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26화 (227/270)

(226)

#227.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1.

나는 결과를 들은 즉시 엘만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 내가 들어서자 엘만 지부장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이진?”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나는 신분증을 꺼내 엘만 지부장에게 보여 줬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이었다.

“에드릭 손?”

엘만 지부장은 내 이름을 처음 들은 듯했다.

이반 부카드에게서 내 진짜 이름과 신분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듯했다.

“한국 주재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군.”

“한국 주재 대사관에서 얼마 안 됐습니다. 그전에는 홍콩 투자회사에 일했습니다.”

엘만 지부장은 내 신상에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 신상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표정이었다.

“자네 필리핀에는 언제 들어왔나?”

“어제 입국했습니다.”

“내 연락을 받고 입국했나 보군.”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만 지부장에게 물었다.

“작전 진행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뉴스만으로는 인질 한 명이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어서요.”

“뉴스에 나온 게 전부네. 좋게 말하면 필리핀군의 이번 인질 구출 작전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네.”

“절반의 성공요?”

“구출 작전 대상이었던 미국인 인질 두 명 중에서 한 명은 사망하고 다른 한 명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네.”

“총상을 입었다면 다른 인질도 사망할 수도 있었겠군요.”

“맞아.”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어두운 표정에서 다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다른 문제라면 인질을 잡고 있었던 아부사야프의 간부를 비롯한 반군을 대부분 놓쳤다는 부분이겠지.”

“예? 그건 말이 절반의 성공이지 구출 작전은 사실상 실패라는 말 아닙니까?”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한 일이고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엘만 지부장은 불만에 찬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제대로 된 정보도 준비도 없이 필리핀군이 작전을 벌였을 때부터 예고된 상황이야. 자네도 알고 있다시피 작년 병원에서 인질극을 벌였을 때도 구출 작전에서 필리핀군은 실패했네.”

“미국 해병대에게 반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필리핀군이 특수전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는 하죠. 더구나 이번에는 밀림이니 지난번보다 더 상황도 나빴고요.”

“그래도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살릴 수도 있었는데 서두르다가 다 망쳤어.”

엘만 지부장은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네. 자네 말대로라면 이번 인질 구출 작전은 끼워 넣은 것은 자네가 아니라 저 윗선일 테니까 말이야.”

“그래도 제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죠. 어쨌든 제가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된 일이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자네 때문이 아니야. 이번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네가 아니라 저 윗선에 있는 누군가일 테니 말이야.”

엘만 지부장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 윗선에서 인질이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했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질문에 엘만 지부장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 지금······ 윗선에서 일부러 인질이 희생되기를 바라고 서둘렀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나는 서둘러 부인했다.

내 생각이 어떻든 윗선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위에 있다고 악마가 되는 것은 아니네. 서둘러 작전을 벌이면 희생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게 일부러 인질이 희생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야.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이지. 그냥 이번 기회에 인질 문제를 해결하고 가기를 원한 것뿐이야.”

“그런가요?”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기회에 인질 문제를 해결하고 가는 것이 맞아.”

엘만 지부장은 이번 작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자기 달라진 말에 나는 당황했다.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기를 바라는 것이 내 욕심일 뿐이지. 정보를 더 모으고 인질 구출 계획을 더 치밀하게 짠다고 해서 희생이 없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그렇기는 하죠.”

당황한 나는 엘만 지부장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2.

엘만 지부장에게서 상황을 들은 나는 이번에는 이반 부카드를 만나기 위해 자카르타로 갔다.

내가 전화를 걸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가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어서 오게!”

“좋아 보이시네요.”

엘만 지부장과는 달리 이반 부카드의 표정은 밝았다.

“안 좋아질 이유가 있나? 그렇지 않아도 911 테러 직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모인 알 카에다 간부와 911 테러범의 접촉을 알리지 않은 것 때문에 위기에 몰렸었는데 이번에 자네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국토안보부 출범을 앞두고 흔들리던 CIA 위치도 상당한 부분 바로잡을 수 있었고 말이야.”

“잘됐네요. 혹시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본래는 외부 팀에는 비밀이지만 자네라면 알 자격이 있지.”

이반 부카드가 말을 이었다.

“내일 FBI에서 호세 파딜라 아니 압둘라 알 무하 히르를 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할 예정이네. 그 후에는 자네 계획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와 같은 국가에서 대대적인 알 카에다 동조자들에 대한 체포가 진행될 거네. 물론 마지막은 파키스탄이고 말이야.”

