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27화 (228/270)

(227)

#228. 빈 수레가 요란하다.

1.

단테 패트릭은 나를 보자마자 다가와 포옹했다.

나는 그의 이런 행동에 순간 당황했다.

“자네가 실력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어. 하버드 크림슨의 무패 우승 주역이었다고?”

단테 패트릭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예.”

예상 못 한 말에 나는 더욱 당황하며 대답했다.

내가 아이비리그 리그 풋볼 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했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전미 대학 리그에서 무패 우승 팀의 일원이었다면 설사 프로가 아니었더라도 어디를 가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는 풋볼이었고 가장 인기 있는 리그는 NFL이었다.

그리고 NFL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스포츠 경기가 바로 대학 풋볼 리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우승한 아이비리그 대학 리그는 달랐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체육 장학생 제도가 없었다. 말 그대로 순수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었고 풋볼팀도 전미 대학 리그가 아닌 아이비리그 팀들만 따로 경기를 치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아이비리그 풋볼 리그에는 관심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내가 드래프트에 나갔더라도 기껏해야 6라운드나 7라운드에 지명되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내가 하버드 역사상 쿼터백으로서는 손에 꼽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한 순위였다.

그런데 그 시절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 단테 패트릭의 입에서 나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놀란 표정이군. 내가 갑자기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내서 말이야.”

“예.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

“나도 자네와 같은 하버드를 다녔네.”

“동문이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 조사해서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처음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단테 패트릭이 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자네가 누군지 알고 보니 자네들이 우승했을 때 교내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군. 쿼터백이 아시아계라서 특별히 인상이 깊었거든. 그렇다고 내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네.”

“이해합니다. 그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니까요.”

아시아계가 풋볼을 하는 경우도 적지만 그중에서도 쿼터백을 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풋볼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자 가장 운동능력이 필요한 스포츠였다.

그렇지만 쿼터백은 백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풋볼을 시작한 이후 유색인종 그것도 아시아계인 내가 쿼터백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풋볼을 시작한 이후 다른 포지션으로 옮기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나는 끝까지 쿼터백을 고집했다.

내가 풋볼을 시작한 이유는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였고 쿼터백은 그 상징적인 포지션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상으로 프로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와 같은 CIA로 일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얼마 전 퇴사했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이 자리에 온 것을 보니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는 계속 일하는 거고?”

“예.”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일한다면 여전히 한 식구라고 할 수 있지. 앞으로 잘해 보세.”

단테 패트릭이 다시 한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넘어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단테 패트릭이 내가 이야기하기 전에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알고 어떻게 이야기하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내 예상과는 다르지만,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자네 도움을 내가 많이 받았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아니야, 외부 팀인 에이전트 에스 팀이 내 일을 꼭 도울 필요는 없었지. 뭐 자네는 얼마 전까지 CIA 직원이었다니까 좀 다르겠지만 말이야.”

말을 끝낸 단테 패트릭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조금 방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 요원으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단테 패트릭이 아주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만약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면 클린턴 행정부 시절 CIA 조직이 개편되고 인원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평생 본부에서 행정 요원으로 살아온 단테 패트릭이 비록 일본 지부라고는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지금도 당장 말 한마디에 내가 지금까지 그를 1년 넘게 도와줬던 모든 것을 CIA 요원으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했던 일로 짐을 털어 버렸다.

내가 단테 패트릭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쓸모 있는 패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자네가 일본 지부를 위해서 해 준 일이 있는데 적극적으로 돕겠네. 내 개인적으로 자네에게 고마운 것도 있고 말이야.”

단테 패트릭은 여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은근슬쩍 내가 했던 일을 자신이 아니라 일본 지부를 위해 해 준 일로 이야기했다.

물론 크게는 CIA 일본 지부를 위해서 해 준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CIA 일본 지부에서 만난 가장 고위 간부가 단테 패트릭이었다.

더구나 내가 했던 일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바로 단테 패트릭이었다.

“알겠습니다.”

단테 패트릭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고지식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내 착각일 뿐이었다.

아마도 고지식해 보이는 것이 단테 패트릭의 처세법 중 하나인 듯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한잔하는 게 어떻겠나? 생각해보니 자네를 만난 지 1년도 넘었는데 사적으로 술 한잔한 적이 없더군. 지금까지야 일 때문에 만난 것이지만 자네는 내 동문이기도 하지 않나. 이렇게 타국에서 동문을 만나고 앞으로 같이 일을 할 사이인데 어떤가?”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 패트릭을 지금까지 1년 넘게 만났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끌려간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것부터 단테 패트릭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린 기분이었다.

2.

우리는 단테 패트릭이 단골 술집으로 갔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단테 패트릭이나 나나 긴장을 풀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자네 시간 좀 있나?”

대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시간이라면?”

“한 일주일 정도면 되네.”

“무슨 일이신지? 저에 대해서 알아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사관 쪽에는 내가 말하지. 상사가 누구지?”

“엘리어스라고 부지부장님도 아신다고 들었는데요?”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엘리어스 잘 알지. 자네가 엘리어스 밑에서 일하고 있었군. 그것 잘됐군. 엘리어스에게는 내가 전화를 걸도록 하지.”

