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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24화 (22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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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5. 빈 포대는 바로 설 수가 없다

225. 빈 포대는 바로 설 수가 없다

1.

내가 제안한 계획은 다행히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채택되었다.

그만큼 인도 파키스탄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지도부도 계획에 찬성했다고 한다.

두 나라 지도자 모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커질 때 희생자는 적어도 1,200만이었다.

계획이 받아들여진 이후 나는 일단 국방차관과 이반 부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국방차관은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하느라 바빴고 이반 부카드도 작전의 세부 계획을 조율하느라 바빴다.

내 계획을 채택되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얻는 것은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CIA 소속 외부 팀의 팀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번 일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장샤오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인도 관련 선물과 주식을 매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음 날 나는 대사관에 출근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한국과는 다른 모습을 봤다.

한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니 한국 축구 대표 팀이 폴란드를 상대로 월드컵 사상 첫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서울 시내에는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름의 변명은 있었다.

나에게 한국은 아버지를 쫓아낸 나라이자 별것도 아닌 놈들이 나를 무시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나라일 뿐이었다.

더욱이 나는 조금 전까지 양쪽을 합하면 인구 10억이 넘는 두 국가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축제를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거리를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이들을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 상당한 액수의 투자하고 한국에 머문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복수와 돈을 벌기 위해 알게 된 사실들뿐이었다.

한국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 적도 한국을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2.

출근한 나는 먼저 상사인 엘리어스를 찾아갔다.

“출근을 이제야 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윗분들과 중요한 일을 하시는 대단하신 분인데 제가 이해해야죠.”

엘리어스가 내가 그를 만난 이후 가장 적대적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나도 굳이 먼저 화해할 생각은 없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엘리어스의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을 나온 나를 맞은 것은 30대 초중반의 여성이었다.

“이해하세요. 출장을 다녀오신 이후로 계속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그럼요. 저는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저는 샤론 화이트라고 해요. 태스크포스팀 오신 것을 환영해요. 제가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태스크포스팀이 쓰고 있는 사무실 한쪽에 덩그러니 떨어진 책상이었다.

창가에서 떨어진 위치를 보았을 때 온종일 햇볕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자리였다.

그나마 컴퓨터와 다른 사무집기는 이미 세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리가 좀 별로죠?”

“아닙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죠.”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렇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어차피 임시직이었고 내 계획대로라면 이 사무실에 내가 있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 업무 핸드폰이에요. 보안이 되어 있는 핸드폰이니 업무에 관련된 통화는 이 전화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샤론 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이비리그의 풋볼 스타가 팀원으로 온다고 해서 놀랐어요.”

샤론 화이트는 내가 대학 때까지 풋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예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이 있네요.”

“당연히 기억하죠. 부상으로 은퇴만 안 했어도 제 고향 팀에서 지명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랬군요······.”

나를 지명하려고 했다고 해도 어느 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하버드 크림슨을 우승으로 이끌었다고 해도 나를 상위 라운드에 지명할 팀은 없었다.

아이비리그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아도 4라운드나 5라운드였고 그건 드래프트에 참여하는 팀 중 거의 모든 팀에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다.

프로에서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풋볼을 포기하고 CIA에 들어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시스템 임시 아이디와 임시 비밀번호는 여기 포스트잇에 적혀 있어요. 바꾸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샤론 화이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컴퓨터 전원을 켰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내 눈에 책상 한쪽에 쌓인 서류가 들어왔다.

살펴보니 중국 관련 서류들이었다.

오전 내내 나는 서류들을 확인했다.

서류에 나온 중국 지도부 관련 내용 중에는 내가 모르던 흥미진진한 내용도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상하이 개발 상황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상하이방과 개발 업자들 사이의 유착관계는 특히 흥미로웠다.

탁!

내가 막 서류들을 다 읽었을 때쯤 책상에 누군가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엘리어스였다.

“여기 있는 서류를 읽고 내일 아침까지 보고하세요.”

꽤 두꺼운 서류 더미였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

주변을 둘러보니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우선 ‘이게 상사의 횡포인가?’ 하는 생각이 맨 처음 들었다. 그다음으로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엘리어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팀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왜 저러시지?”

“그러게 그것도 직접 영입한 팀원이잖아?”

“다 떠나서 임시 직원에게 왜 저런 일을 맡겨?”

팀원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엘리어스가 나에게만 이렇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네.’

