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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모든 문제는 자초한 일이다
1.
대화 이후 엘리어스는 더는 나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속마음은 어쩐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우리 둘은 화해한 셈이었다.
엘리어스에게 말한 대로 W&R은 중국 상하이 주식시장에 5억 달러를 투자하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나는 홍콩에 와 있었다.
거의 모든 전 세계 주식시장이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투자 방향은 별로 논의할 게 없었다.
현재 유지하고 있는 숏 포지션을 그대로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 투자는 조금 달랐다.
중국 선물 시장은 외국인이 투자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개별 기업에 투자해야 했다.
한마디로 W&R의 직원 중 상당수가 매달려야 하는 문제였다.
W&R은 지금까지 중국 주식시장에 전혀 투자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의논해야 할 것이 더 많았다.
중국 주식시장에 투자하자는 이야기에 리안은 처음에는 조금 놀란 듯했다.
“이제 중국 주식시장에도 투자하는 거야?”
“그래야지. 중국 푸젠성과 저장성에 직접 투자도 하는데 주식시장에만 투자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중국 주식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거야?”
예전에도 중국에 투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류오린이라는 회사 자체가 지금은 1팀에서 중국 기업들의 해외 투자도 병행하고 있지만, 본래는 화교 자본을 중국에 투자하는 통로로 만들어진 회사였다.
중국 투자에는 직접투자는 물론이고 간접투자 즉 주식에 대한 투자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류오린의 주력은 본래 중국 투자였고 오히려 지금까지 나와 리안이 했던 투자가 회사 주력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물론 지금은 워낙 우리 실적이 커져서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됐고 W&R이 류오린을 통해서 투자하는 이상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데도 내가 중국에 투자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과 어느 수준 이상 관련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가 내가 CIA 요원인 사실을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내가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CIA를 퇴직하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중국의 경제 발전 속도는 빨랐고 경제가 발전해 중국의 위상이 커지면 커질수록 CIA나 미국 정부에는 중국 전문가가 더 많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대해 잘 아는 요원의 퇴직을 CIA가 허용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얼마 전 사실로 드러났다.
단순히 홍콩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중국 관련 국방장관 안보 회의에 동원될 뻔했다.
비록 엘리어스가 그 일에 관여됐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엘리어스나 그의 아버지라도 아무런 근거 없이 일을 벌인 것은 아닐 것이다.
CIA 내에 중국 관련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사실 CIA나 미국 정부에 중국 관련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상당히 많았다.
미국에는 중국 화교나 중국 출신 유학생이 많았다.
학구열이 높은 동아시아 출신답게 그들 중에는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미국 정부가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정보전에서 해당국과의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들은 훌륭한 자산이지만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설적인 스파이이자 CIA 대중국 정보전의 치욕으로 기록된 진우타이(Larry Chin)였다.
1922년 베이징에서 출생한 진우타이는 중국 미국 영사관의 통역을 거쳐 CIA 해외 방송 부서에서 일하면서 CIA와 인연을 맺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이후에는 버지니아 알링턴에서 CIA의 중국 관련 모든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지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사실 1948년부터 중국 공산당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였다.
1986년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자살하기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주요 정보를 중국에 빼돌렸다.
그 외에도 중국이나 타이완 혹은 화교 출신으로 핵무기 정보나 군사정보를 중국에 넘기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CIA에서 중국 출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내가 중국 전문가가 된다면 CIA 처지에서는 배신 가능성이 낮으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정보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우려 때문에 나는 중국에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었고 올해 초부터 다른 브릭스 국가들에는 투자하면서도 중국은 제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완전히 CIA와의 관계를 끊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CIA를 그만둔 상태였다.
이제 내가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해서 내게 중국 관련 임무를 맡길 사람은 없었다.
물론 아무리 리안과 친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알겠지만 내가 투자를 시작한 이후 중국 주식시장이 계속 안 좋았잖아. 더구나 우리 회사의 주력인 선물 시장은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규제도 심하고 말이야.”
진짜 이유를 댈 수 없었던 나는 중국의 규제 핑계를 댔다.
“그런데 중국 주식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지분은 내가 훨씬 많지만, 리안과 나는 동업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리안이나 회사의 대표인 카이 황이 중국에 투자를 강하게 요구했다면 나로서는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안도 W&R의 중국 투자에 소극적이었다.
“나야 나와 상하이방의 관계 때문에 W&R이 피해를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 너도 알겠지만 나나 우리 집안은 오래전부터 중국에 투자를 지속해서 하고 있어.”
“네 집안이 본래 저장성 출신이라고 했었나? 너도 다른 본토 출신들처럼 고향에 투자한 거야?”
“뭐 그렇지. 우리도 중국이 개방된 이후 다른 가문들처럼 고향인 저장성에 투자했었어. 고향에 있는 대학에 기부도 하고 말이야. 물론 상하이방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 투자에서 큰 손해를 봤지만 말이야.”
“그런데도 투자를 멈추지는 않았고?”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나마 고향 어르신들이 이런저런 말을 해 줘서 아버지가 홍콩을 떠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거야. 집안 어르신 중에 혁명원로가 계시거든.”
혁명원로는 중국 공산당의 초창기 핵심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혁명원로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겨우 800명 정도였다.
상하이방과 척을 진 상황에서도 리안 집안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중국에서 혁명원로는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존재였다.
중국에서 ‘혁명원로’는 미국의 ‘메이플라워호 승객’이나 ‘건국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아니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가 오래전 과거인 것에 비해 ‘혁명원로’는 비록 은퇴한 상태지만 일부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집안에 그런 분이 있었어? 혹시 존함이?”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정도로 유명하신 분은 아니야.”
