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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보이는 것과 진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는 열리는 호텔 로비에서 엘리어스를 마주쳤다.
이번 국방장관 회의의 주요 의제는 중국 관련한 문제였다.
엘리어스는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중국 차기 지도부에 대한 대응 방안을 준비하는 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이번 회의를 참관하기 위해서 싱가포르에 방문한 것이었다.
내가 갑작스러운 CIA의 지시 배후에 엘리어스가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CIA에서 1년 6개월 만에 하필 엘리어스가 참석할 회의 관련된 지시가 내려온 것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어스에게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며 잡은 엘리어스의 손은 차가웠다.
손만이 아니었다.
엘리어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러게요. 제가 그래도 에드릭 씨의 상사인데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에드릭 씨는 이제는 주한 미국 대사관 소속 직원인데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 싱가포르에 와 있네요.”
엘리어스가 따지듯 말했다.
“대사관에 협조 요청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닙니까?”
“협조 요청이 오기는 왔죠. 하지만 대사관에는 하루도 출근하지 않고 전화 한 통 하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좀 실망이네요.”
“그렇게요. 저도 같이 일하게 된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당장 부족한 제 능력이 필요하다는데요. 임시직이라도 공무원인데 국가에서 원하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어스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그렇게 시간을 다투는 일이 뭔지 궁금하네요.”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내 말에 끝나자마자 엘리어스가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에드릭 씨의 상사인데 부하 직원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까?”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기밀이라서······.”
“지금 나랑 장난합니까? 제가 에드릭 씨가 예전에 있던 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중요한 일을 한다고 기밀이라는 겁니까!”
엘리어스는 화가 난 표정이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저를 바보라고 생각합니까? 2년 동안 사실상 잊혔던 사람이 퇴직한 다음에 갑자기 중요한 일을 한다는 말을 하는데요?”
엘리어스는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아는 나는 본부에서 밀려나서 홍콩에서 연수하는 어중간한 CIA 정보 분석 요원이었다.
아시아 지역에 관해서 쓸 만한 보고서를 쓰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투자에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해 CIA를 퇴직하기 위해 자신과 아버지에게 부탁한 그런 사람에 불과했다.
그는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자신에게 비밀이라서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어쩌면 그는 내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비밀 운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뭐······.
그런다고 내가 비밀이라고 하는 게 그를 놀리기 위한 목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믿지 못하면 확인시켜 주면 그만이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확인시켜 드리는 수밖에요.”
“뭐로 확인시켜 준다는 말입니까?”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짓고는 휴대 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미 만나고 계시다고요? 곧 올라가겠습니다. 여기 제 상사분이 있는데 확인을 하고 싶어 하시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휴대 전화를 엘리어스에게 건넸다.
“받아 보시죠.”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군.”
엘리어스는 내 휴대 전화를 받아 들며 말했다.
“당신 누굽니까? 뭐라고요?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누굴 바꿔 주겠다고요? 국방차관이시라고요? 주한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서기관 엘리어스입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받는 엘리어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전화를 끊은 이후에도 엘리어스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휴대 전화를 받아 들며 말했다.
“저는 이만 올라가 봐야 해서요. 회의 참석 잘하십시오.”
나는 엘리어스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반 부카드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 방으로 향했다.
이반 부카드가 기다리는 호텔 방에 들어가기 전 나는 경호원들에게 몸수색을 받았다.
이미 호텔과 주변에 군 병력이 지키고는 있지만 이런 정도의 보안 조치는 호텔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방 안에 들어갔을 때 이반 부카드는 여러 사람과 소파에 앉아서 회의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은 가장 중앙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였다.
내가 가까이 가자 이반 부카드가 나를 중년 사내에게 소개했다.
“차관님, 이쪽은 이번 계획을 제안한 요원입니다.”
중년 사내는 바로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온 국방부의 차관이었다.
아마도 엘리어스가 통화한 사람도 저 국방차관일 것이다.
통화한 상대가 이 정도 거물이 아니라면 엘리어스가 그 정도로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국방차관은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서 오게. 거기 앉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으니까.”
이반 부카드가 옆으로 움직여서 소파에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국방차관이 입을 열었다.
“작전을 들어 보니 아시아 지역 정치 상황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냥 조금 아는 정도입니다.”
“자네는 이번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를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질문이었다.
나는 당연히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세부 계획을 질문할 거로 생각했었다.
이번 질문은 일종의 나에 대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너무 시기가 너무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내 대답에 이반 부카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시기가 이르다고?”
국방차관이 물었다.
