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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20화 (221/270)

(220)

#221화. 중요한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전화를 건 상대는 엘리어스였다.

빚을 지는 것은 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CIA를 겨우 퇴직하게 된 이후에도 CIA에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나는 약속을 잡고 엘리어스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갔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최근 며칠 동안 호텔 방에서 나가지도 않고 푹 쉬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엘리어스가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푹 쉬셨다는 분 얼굴치고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먼저 연락도 주시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일이 생기네요.”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으신 것인지?”

엘리어스가 물었다.

“CIA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지시라면?”

“다음 주에 열리는 동아시아 국방부 장관 회의에 참석하라더군요.”

내 이야기에 엘리어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주면 퇴직한 다음 아닙니까?”

엘리어스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퇴직한 다음에도 그런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겁니까?”

“CIA 요원은 퇴직한 이후에도 최소 2년 동안은 관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사이에 협조 요청이 오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따라야 하죠.”

“그럼 이번은 협조 요청이라고 봐야겠군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요?”

“예.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CIA는 대규모 조직 개편과 함께 인력 조정을 했습니다.”

백악관과 의회가 모두 냉전이 끝나고 러시아가 경제 위기에 빠지면서 미국을 위협할 세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취한 조치였다.

“당시만 해도 911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지금은 알다시피 사람이 모자라죠. 최근 CIA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교육을 받고 경험이 쌓이려면 시간이 걸리고요.”

“하긴 아버지께 에드릭 씨를 퇴직시키는 것을 CIA에서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나마 민주당 쪽에서 반대하지 않아서 겨우 퇴직시킬 수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실제로는 존 베비스가 민주당 의원을 움직인 것이지만 엘리어스는 그런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일에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리어스 씨와 엘리어스 씨의 아버님이 아니었다면 퇴직은 어려웠을 겁니다.”

엘리어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뭘요. 에드릭 씨가 지금까지 저를 도와주신 것에 비하면 별일 아닌데요.”

“퇴직을 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아무래도 바쁠 때 혼자 빠져나간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군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요.”

“이상한 점이라면 어떤 점이?”

“우선 저는 홍콩에 온 이후 1년 반 동안 본부에서 잊힌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퇴직을 앞두고 갑자기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더구나 퇴직이 결정된 직원에게 이런 지시가 갑자기 내려오는 것도 그렇지만······ 퇴직 사실을 밝히면 명령이 철회되는 게 상식적인데 협조 요청이라고 말하면서 담당자의 말투

가 협박 비슷하게 들리더군요.”

CIA라고 해도 직원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었다.

먹고살아야 했다.

CIA 요원은 상대적으로 능력이나 자격 조건에 비해서 적은 연봉이었다.

정년퇴직을 한 경우라면 연금이라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도 아니었다.

퇴직한 직원을 새로운 직장을 잡고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었다.

나에게 전화를 건 직원도 언제든지 퇴직한 직원이 될 수 있었다.

내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퇴직한 직원에게 협조 요청을 하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죠. 퇴직 직후에 바로 협조 요청을 하는 게 말이 안 되죠.”

“필요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요. 이건 제 퇴직이 잘못됐다고 대놓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엘리어스의 아버지는 나를 퇴직시키기 위해서 아마도 백악관에 있는 직원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게 퇴직시킨 직원에게 그만두자마자 협조 요청을 한다?

CIA가 백악관의 직원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존 베비스의 말에 따르면 지금 CIA의 분위기는 그렇게 정부와 척을 질 상황이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내 퇴직을 부탁한 사람이 백악관 직원 중 누구라도 최종적으로 내 퇴직을 결정한 것은 CIA에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이번 협조 요청은 그 CIA 간부 누군가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셈이었다.

일반적인 조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CIA도 그런 점에서는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였다.

현장 요원들끼리는 모르지만 본부는 상하 관계가 분명했다.

아니 정보를 다루는 조직인 만큼 내부 규제가 다른 정부 조직보다 더 엄격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혹시 아버님께 들은 것 없습니까?”

엘리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들은 것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엘리어스가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설마 에드릭 씨를 노리고 지시나 협조 요청이 내려온 거겠습니까? 그냥 국방부에 사람을 요청하고 마침 아시아 지역에 있는 요원을 찾다 보니 에드릭 씨가 선택된 거겠죠. 그리고 사람이 없다 보니 사람을 바꾸지 못하는 것뿐이겠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협조 요청을 철회시키는 겁니다. 퇴직과 관계없이 계속 밀어붙이는 것으로 봐서는 어쩌면 이번은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한 번이라면 가면 끝이지만 퇴직을 앞두고도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번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계속 비슷한 요청이 올지도 모르겠군요.”