엘리어스 나름대로는 내가 한 짓에 대한 벌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순간 대사관을 그만둬야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정식으로 에이전트 에스 팀을 만들기로 한 이상 이제 대사관에 근무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류오린과 W&R 사람들은 내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며칠 출근하고 그만두면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니, 그건 나중 문제였다.

이대로 그만두면 이건 내가 엘리어스의 치기 어린 행동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읽어 보니 그렇게 중요한 내용도 내일 아침까지 보고할 정도로 시급한 내용도 아니었다.

서류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방 전력에 대한 자료들이었다.

아마도 엘리어스가 동아시아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한 내용인 것 같았다.

나는 엘리어스가 주고 간 서류들을 빠르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3.

“미즈 화이트!”

퇴근 준비를 하던 샤론 화이트는 내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한 손으로 들며 입을 열었다.

“보고서를 완성했는데 사무실에 가니 팀장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요.”

내 이야기에 샤론 화이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보고서를 다 완성했다고요?”

“제가 속독법을 익힌 덕분에 서류를 좀 빨리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순간적으로 샤론 화이트의 눈이 내 책상에 쌓인 서류 더미로 향했다.

서류 더미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짓던 샤론 화이트가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일 팀장님이 출근하시면 보고하세요.”

“그게······.”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샤론 화이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일은 팀장님이 조금 너무하셨지만,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아침에 보고서를 들고 가서 이야기하면 풀어지실 거예요.”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팀장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1년 넘게 봤는데 가끔 사소한 것에 집착하실 때도 있지만 진짜 성격 좋으세요. 업무 능력도 뛰어나시고요. 그리고 일 잘하는 사람을 특히 좋아하세요. 미스터 손 능력이라면 곧 인정받을 거예요.”

샤론 화이트가 엘리어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다른 팀원들의 모습을 보니 엘리어스가 팀원들에게는 좋은 상사인 듯했다.

적어도 빈 포대는 아닌 것 같았다.

빈 포대는 바로 설 수가 없었다.

엘리어스가 제대로 된 상사가 아니라면 부하들에게 이런 반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저도 어서 팀장님의 인정을 받고 싶네요.”

“곧 그렇게 될 거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미즈 화이트께서 내일 팀장님께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왜 직접 보고를 않으시고요?”

샤론 화이트가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오늘 저녁 일본에 가 봐야 해서요.”

“일본에요?”

샤론 화이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

“그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요? 팀장님께 일본 출장 지시를 받았나요?”

샤론 화이트가 되물었다.

“아니요.”

“그러면······?”

“제가 개인적으로 일본에 갈 일이 있어서요. 아마 며칠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샤론 화이트가 황당하다는 듯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개인적인 볼 일로 내일 출근하지 못하니 보고서를 제가 대신 제출하라는 말인가요?”

샤론 화이트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샤론 화이트는 이해심이 넓은 사람인 듯했다.

만약 나에게 며칠 만에 처음 출근한 직원이 저녁때 마음대로 외국을 나가야 해서 출근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 당장 욕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 말인 것 같네요.”

“지금 나랑 장난해요! 여기가 당신 놀이터인 줄 알아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샤론 화이트가 소리를 쳤다.

“이런 팀장님이 팀원들에게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셨나 보네요. 이미 팀장님과는 이야기가 끝난 일입니다. 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팀장님께 이야기도 없이 마음대로 출국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 듣지 못했는데······.”

샤론 화이트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들어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 들은 사람 없어요?”

“저도 못 들었습니다.”

팀원들의 이야기를 들은 샤론 화이트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팀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봐도 되나요?”

“당연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샤론 화이트는 내 앞에서 엘리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엘리어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미 내가 샤론 화이트에게 보고서를 가지고 오기 전에 확인한 일이었다.

“팀장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시네요.”

샤론 화이트는 전화를 끊고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샤론 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제가 내일 팀장님께 보고서를 전해 드릴게요.”

샤론 화이트는 엘리어스와 합의가 된 일이라는 내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표정이었다.

내 말 그대로 신입 직원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런 양해도 없이 하루 출근하고 며칠 동안 결근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때로는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진실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물론 엘리어스와 나와는 저런 세부적인 합의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처음 대사관에 근무를 결정할 때는 임시직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사관을 나왔다.

광장에 있는 전광판에는 대통령의 아들이 뇌물과 탈세로 기소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내일 엘리어스가 출근해서 이야기를 듣고 지을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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