내 생각보다 엘리어스와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뭐긴 뭐겠나. 자네와 함께하던 일이 있잖은가.”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혹시 일본 총리의 지지율 문제라면 저도 딱히 방법이 없습니다.”

“힘든가?”

“예. 아시겠지만 지금 총리 지지율이 낮아진 이유는 지지부진한 정치 개혁과 경기 악화 때문인데 이건 저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슈를 만들고 그걸로 여론전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은 그런 한두 가지 꼼수로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라도 일본 정치 개혁이나 수십 년째 침체 상태인 일본 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나 미국의 그린스펀 연준 의장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둘은 모두 할 수 있다고 해도 일본 경제가 살아나서 다시 미국을 위협하는 것을 원할 리가 없지만 말이다.

“나도 그런 정도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네. 걱정이군. 일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반고이즈미 파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네. 다음 총선 전에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서 총재를 다시 뽑자고 말이야.”

자민당이 다수당인 상황에서 총재는 바로 일본 총리를 의미했다.

그런 자민당의 총재를 교체하자는 것은 즉 일본 총리를 교체하자는 의미였다.

“역시 자기 계파가 없는 게 치명적이군요.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30%대면 아주 낮은 지지율은 아닌데요.”

한때는 80%대였던 고이즈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30%대까지 하락한 상태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30%의 지지율은 절대 낮은 지지율이 아니었다.

고이즈미 이전의 총리였던 모리 전 총리는 훨씬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지만, 자민당 총재와 일본 총리의 자리를 지켰다.

그가 총리에서 물러난 것은 5%라는 말 그대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고이즈미 총리와 모리 전 총리의 차이는 모리 전 총리는 자기 계파를 가진 계파 보스인 반면에 고이즈미 총리는 자기 계파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자기 계파가 없다는 것은 지난 총재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켜 역전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하지만 지지율이 떨어지자 치명적인 약점이 된 셈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지금 와서 계파를 만들 수도 없고 말이야.”

아마 고이즈미 총리가 자기 계파를 만들려고 하면 당장 그를 지지하는 의원들까지 등을 돌릴 것이다.

“어쩔 수 없네요.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을 올릴 수 없다면 다른 경쟁자들을 끌어내리는 수밖에요. 스즈키 무네오 의원과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스즈키 무네오 의원과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에 대한 작업은 나와 단테 패트릭이 몇 달 전부터 해 오던 일이었다.

스즈키 무네오 의원은 자민당의 거물로 하시모토 전 총리 계파의 중진이었다.

다나카 전 총리의 딸인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은 계파는 없지만, 일본 국민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차기 일본 총리로 거론되고 있었다.

“거의 수사가 마무리 단계라는 정보야. 그런데 대사관 정확하게는 국무부 쪽에서 우리가 이번 일에 관여하는 눈치챈 것 같아.”

“그래요?”

“자네도 알다시피 스즈키 무네오 의원이나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이나 만만치 않은 거물들이고 둘 다 일본 외무성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 아닌가.”

미국 국무부는 다른 나라의 외교부라고 할 수 있었으니 일본 외무성과도 가까운 것은 당연했다.

스즈키 무네오는 사실상 수십 년 동안 일본 외부성을 움직였던 거물이었고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은 말 그대로 올해 초까지 외무성의 장관이었다.

“그래도 하시모토 전 총리 파벌을 견제하고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이 다음 총재 선거에 나오는 것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부지부장님으로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계속 총리로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이자 한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은 바로 고이즈미를 일본 총리로 만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테 패트릭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본 지부에서 한 일이 바로 고이즈미를 총리로 만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단테 패트릭이 일본에서 얻은 가장 성과가 바로 고이즈미를 총리로 만드는 과정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그 측근과의 인맥이었다.

고이즈미는 예전 자민당 출신 총리들과는 달랐다.

하시모토 전 총리나 모리 전 총리가 총리에서 물러나고도 여전히 자민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민당 주요 계파의 보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기 계파가 없는 고이즈미 총리는 총리에서 물러난 순간 그냥 총리를 지낸 일개 의원일 뿐이었다.

“그런데 스즈키 무네오는 본인 혐의가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다나카 마키오는 좀 어렵지 않겠나? 비서가 받은 임금 일부를 받아 썼다고는 하지만 정치 관행이고 유죄를 입증하기도 어렵고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목적은 다나카 마키오 전 외상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총재 선거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요. 검찰에서 기소를 받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은 충분합니다.”

“둘 다 한 번에 처리하자는 말이지?”

“예. 어차피 스즈키 무네오에 대한 자료를 공개한 것은 우리지만 그런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스즈키 무네오와 다나카 전 외상의 갈등 때문입니다. 아예 검찰 기소와 동시에 다나카 외상을 자민당 내에서 제명하죠. 하시모토파도 스즈키 무네오가 구속되면 상황에서는 다나카 전 외상 제명에 찬성할 겁니다.”

“알겠네.”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둘을 구속하자면 언론에서 그렇게 몰아가야 하는데······.”

말을 마친 단테 패트릭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일본 기자들을 만나서 여론전을 한 것은 바로 나였다.

“알겠습니다.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고맙네.”

단테 패트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단테 패트릭의 이용 가치는 그가 일본 총리를 움직일 수 있을 때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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