“예. 이번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는 영국의 대표적인 씽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회의지만 실제로는 이 회의에 동아시아 국방장관들을 끌어모은 것은 바로 본국의 국방부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는 국제 문제에 대한 연구 기관 중에서 한 손에 꼽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회의에 힘을 실어 준 것은 바로 미국 국방부였다.
“맞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이번 국방장관 회의의 목적은 바로 중국의 견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까?”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해서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맞네. 여러 주제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동아시아를 이용해서 중국의 해외 진출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알 카에다나 탈레반 지도부를 잡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알 카에다는 말할 것도 없고 탈레반은 결성되고 몇 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세력입니다.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죠. 여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고요. 심
지어 제가 듣기로는 백악관과 국방부는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본국은 중국을 견제할 여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국방장관을 모아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 아닌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방 강화를 도울 방법을 찾고 유사시 군사행동을 위한 대비를 하는 것이 이번 회의의 목적이네.”
말이 동아시아 국가의 국방 강화를 돕는다지만 실제로는 동아시아 국가에 미국의 무기를 팔아먹겠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지난 2년간 동아시아 국가에 판 미국의 무기만 몇십억 달러였다.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이상 동아시아 국가들의 힘만으로 중국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을 자극해서 중국이 적극적으로 해외 교두보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동원해서 중국을 포위하겠다는 목적이겠지만 중국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차기 중국을 이끌 중국 공청단 지도부가 리안에게 파키스탄 투자를 강요한 것이었다.
공청단 지도부가 리안에게만 그런 일을 강요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친중국 화교 기업들은 물론이고 중국 본토의 기업들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미국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이런 움직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 최우선순위였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작년 4월 하이난섬 사태 때 중국이 본국의 승무원을 일주일 넘게 감금한 일은 중국이 믿을 수 없는 국가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 줬네. 이런 식으로라도 견제해야 한다는 말이지.”
나는 국방차관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동아시아 국방장관을 모아서 중국 견제를 의논하는 것은 중국만 더 자극할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야기한 것처럼 동아시아 국방력 강화는 단순히 중국 견제만이 아니라 국방부와 방산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엮인 문제였다.
내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미국 정부나 국방부의 정책이 바뀔 가능성은 없었다.
“자네 생각은 잘 들었네.”
차관은 고개를 돌려 이반 부카드를 보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괜찮군. 문제를 보는 눈도 정확하고 말이야.”
“마음에 드실 거로 생각했습니다.”
이반 부카드가 대답했다.
분위기를 보니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에 대한 내 대답이 차관의 시험을 통과한 듯했다.
“듣자니 다음 계획은 여기 싱가포르에 와서 하기로 했다면서?”
“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야 하는 일이라서요.”
차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인도 총리를 통해서 인도군 캠프를 습격한 배후에 알 카에다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네. 다음 단계는 뭔가?”
“다음은 본국 정보기관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말해보게. 다음 주면 대통령 직속의 국토안보국이 국토안보부로 확대 개편될 예정이야.”
국토안보국은 911 테러 직후 설치된 기관으로 정보기관들을 사실상 지휘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그 부서가 이제 정부의 정식 부서가 된다는 의미였다.
계획대로라면 공식적으로만 100개가 넘는 미국의 정보기관을 아우르는 초대형 정부 부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CIA나 FBI NSA도 국토안보부의 지휘를 받게 된다.
“잘됐네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국방차관과 이반 부카드 앞에서 내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단계는 미국 내의 알 카에다와 관련이 있는 테러 용의자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 후 파악해 놓은 중동 알 카에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마지막으로 파키스탄 내 관련자들을 잡아들인다..
마지막으로 미국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가 그들을 통해서 인도군 캠프 습격 배후에 알 카에다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알 카에다에 군 캠프 공격 책임을 떠넘기는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그렇게 복잡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나?”
국방차관이 물었다.
“인도 파키스탄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 지도부로서는 국민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도 집권당인 인도 인민당은 힌두교를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다. 여기에 캠프 공격 희생자가 여성과 아이라서 인도 국민감정은 어느 때보다 나쁜 상태였다.
파키스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전 인도 의회 테러로 두 나라 사이가 나빠졌을 때 파키스탄 정부는 사실상 인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대통령 임기 연장 국민 투표 과정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두 나라 모두 국민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연이어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자연스럽게 두 나라 국민을 설득하자는 말이군.”
“예, 그렇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국방차관이 이반 부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생각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저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반 부카드가 대답했다.
“그럼 추진하지. 내가 바로 장관께 보고하겠네.”
차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반 부카드와 나는 차관이 전화를 거는 사이에 방을 나왔다.
이반 부카드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했네.”
겨우 한고비는 넘었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