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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큰일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1.
내가 도착한 곳은 홍콩 공항이었다.
원래 내가 가려던 곳은 홍콩이 아닌 도쿄였다.
에이전트 에스 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먼저 진짜 신분을 밝혀야 할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다.
일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에게 먼저 내 정체를 밝혔지만, 그보다 먼저 밝혀야 할 사람은 일본의 단테 패트릭이었다.
이반 부카드에게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었던 이유가 중동이나 미군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활동을 위해서라면 단테 패트릭은 앞으로 CIA와의 협조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단테 패트릭이 곧 CIA 본부로 옮길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반 부카드야 이번은 조금 특이한 경우였지만 보통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쪽이지 그에게 내가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단테 패트릭이 본부로 가면 그에게 도움을 받을 일도 많았고 사이가 틀어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로 나였다.
하지만 나는 조민에게서 홍콩으로 와 줬으면 한다는 전화를 받고 목적지를 홍콩으로 바꿔야만 했다.
공항에서 내린 나는 택시를 타고 W&R 빌딩으로 리안을 찾아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네 약혼자가 너 걱정된다고 홍콩까지 와 달라고 하는 거야?”
“조민이?”
“그래 네 약혼자가 너 걱정된다고 전화했더라.”
“아······. 잠시만 거기 앉아 봐.”
나는 리안의 말에 따라 나는 소파에 앉았다.
리안도 책상에서 무언가를 찾아서 손에 들고 소파로 와서 앉았다.
“지난주에 발간된 S&P의 홍콩 부동산 개발 회사들의 신용 보고서야.”
S&P라면 세계 3대 신용 평가 기관의 하나였다.
신용 평가 기관의 목적은 본래 채권자에게 채무자의 신용 상태를 평가해서 알려 주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기관이 된 지가 오래였다.
S&P와 무디스의 보고서에 따라서 평가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 신인도가 좌지우지되는 것은 이제 일상이었다.
몇 년 전 아시아 경제 위기를 최악으로 몰아넣은 것도 바로 이 신경 평가 기관들이었다.
“투자한 기업 신용 등급이라도 떨어졌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비슷하다는 것은 뭐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리안이 건네준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곧 리안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홍콩 부동산 가격이 장기적으로 떨어질 거라고? 이건 뭔 헛소리야?”
“나도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는 않을 거로 생각하기는 하는데······.”
리안의 표정은 심각했다.
“헛소리잖아. 무시해.”
“너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심각해.”
“하긴 네 재산 중에 여전히 부동산 비중이 크지?”
“아직은 그렇지.”
W&R이 말 그대로 초고속 성장을 하고 있고 그중 리안의 지분은 13%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재산 중 상당수는 여전히 홍콩의 부동산이었다.
리안의 아버지가 홍콩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나가면서 물려준 가문의 재산이었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여기 나온 대로 홍콩은 예전 1997년 홍콩 반환으로 떨어졌던 부동산 가격을 상당 부분 회복한 것도 사실이야. 홍콩의 지금 경제 체제만으로는 여기서 더 발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심지어 중국 정부에서는 상하이를 홍콩을 대체할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키우려고 하고 있기도 하지.”
홍콩의 지금 번영 상당수는 아시아 금융 중심지라는 토대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개방 이후부터 꾸준히 상하이를 금융 중심지로 육성하고 있었고 실제로 상하이 주식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더구나 지금 홍콩 정치 상황은 좋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얼마 전 홍콩 장관인 둥칭화는 12명의 장관을 일방적으로 임명했다.
다른 나라처럼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의회에서의 형식적인 논의조차 없었다.
당연히 야당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홍콩 정계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2000년대는 브릭스의 시대가 될 가능성이 커.”
“브라질, 인도, 중국, 러시아, 남아프리카 말이지?”
1990년대가 정보산업의 시대였다면 닷컴 버블을 기점으로 2000년대는 실물 경제 시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바로 브릭스 국가들이었다.
이 나라들은 모두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진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실물경제가 이끌어 가는 세계 경제에서 가장 큰 발전이 기대되는 나라들이었다.
“그래. 브릭스 국가들의 경제가 발전하면 브릭스 국가에서 앞으로 부자가 더 많이 나오겠지. 그런데 그렇게 돈을 벌면 그 사람들이 그 나라에만 살고 싶겠어?”
“아니겠지.”
브라질, 인도, 중국, 러시아, 남아프리카 모두 정치적으로 안정됐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들이었다.
브라질은 현재 얼마 남지 않은 대선에서 좌파 노동당의 집권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핵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 국가였고 경제인들은 그 공산당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러시아는 얼마 전 대통령 푸틴과의 갈등으로 러시아의 유력 기업인이 해외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남아프리카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다면 모르지만, 부자들이 이런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완전히 떠나지는 않더라도 안전한 나라에 집이나 별장을 사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할 가능성이 컸다.
“내 생각에는 브릭스 국가 중에서 인도, 러시아, 남아프리카 국가의 돈 많이 사람들이 몰려갈 런던이나 브라질과 중남미 국가들의 부자들이 몰려갈 런던 그리고 중국의 부자들이 몰려올 홍콩은 앞으로 10년간은 부동산이 엄청나게 오를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알아도 불안할 수밖에 없지. 당장 눈앞에서 내 전 재산이 걸린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는데 냉정함을 유지하면 그 사람이 대단한 거지.”
“요즘 주가가 계속 떨어지나 보니 이런저런 생각도 많아져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몇 주째 세계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있었다.
리안이 투자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리안은 개별 기업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나스닥 지수 선물로 숏 포지션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이익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익이 커진다고 해도 같은 이익이라면 이왕이면 주가가 올라가서 다 같이 이익이 보는 게 나을 수밖에 없었다.