내가 제안한 계획대로였다.

이반 부카드가 호세 파딜라는 이름 대신 압둘라 알 무하 히르라는 무슬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고히 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인 듯했다.

이름을 통해 미국인이 아니라 테러범으로 규정 짓는 행동이었다.

“필리핀에서 인질 구출 작전도 제 계획과 관계된 겁니까?”

“물론이지. 자네 계획에는 없었지만, 국방부에서 필리핀 인질 구출 작전을 강력하게 요구했네. 백악관도 찬성했고 말이야.”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뭐긴 뭐겠나. 자네 계획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전쟁을 막는 것이겠지만 필리핀 인질 구출 작전에서 계획을 시작하면 국내 문제는 물론이고 국방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거든.”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인질 구출 작전이 국내 문제와 국방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라니요?”

“뭐긴 뭐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테러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애국법이 인권침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애국법으로 테러 모의를 했다면서 다짜고짜 국내에서 시민을 체포하면 어떻게 되겠나?”

“불만이 나오겠죠.”

911 직후에야 미국민 전체가 공포와 분노로 애국법을 찬성했다.

그렇지만 9개월이 지난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제외한 미국인들 대부분은 일상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현재 미국민들의 가장 큰 고민은 테러가 아닌 불경기와 연일 내려가는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부사야프는 알 카에다 연계 세력이고 이번 구출 작전은 그런 세력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미국민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이지.”

“그렇군요. 그럼 국방부의 문제는요?”

“우선 인력이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된 지 9개월이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됐던 병력 중 일부는 전역해야 한다는 말이네. 그런데 지금 아무런 얻을 것이 없는 필리핀에 1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 인질 때문에 묶여 있지는 않나. 그렇게 묶여 있는 이유는 아부사야프에 잡혀 있는 인질이고 말이야.”

엘만 지부장은 고위직에 올라간다고 해서 악마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반 부카드의 대답을 들으며 어쩌면 백악관이나 국방부는 인질 두 명이 모두 작전 도중에 사망했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알 카에다 동조 세력이 미국민을 납치해서 인질로 감금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인질이 살든 죽든 사라짐으로써 필리핀 주둔 해병대가 철군한 명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악마일까?

그들이 악마라면 나는 악마일까?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이반 부카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번 일이 잘되면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거네. 무엇보다 이번에 파키스탄 내에 있는 알 카에다 동조자들을 체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는 점이 중요하지.”

이반 부카드는 인도 파키스탄 사이의 전쟁을 막은 것보다 파키스탄 내 알 카에다에 대한 반대 분위기를 만든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이반 부카드가 엘만 지부장보다 훨씬 CIA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게 직책은 지부장인 엘만이 높지만, 이반 부카드가 훨씬 중요한 일을 맡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반 부카드가 CIA답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말은 백악관과 국방부의 요구였다고 하지만 내 제안에 필리핀을 끼워 넣은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이반 부카드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지금 국방부는 필리핀에 잡힌 인질 상황을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반면에 이반 부카드는 필리핀의 엘만 지부장과 가까웠고 서로 꽤 많은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만약 이반 부카드가 필리핀 인질을 내 계획에 끼워 넣은 인물이라면······.

내가 그를 더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희생된 것이 필리핀에서 납치된 선교사 부부였지만 다음에는 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미국과 CIA에 이익이 된다면 그는 나를 기꺼이 희생양으로 내놓을 것이다.

나는 이제 CIA 요원이 아니라 산하에 있는 외부 팀의 요원일 뿐이었다.

3.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할 때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바로 옆인 일본인데도 일주일 가까이 걸린 여정이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축구 대표 팀도 얼마 전 러시아 축구 대표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차분한 편이었다.

오히려 일본에 패한 러시아에서 폭동이 일어나 두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공항에서 단테 패트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반 부카드나 엘만 지부장과는 달랐다.

- 지금 도쿄에 도착했나?

“그렇습니다만······.”

이반 부카드는 내가 도쿄에 도착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신상과 내가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역시 만만치 않은데?’

정보요원으로서 단테 패트릭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보요원으로서는 모르지만, 인맥은 오히려 이반 부카드보다 나은 것 같았다.

단테 패트릭이 예정대로 CIA 본부로 가면 내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단테 패트릭을 만나러 일본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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