혁명원로라고 해서 모두가 덩샤오핑이나 얼마 전 사망한 시중쉰처럼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인연이 있다면 시진핑 성장의 요구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저장성에 투자했겠네.”
“그렇기는 한데······ 내년으로 투자를 조금 미루려고. 이왕이면 W&R의 투자와 함께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것 좋은 생각이네. 어차피 하는 것 투자금이 많으면 좋지.”
내 이야기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너도 이번에 상하이 주식시장에 한 투자는 오래할 생각은 아닌가 보네?”
“어차피 이번에 투자한 5억 달러 중에서 3억 달러는 푸젠성에 곧 투자될 돈이고 나머지도 내년에 저장성에 투자될 자금이잖아. 상하이 주식시장에 투자한 것은 그곳에 직접 투자하기 전에 투자금이 잠시 머무는 정도의 의미 정도?”
“당장 푸젠성에 투자할 자금은 3억 달러 정도잖아? 저장성에 투자할 3억 달러는 반년 후에나 쓸 자금이고. 그런데도 2억 달러를 더해서 5억 달러나 상하이 주식시장에 투자한 이유는 뭐야?”
“뭐긴 뭐야 분산투자지. 너도 알겠지만 몇 주간 다른 주요 주식시장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최근에 유일하게 상승하는 시장이 바로 상하이 주식시장이잖아.”
내 대답에 리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상하이 시장이 한동안 더 오를 거로 생각하는 거야?”
“이번에 다른 곳과 달리 상하이 지수가 오른 이유가 얼마 전 발표된 중국 산업 생산 증가 때문이잖아. 최근에 주가는 나쁘지만,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도 늘고 있고······.”
“그렇기야 하지.”
“이런 호재가 오랜만인데 적어도 한 두 주는 오르지 않겠어? 왜, 너도 투자해 보려고?”
“오른다는데 해 봐야지. 그렇지 않아도 곧 있으면 중국은행이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된다고 해서 준비해 둔 자금이 있거든. 몇 주라면 잠시 그쪽에 투자금을 돌려도 되겠네.”
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다른 부분에 더 관심이 갔다.
“중국은행의 상장이라. 앞으로 중국 기업들의 홍콩 상장이 꽤 늘어나겠네.”
중국 4대 은행 중 하나인 중국은행이 곧 있으면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될 예정이었다.
중국은행이 상하이가 아닌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의 상하이 주식시장이 있기는 하지만 상하이 주식시장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홍콩에서 투자하기에도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앞으로 중국 기업들이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거로 생각했고 리안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꼭 좋은 일인지는 조금 의문이야. 이렇게 중국 기업들이 점점 홍콩에 상장하면서 홍콩 주식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비중이 커질 거고······. 그러면 언젠가는 홍콩 주식시장이 중국에 종속되는 결과가 될 테니까.”
리안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홍콩은 아시아 최대의 금융 중심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무섭게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중국이 홍콩 정치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홍콩인의 주요 가문 일원으로서 리안이 그런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피할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만 그렇다고 리안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지금 홍콩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홍콩을 중심으로 투자를 하고 있고 홍콩을 가장 편안하게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홍콩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처럼 그저 그런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2.
리안과의 투자 회의 이후 나는 엘리어스에게 허락을 받고 홍콩에 머물면서 상하이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를 진행했다.
기업의 주가만큼 경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 없었다.
중국 기업 주가는 단순히 경제 논리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주가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 있었다.
엘리어스는 내가 투자를 진행하면서 전해 준 정보에 꽤 만족했다.
그렇게 내가 중국에 있는 동안 파키스탄에서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파키스탄군과 알 카에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조금이나마 찜찜했던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조금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내 계획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진행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반 부카드에게 연락했다.
- 자네 작전은 잘 진행되고 있어. 이미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전투는 소강 국면이고 대신 파키스탄 내에 있는 알카에다 잔당을 추적하는 중이야. 얼마 전 전투도 추적을 피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던 알 카에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고······.
“잘됐네요. 그럼 이제 인도 파키스탄 정부 사이의 전투는 해결된 건가요?”
-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없었지. 인도에서는 여전히 지난번 군 캠프를 공격했던 민병대를 인도로 송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어. 당연히 파키스탄은 그건 어렵다는 견해고 말이야. 더구나 무샤라프 대통령이 조금 욕심을 부리고 있어서 일이 쉽지가 않다고 하더군.
“욕심이라니요?”
- 이번에 헌법 개정을 추진하나 봐.
“헌법 개정요?”
- 그래. 대통령에게 총리 임명과 해임권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아.
전쟁 위기를 벗어나자 바로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셈이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은 원래 의원내각제 국가였고 총리가 국가원수였다.
무샤라프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작년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명목상의 직위였던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렇지만 총리는 예전 의원내각제였을 때 총리가 가지고 있었던 권한을 상당수 가지고 있었고 그런 총리는 의회에서 선출되었다.
무샤라프는 총리에 대한 임면권을 가짐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이반 부카드가 말했듯이 욕심이었다.
파키스탄은 무슬림 국가였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데 파키스탄이 협조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군부와 정보기관에 많았다.
그런 불만을 다독여서 내부를 수습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위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생각부터 하는 것은 내부 불만을 키울 뿐이었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건가요?”
- 아니기를 바라지만 파키스탄에 파견된 요원들은 곧 뭔가 터질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
“문제가 계속 이어지는 것 같네요.”
-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에서 문제가 사라지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걸. 특히 내년에는 더할 거고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중동에서 종교 갈등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상 사라질 수가 없었다.
지금 같아서는 어서 한국에서의 일을 처리하고 나만이라도 유럽이나 미국으로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둘러야겠네.’
끝나지 않는 중동문제에 점점 질려 가고 있었다.
가장 짜증 나는 일은 이 모든 일이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