사의 관리 대상입니다.

조금 전보다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CIA 직원은 당연히 퇴직 후에도 철저한 관리를 받는다.

설사 현장 요원이 아니더라도 하나하나가 민감한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퇴직 후라도 자칫 적국에 넘어갔을 때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시를 어겼을 때 불이익을 감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지시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목소리는 처음보다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협박이었다.

-그럼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이만 끊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전화가 끊긴 이후에도 나는 잠시 멍하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말 그대로 눈앞에 깜깜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CIA 관련해서 전화할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존 베비스 전 팀장과 엘리어스 사무관······.

나는 존 베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해결하려면 엘리어스 사무관이 더 낫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전화를 걸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엘리어스와 나는 인간적인 신뢰가 없었다.

철저한 거래 관계였다.

지금까지 엘리어스를 도와준 대가로 CIA 퇴직을 도움받은 것이었다.

CIA 퇴직을 도와준 이상 그와의 거래는 일단 끝난 셈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면 다시 거래하게 되겠지만 그때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지금 전화를 걸면 나는 엘리어스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잃게 된다.

자칫 대사관에서 일하는 내내 어쩌면 그 후에도 끌려다닐 수 있었다.

존 베비스도 거래 관계이기는 했지만, 엘리어스와는 상황이 달랐다.

존 베비스의 목표는 올해 연말 선거에서 하원 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존 베비스는 내가 전해 주는 자금과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편 후보의 치명적인 약점이 나에게 있었다.

CIA 퇴직 후에 그의 이름으로 기부하기로 한 기부금도 아직 건네주지 않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존 베비스는 자다가 깬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CIA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지시? 갑자기 무슨 지시?

존 베비스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였습니다.”

-퇴직했는데도 말인가?

“퇴직 사실을 말했습니다만 관리 대상이라면서 지시를 따르라고 하더군요.”

-아······ 그런데 좀 이상하기는 하군. 퇴직 후에도 지시가 내려가는 경우가 있고 협조 요청을 하는 때도 있지만 퇴직하자마자 바로 지시가 내려가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한번 알아보겠네.

나는 다시 호텔 방에서 존 베비스의 전화를 기다렸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존 베비스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월드컵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한국 신문이나 W&R에서 보내온 자료를 보기도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전화기가 울렸다.

존 베비스였다.

“알아보셨습니까?”

나는 존 베비스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알아는 봤는데 일이 좀 많이 꼬인 것 같아.

“꼬이다니요?”

내가 물었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FBI 범죄 전담 요원 수백 명이 확대된 대테러 부서로 옮겼네.

미국 본토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CIA는 수사권이나 단독 작전을 행사할 권한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 미국 본토는 오클라호마 연방 빌딩 폭탄 테러 같은 미국인에 의해 벌어지는 간헐적인 테러를 제외하고는 안전지대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911 테러가 바꿔 놓았다.

이제 미국 본토도 911 테러 같은 대규모 테러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테러를 대비하기 위해 FBI 대테러 부서가 확대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요? FBI 대테러 부서가 확대된 것이 제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FBI 조직 개편과 지금 벌어지는 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FBI 대테러 부서에 CIA 직원들이 파견되어 대테러 작전에 대한 훈련과 테러에 대비를 함께 할 예정이네.

“그게 되겠습니까? 둘 다 자존심이 만만치 않은 부서인데요?”

-예전이야 그랬겠지만, 지금은 국토안전국이 있잖은가. 지금 국토안전국을 국토안전부로 확대하는 법이 준비되고 있네. 만약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전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거대부서가 생기는 셈이지.

국토안전국은 911 테러 직후 대통령 직속으로 생긴 부서였다.

목적은 미국 본토 수호······.

만약 정식 부가 되면 국무부나 국방부에 버금가는 초거대부서가 생기는 셈이었다.

“그래서요? 정확히 그게 제 일과 무슨 관계입니까?”

존 베비스의 이야기를 들어도 여전히 나에게 그런 지시가 내려온 내막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관계이기는······. 그렇지 않아도 인력난에 시달리는 CIA에서 인원이 FBI로 파견 나가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메워야 하지 않겠나. 동아시아 국방부 장관 회의니 아마 동아시아에 근무하는 요원 중에서 당장 맡은 업무가 없는 직원에게 지시가 내려간 것 같네.

