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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21화 (22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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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같은 사람에게 두 번 속으면 그건 내 잘못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날아온 나는 이반 부카드를 만나고 있었다.

이반 부카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잘 믿기지 않는군. 자네가 며칠 전까지 CIA 작전 요원이었다고?”

“바로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당시는 제가 에이전트 에스 팀에 파견된 상태라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완전히 에이전트 에스 팀 소속으로 일하는 건가?”

이반 부카드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CIA 소속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텃새 비슷한 것이 있어서요.”

“왜 나이도 어린 요원이 매번 CIA 요원들을 상대하나 했더니 자네가 CIA에서 파견 나온 요원이라서 그랬나 보군.”

“뭐 그렇죠. 저만 대놓고 밖으로 따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조금 지치기도 했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나도 다른 정보기관이나 외부 팀과 일해 봐서 어떤 기분인지 잘 알지. 아마 자네를 CIA에서 보낸 감시 요원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에이전트 에스 팀 정도면 CIA 본부 소속이 아니더라도 나쁠 것이 없지. 성과도 충분하고 정보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자네 말대로라면 매번 작전할 때마다 신분을 바꾸거나 숨길 필요도 없으니 안정성도 있고 말이야. 이 직업의 가장 안 좋은 점이 주변에 신분을 감춰야 하다 보니 제대로 직업도 제대로 된 인간관계도 맺을 수 없다는

거야.”

“그건 외부 팀도 마찬가지죠.”

“그래도 자네는 얼마 전까지 투자회사의 직원이었다면서? 지금은 대사관의 직원이고 말이야. 대사관에서 일하는 거면 이제 화이트 요원이라고 봐도 되겠군. 나처럼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잖나.”

정보기관의 직원은 크게 블랙 요원과 화이트 요원으로 나뉜다.

블랙 요원은 말 그대로 정보요원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요원이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이반 부카드나 필리핀의 엘만 지부장과 조엘이 바로 이런 블랙 요원이었다.

반면 화이트 요원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정보요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요원이었다.

화이트 요원은 대사관에서 무관이나 사무관으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단테 패트릭이었다.

“제가 대사관에서 일하는 것은 임시직으로 반년 정도뿐입니다.”

“자네가 이쪽 세계가 얼마나 치밀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자네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대사관에서 반년간 일했다는 경력은 계속 따라다닐 거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임시지만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함으로써 나는 화이트 요원이 된 셈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효과였다.

지금 상황에서 유불리를 따지면 이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카르타까지 날아온 이유가 정확히 뭔가? 국방부의 협조 요청이야 에이전트 에스 팀 이름으로 랭글리에 통보하면 끝날 일인데?”

“물론 랭글리에 보고하고 다시 협조 요청을 취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긴 당장 싱가포르 국방부 장관 회의가 모레라고 했지. 시간이 부족하기는 부족하군. 본부에 있는 놈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말이야.”

“예. 그리고 랭글리에서 제시간에 통보가 간다고 해도 국방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확실하지 않고요. 자칫 저 때문에 에이전트 에스 팀 전체가 국방부와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나는 말을 하면서 이반 부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보고 국방부 쪽에 이야기해 달라는 건가?”

“예. 제가 듣기로는 국방부 쪽과 꽤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걸프전 때도 군과 함께 작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내가 군 쪽과 사이가 나쁘지 않기는 하지.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나? 자네는 이제 CIA 소속도 아닌데 말이야.”

말을 마친 이반 부카드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넌 내가 이걸 해 주면 대신 뭘 해 줄 거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인도 파키스탄 전쟁을 멈출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그런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지금 미국 정부 특히 CIA 아시아 지부와 미국 국방부의 최우선 과제는 당장이라도 시작될 것 같은 인도 파키스탄 사이의 전쟁을 막는 일이었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보급로이자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지도부를 수색하는 최일선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핵보유국이었다.

자칫하면 처음으로 핵미사일이 오가는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무조건 막아야 하는 전쟁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싱가포르에서 동아시아 국방부 장관 회의가 열리는 동안 럼즈펠드 장관께서 인도 파키스탄을 방문해서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하려는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지. 인도 파키스탄 전쟁을 멈출 방법이 있다면 그까짓 싱가포르 국방부 장관 회의가 문제겠나?”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멈출 방법은 아닙니다. 다만 전쟁을 소강 국면으로 만들 계기를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카슈미르에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두 나라가 사이가 좋아지는 일은 없을 거네. 지금은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것으로 충분하지. 어서 말해 보게!”

이반 부카드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반 부카드의 표정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를 통해 갑작스럽게 내려온 CIA의 협조 요청을 피할 길이 생긴 것이다.

* * *

엘리어스가 갑작스러운 CIA의 지시와 협조 요청 배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함정에 빠트리고 도와주면서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인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흔히 사용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엘리어스가 이렇게 빨리 이런 수를 쓸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가 거래를 제안해 오리라 생각했었다.