숏 포지션 파생 상품 투자는 위험도 크고 주가가 내려가는 상황에서는 공매도 정도를 제외하면 돈을 벌 방법이 없었다.
투자자에게 선택지가 적다는 것은 곧 위험이 커지고 신경 쓸 곳이 많다는 의미였다.
“얼굴을 보니 며칠째 잠을 못 잔 것 같은데 얼마나 밤을 새운 거야?”
“틈틈이 자고 있어. 걱정하지 마.”
리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민이 나를 홍콩으로 급히 오라는 전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 투자금을 걱정하는 거야.”
“뭐야!”
“지금 같은 추세는 앞으로도 최소 한 달 이상 갈 거야.”
“그렇게 오래간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911 테러 이후에 너무 빠르게 주가를 회복했어. 경제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데 말이야. 더구나 미국이 지금 보호무역과 달러 약세까지 밀어붙이고 있잖아. 한동안 어려울 거야.”
“한 달이라는 말이지.”
“최소 한 달! 그런데 네가 그때까지 지금처럼 잠도 안 자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관리하는 투자금이 거의 절반 정도인데 네가 피곤해서 잘못 판단하면 다른 곳에서 다 이익 나도 적자야.”
“넌 말을 해도···.···”
“그러니까 쉬면서 하라고 약혼녀가 바쁜 사람 여기까지 부르게 하지 말고! 지금 내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데 여기까지 온 거야.”
“알았어. 고맙다.”
“고마울 일을 만들지 말라고······!”
“알았다니까. 네가 아저씨냐! 어째 중국에 가 있는 아저씨보다 잔소리가 더 심해!”
“카이 황 대표야 네와의 관계 때문에 못 하는 거지. 나는 아니잖아.”
“넌 나이 들면 아저씨보다 훨씬 더할 것 같아. 지금도 이렇게 잔소리가 심한데······.”
“그게 너 걱정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할 소리야?”
“나도 너 걱정해 주는 거야.”
“아주 고마워서 미치겠다.”
“알았으면 됐고······. 그런데 너 바로 돌아가 봐야 해?”
“그래야 할 것, 잠시만······.”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연락이 온 전화기는 CIA 일에만 쓰던 전화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일어나서 구석으로 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받았습니다.”
- 다행히 바로 받았군.
생각과는 달리 이반 부카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테 패트릭도 아니었다.
“혹시 엘만······.”
- 맞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필리핀 CIA 지부장인 엘만이었다.
그에게 이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반 부카드에게는 알려 주었느니 그에게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 같았다.
이반 부카드와 엘만 지부장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무슨 일이신지?”
내가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엘만 지부장이 갑자기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나? 여기는 자네 때문에 정신이 없는 데 말이야.
엘만 지부장이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저 때문에 정신이 없다니요? 저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 이번 작전을 제안한 게 자네라면서? 내가 듣기로는 그렇게 들었는데 아닌가?
최근에 내가 제안한 작전이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혹시 말씀하시는 게 카슈미르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제안한 것이 맞습니다.”
- 역시 자네가 맞군. 이런 작전을 제안했으면 나에게도 미리 알려 줘야지. 자네와 나 사이에 이건 좀 아주 섭섭하군. 이렇게 갑자기 일을 진행하면 우리는 어쩌라는 말인가.
엘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내 계획은 미국에서 시작해서 중동을 거쳐 파키스탄으로 이어져 알 카에다에 책임을 미룸으로써 파키스탄 국민과 인도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 계획에 필리핀은 관계가 없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 모른다고.?
내 거듭된 부인에 엘만도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되물었다.
“예. 세부 계획은 제가 관여하지 않았지만 제가 제안한 초안에는 필리핀과 관련된 부분은 없었습니다.”
- 그럼 누군가 우리를 끼워 넣었다는 것인데······. 아주 더럽게 걸렸군.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누군가를 향한 불만이 그대로 드러났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 자네도 작년에 아부 사야프에 납치당한 본국 선교사 부부 기억하지.
아브 사야프에 납치 사건은 내가 필리핀에서 한 일 중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었다.
내 계획 때문에 꽤 많은 사람이 추가로 납치되고 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 지금 이틀 후에 인질 구출 작전이 실행될 거네.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온 일인데 이번 일로 완전히 꼬였어.
“본국 해병대가 나서는 겁니까?”
현재 필리핀에는 군사고문단의 형식으로 미 해병대 천명이 파병된 상태였다.
- 그러면 내가 이렇게 걱정하겠나. 필리핀군 단독 작전이네. 필리핀과 맺은 협정 때문에 본국 해병대는 필리핀 내에서 군사작전을 할 수가 없네.
“필리핀군 단독 작전이라면 인질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작년에도 필리핀군은 섣부른 인질 구출 작전을 벌이다가 오히려 한 개 분대가 적의 공격에 사망한 과거가 있었다.
비록 미군의 훈련을 받았다지만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의문이었다.
- 위험하지. 그래서 조심스럽게 준비해 온 것인데······.
“본부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 당장 실행하라고 하네.
“······.”
나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보고했는데도 믿을 수 없는 필리핀군의 작전을 밀어붙인다는 것은 인질이 사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아니, 어쩌면 인질이 사망해서 알 카에다에 대해 사람들이 분노하기를 바라고 하는 작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부사야프는 알 카에다의 동조 세력.
알 카에다 동조 세력에 납치됐던 미국민이 구출 작전 중 사망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내가 제안했던 미국 내 알 카에다 동조자에 대한 체포일 것이다.
백악관은 희생자가 생기면 그것을 대대적으로 애도할 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호텔 방에서 마음속으로 무사히 인질이 구출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 손에 묻은 피가 더 진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