“그게 저라는 말입니까?”

가장 한가한 직원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파견 연수는 존 베비스가 억지로 만들었던 것이니 말이다.

-국방부 차관이 CIA에 동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보고할 요원을 요청한 것 같더군. 알아보니 회의는 그렇게 길지 않을 것 같다니 며칠이면 끝날걸세.

“며칠이면 끝난다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네요.”

-운이 좋다고 생각하게 그나마 일찍 자네 퇴직이 결정됐으니 퇴직할 수 있었지. 아마 FBI 대테러 부서 확대와 CIA 요원 파견이 한 주만 일찍 결정됐어도 자네 퇴직이 어려울 수도 있었어.

존 베비스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퇴직하면 뭐합니까? 퇴직하자마자 지시가 내려왔는데요. 이런 식이면 이런 일이 끝난 후에 다음에 무슨 협조 요청이 내려올지 모르는데요.”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퇴직한 이후에 회의가 열리는 것이 더 일을 꼬이게 만들 수도 있었다.

차라리 월말 내가 여전히 CIA 요원일 때 지시로 싱가포르에 가게 된다면 퇴직 후에는 신분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퇴직 후에 일을 할 수 있는 ‘이력’이 생기게 된다.

CIA도 근본적으로는 관료조직이었다.

전에 없던 일보다는 한번 한 일을 다시 반복하는 게 쉬웠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팀장님은 아직 CIA에 아는 분 많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번 요청을 취소시킬 수 없겠습니까?”

나는 존 베비스에게 명령 취소를 부탁했다.

이번 부탁으로 빚을 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존 베비스에게 진 빚은 어차피 하원 의원 선거를 도와주는 것으로 갚을 수 있는 빚이었다.

-나도 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아.

“팀장님도 어렵다고요?”

존 베비스는 CIA뿐만 아니라 민주당 상하원 정보위원회 의원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더구나 존 베비스는 하원 의원에 출마한다는 사실을 공식화한 상태였다.

당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직 CIA 팀장인 그가 의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정보기관이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존 베비스가 전직 요원 정확하게는 전직 요원이 될 요원에 관련된 명령 하나를 취소하는 것이 어렵다니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911 직전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알카에다 간부들과 911 테러 가담자들이 모였었다는 사실을 민주당에서 문제가 삼았었네. 이 사실을 CIA가 알고도 다른 정보기관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가 된 거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존 베비스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민주당 의원들을 통하면 일이 쉬워야 맞았다.

“그 일과 제 일이 무슨 관련이······? 설마 같은 아시아 지부 쪽에서 생긴 일이라서 그런 겁니까?”

-그런 것도 있고······.

존 베비스가 말을 흐렸다.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이 있는 듯했다.

“뭡니까, 정확한 이유가?”

-그 정보를 민주당 의원들에게 알려진 정보 출처가 문제야. 그렇게만 알게.

‘××!’

욕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 사실을 민주당에 흘린 것이 존 베비스인 것 같았다.

민주당 내 기반이 약한 존 베비스가 공천을 받기 위해서 넘긴 정보겠지만 시기가 최악이었다.

-더구나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요청을 한 곳은 국방부야. 자네 럼즈펠드 장관이 CIA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은 CIA가 국방부의 적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존 베비스의 말이 이어졌다.

-싱가포르에는 국방부 차관이 참석하지만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도 같은 시기에 파키스탄을 참석할 계획이야. 지금 와서 사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한마디로 팀장님은 명령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말이네요?”

-이번 일은 미안하네. 어지간하면 이번은 그냥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자네 퇴직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명령을 거부하면 소환 요청이 올 수도 있고, 잘못하다가는 조사가 들어갈 수도 있네.

“알겠습니다.”

-이번에 자네도 느꼈겠지만 내가 힘이 있어야 자네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네. 내가 다음에는 자네를 꼭 도와주겠네.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존 베비스는 벌써 정치인이 다 된 듯 헛된 공약을 늘어놓았다.

이대로 존 베비스가 믿고 그가 하원 의원을 도와야 하나 하는 회의가 생겼다.

아무래도 하원 의원이 되는 것을 돕기 전에 저런 가치 없는 약속보다는 확실한 뭔가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당장 일을 해결해야 했다.

“어쩔 수 없나.”

당장 빚을 지더라도 일을 해결해야 했다.

나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