차라리 여전히 CIA 직원이라면 일을 잘 처리하면 승진할 기회가 있겠지만 퇴직한 이후에는 일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죠. 그렇다고 맡은 일을 대충 처리하거나 실패하는 것은 그것대로 위험이 있고 제 성격과도 맞지 않아서요.”

“이번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계속 무리한 요청이 오면 거부하시죠. 요청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물론 있기야 하겠죠. 그런데 아주 예외적인 경우고 자칫 조사를 받을 수도 있고······. 아주 최악의 경우에는 전직 요원으로서 받을 수 있는 보호 조치를 더는 받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보호 조치라니요?”

엘리어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말 그대로 보호죠. 저에 대한 정보를 미국 정부에서 은폐해 주는 겁니다. 만약 이런 조치가 없다면 CIA를 퇴직한 직원 중에서 위험에 빠지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저야 요원으로 있을 때 맺은 원한은 없지만, 납치 위험은 늘어나겠죠. 물론 국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렇게까지 CIA와 퇴직한 요원이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

는 예는 없습니다만······.”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아버님께 전화해서 이번 명령을 취소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대놓고 저를 찍어서 차출한 것으로 봐서는 워싱턴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요.”

내가 말했다.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들어 보니 우리도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엘리어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도와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엘리어스와 헤어진 후 나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빠르게 재생시켰다.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협조 요청이 내려온 거겠습니까? 그냥 국방부에 사람을 요청하고 마침 아시아 지역에 있는 요원을 찾다 보니······.

다시 확인해도 내가 들은 것이 정확했다.

녹음을 다시 확인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정황이 분명해졌다.

1년 반 만에 갑자기 내려온 엘리어스의 아버지나 그가 부탁한 사람과 CIA 직원까지 무시한 것으로 보이던 지시······.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엘리어스가 있었다.

나는 엘리어스에게 국방부가 CIA에 요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엘리어스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낮은 확률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엘리어스가 내 연락을 받고 무슨 일인지 알아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다른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엘리어스가 무슨 목적으로 나를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저런 식으로 진짜로 CIA에 끌려다닌다고 해서 엘리어스가 얻을 것이 없었다.

* * *

엘리어스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다음 오전이었다.

-접니다! 엘리어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

-그게 일이 조금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엘리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까?”

-예. 아버님께서 알아보셨는데······ CIA에서 에드릭 씨를 지목한 것은 짐작하신 것처럼 에드릭 씨의 짐작대로였습니다. 에드릭 씨가 한창 바쁠 때 퇴직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직원이 에드릭 씨를 꼭 집어서 명단에 끼워 넣었다고 하더군요.

“직원이요?”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아직은 직원 한 명이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합니다.

엘리어스는 아무래도 나를 질투한 직원 한 명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일을 몰아갈 작정인 듯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제기했던 모든 의심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나는 일단 넘어가는 척하기로 했다.

아니 넘어갈 생각도 있었다.

이번 일이 이대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다행이네요. 저는 제가 CIA 내에 백악관에 반대하는 파벌에 제가 찍힌 것 아닌가 하는 걱정했습니다.”

-직원 한 명의 개인적 일탈이라니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럼 협조 요청은 처리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일이 이쯤에서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게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이미 국방부에 에드릭 님 이름이 넘어간 것 같습니다. 들어 보니 홍콩에서 2년 동안 중국 전문가라고 소개한 것 같습니다.

“중국 전문가요?”

-예. 이번 동아시아 국방부 장관 회의 목적이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이다 보니 국방부에서 에드릭 씨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그래서 이번은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엘리어스가 잠시 말을 흐렸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문제네요. 그런 식이라면 대사관에 들어간다고 해도 비슷한 협조 요청이 계속될 수도 있다는 의미 아닙니까?”

-제가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방법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주한 미국 대사관 내에 중국 차기 지도부에 대한 프로젝트 팀이 이번에 만들어집니다. 11월 차기 지도부 출범 때까지만 존재하는 팀이죠. 마침 저도 그때까지 근무하고 에드릭 님도 그때까지는 임시직으로 근무하니 아예 정식으로 이 팀에 소속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처럼 자문이 아니라요.

엘리어스가 말했다.

이번 일이 꾸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문이 아니라 정식으로 팀원이 되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당장 답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이번에 싱가포르에 가니 회의가 끝날 때까지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싱가포르에서 뵙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엘리어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을 확인한 기분은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빴다.

당연히 나는 엘리어스의 의도대로 끌려갈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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