나도 엘리어스도 말로는 내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 11월까지 근무하는 임시직이고 이름뿐인 자리라고는 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엘리어스는 내 도움으로 꽤 여러 가지 일을 처리했다.

일만 생기면 나를 부르는 CIA 지부의 요원들처럼 엘리어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엘리어스가 거래를 제안해 오면 나도 그 거래에 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작부터 나를 함정에 빠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엘리어스가 나를 함정에 빠트렸다는 생각은 내 오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엘리어스가 이번 일을 이미 알고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엘리어스가 함정을 빠트렸든 아니면 내가 어려움에 빠질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든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미 CIA에서는 이제는 협조 요청으로 바뀐 지시가 내려왔다.

협조 요청으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흔히 말하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대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것처럼 CIA의 협조 요청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가장 단순하고 손쉬운 선택은 CIA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싱가포르로 가서 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새로운 직장인 주한 미국 대사관 출근이 늦어지는 것이 문제였지만 새로운 직장 상사라고 할 수 있는 엘리어스도 내가 싱가포르에 간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부와 CIA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이 CIA를 공공연히 국방부의 적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아시아에 있는 나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이였다.

‘전직’ CIA 요원인 내가 유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국방부 직원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번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느냐였다.

CIA 본부에서 누군가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든 엘리어스가 일부러 나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든 무능한 모습을 한번 보인다고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전자라면 국방부 앞에서 CIA를 망신시킨 나를 더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후자라면 내 능력을 알고 있는 엘리어스가 또다시 비슷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는 그냥 눈 딱 감고 엘리어스를 도와서 대중국 팀인가 하는 태스크포스 팀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엘리어스의 말대로라면 11월 후진타오가 총서기에 임명되면 태스크포스 팀은 해체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와 엘리어스의 주한 미국 대사관 근무도 끝난다.

나는 말 그대로 민간인이 되고 엘리어스는 중국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딱 눈감고 반년만 엘리어스를 도와서 참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엘리어스를 돕지 않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식으로 엘리어스의 계획대로 놀아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더구나 엘리어스가 반년 후에 나를 미련 없이 놔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한국에서 중국 차기 지도부에 대해 대비를 할 때보다 실제 중국에 부임한 이후에 엘리어스는 내 도움이 더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엘리어스는 진실이 무엇이든 한 번 내 뒤통수를 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같은 짓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한 번 속으면 상대의 잘못이지만 두 번 속으면 내 잘못이라는 말처럼 내 운명을 다른 사람의 아량에 맡기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첫 번째나 두 번째가 모두 아니라면 결국 남은 것은 세 번째 방법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원래 계획했던 일을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에이전트 에스 팀을 정식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에이전트 에스 팀을 이대로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에이전트 에스 팀이 존재하는 다는 사실을 CIA 본부에서도 알고 있었고 아시아 지부, 특히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지부와는 여러 가지 일을 함께했다.

내가 이대로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랭글리나 나와 함께 일을 했던 요원들이 내 행적을 추적할 것이다.

지금이야 나름 여러 개의 여권을 이용해서 행적을 숨겼지만, 작년만 가을까지만 해도 빈틈이 많았다.

전문가들이 내 행적을 추적하면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의 작전 요원 수이진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전트 에스 팀을 굳이 없앨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이 무슨 이유로 CIA에서 외부 팀으로 분류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이전트 에스 팀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팀이었고 예산이나 관리하는 조직도 없었다.

한마디로 CIA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였다.

내가 CIA 소속이었을 때야 정체가 발각될까 두려워했지만, CIA를 그만둔 뒤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컸다.

CIA의 정보와 협조를 받을 수 있으면서도 통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예전에야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지로 임무를 떠맡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작전을 골라서 할 수도 있고 독자적인 작전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자금도 충분했다.

AAM 회사 이름으로 관리하던 계좌에 있는 자금이면 CIA는 몰라도 어지간한 국가의 정보기관을 몇 년간 운영할 수 있었다.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 소속이 되면 미국 국방부는 물론이고 엘리어스도 더는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은 지난 1년간 이 정도 압박은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일을 해 냈다.

문제라면 아무런 준비 없이 에이전트 에스 팀을 시작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작년에 일본의 단테 패트릭에게서 전직 CIA가 파악하고 있는 퇴직한 요원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그중 내가 이용해 영입한 인물은 지금 한국에서 나를 위해 부동산 부분을 관리하는 정윤호뿐이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이 스카우트할 명단을 추려 놓은 상태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을 그만두면 그들을 중심으로 에이전트 에스 팀을 정식으로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틀어진 이상 당장 나를 도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이런 일로 나를 도울 만한 사람은 일본의 단테 패트릭과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의 단테 패트릭은 본부로 돌아간 다음이면 모르지만, 지금으로써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인도네시아로 이반 부카드를 찾아온 이유였다.

이번 일만 해결되면 엘리어스에게는 이번 일에 상응하는 경고해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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