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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가는 날이 장날이다
1.
다음 날 임순에게 연락이 왔다.
- 어제 말씀하신 홀든 씨에 대해 알아보기는 했는데요······.
임순의 말투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을 잘 안 된 겁니까?”
- 그게, 해결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다청은 중국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법률 회사였다.
다른 나라의 법률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은 꽌시가 공공연히 통용되는 국가였다.
법률 회사의 순위가 곧 관공서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순은 그 다청의 차기 파트너가 될 것이 가장 유력한 간부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겨우 성매매로 걸린 외국인의 추방을 막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 조금 운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세요.”
- 이런 경우는 가장 손쉬운 해결 방법이 돈이 오고 간 성매매가 아니라 호감으로 만난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런데요?”
- 홀든 씨라는 분과 함께 잡힌 상대가 기혼자라고 합니다. 지금 남편이 두 사람의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고요.
“남편이라······. 그래서요? 설마 남편이 항의한다고 해서 그냥 넋 놓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 그럴 리가요. 지금 남편을 회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남편이 워낙 강경해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돈이 부족한 겁니까?”
- 그럴 리가요. 상하이에 있는 제 친구 말로는 남편이 돈 말고 다른 요구를 하는데 그걸 처리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해결해 주세요.”
-예.
2.
이반 부카드에게 내 진짜 이름을 밝히고 가장 곤란한 점은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전화를 거부한다고 전화를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반 부카드는 정보 계통에서 10여 년 동안 잔뼈가 굵은 베테랑 정보 요원이었다.
그에게 대사관이나 내가 머무는 숙소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손쉬운 일이었다.
- 자네 너무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 지난번 자네가 계획한 일 말이야. 인도와 파키스탄에 관련된 일 말이네.
“그 일이라면 이미 수습 국면 아닙니까?”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다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강경했던 인도의 지도부는 강경 발언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인도 측에서는 여전히 군 캠프 공격한 파키스탄 민병대 소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주 전 전쟁 직전까지 갔던 때와는 아주 달랐다.
- 수습 국면이라면 두 나라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이번 주에 영국 외무부 장관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방문하지는 않았겠지.
“영국 외상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방문합니까?”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영국의 식민지라는 공통점은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영국 연방의 일원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물론 파키스탄은 19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참모총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영국 연방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은 여전히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 영국 외상뿐이겠나. 다음 주에는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도 방문할 예정이네. 그다음 달에는 리처드 아미티지 국방부부장관이 방문할 예정이네.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이요?”
- 그렇네.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은 직책은 콜린 파월보다 낮지만,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워싱턴에서의 권력은 직책과는 별개로 대통령과의 거리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콜린 파월 장관보다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못을 박겠다는 의미네요.”
- 그렇다고 봐야지. 이번에는 와서 무슨 소리를 할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는 약간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하긴 911 직후에 아미티지 부장관이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 소리를 생각하면 나도 이해가 갔다.
“이번에도 석기시대 발언을 하지는 않겠죠.”
- 그래야지.
911 테러 직후 아미티지 부장관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약 파키스탄이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돕지 않으면 파키스탄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아무리 911 직후라고 해도 대통령이나 국무부장관도 아니고 국무부부장관이 다른 나라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런 협박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 그 일 때문에 파키스탄에서 활동하는 요원이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아나. 위에서는 그렇게 내지르면 그만이지만 그 여파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현장 요원들이야.
아무래도 불만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작 말을 하는 이반 부카드도 파키스탄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내가 보기에 이반 부카드도 현장 요원이라기보다는 관리직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안 그러시겠죠. 911 직후에 제정신이었던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어느 정도는 아미티지 부장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911은 멀리 떨어진 나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으니까.
- 그 양반도 예전에 CIA에서 근무했었는데 왜 그렇게 다혈질인지.
“CIA 요원이라고 해서 다 냉정한 것은 아니죠.”
- 그러니 CIA 요원으로 자격이 없는 거지. 냉정함을 잃는 순간 요원으로서 자격을 잃는 거야!
“그래요?”
-그렇지.
‘내가 그래서 CIA를 그만두고 싶었던 것인가?’
나도 CIA 요원이었기는 하지만 그렇게 냉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팀장이었던 왕웬준을 그렇게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왕웬준이 내 목숨을 먼저 노리기는 했지만 죽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장 리안에게 녹음을 전하기만 했어도 리안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웬준을 처리한 직후 나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웃기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후회가 되는 일이었다.
이런 후회를 하는 것을 이반 부카드가 알면 그거야말로 CIA 요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 인도 파키스탄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신경을 쓰라는 말이야.
“알겠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다음 주쯤에 제가 인도네시아로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 기다리겠네.
3.
엘리어스가 부탁한 상하이의 일은 생각보다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 남편 쪽이 예상보다 완강하게 처벌을 요구하고 나오고 있습니다.
임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요? 뭔가 이상한데요?”
엘리어스가 부탁한 홀든은 미국인이었다.
처벌을 요구한다고 해 봐야 추방당하고 입국 거부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저도 만나 봤는데 아예 만남을 거부하고 돈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성매매는 맞는 겁니까?”
- 홀든 씨는 여자가 먼저 접근했다고 하더군요. 홀든 씨는 당연히 그런 쪽의 여자로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만약 진짜로 성매매라면 굳이 남편이 홀든만 처벌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성매매한 첫날이라면 모르지만, 만약 부인의 직업이 성매매라면 남편이 모를 리가 없었다.
손님 중 한 명만, 그것도 처벌이 추방이 고작인 외국인에 대한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 아무래도 남편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뭔가 배후가 있는 것 같네요. 우선 홀든 씨를 만나서 중국에 온 이유부터 조사해 보십시오. 아무래도 홀든 씨와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까요.”
중국에 막 출장으로 온 사람이 중국 내 원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업무적인 일일 가능성이 컸다.
- 그렇지 않아도 조사를 의뢰한 상태입니다.
임순이 말했다.
“이왕이면 괜찮은 곳 몇 곳에 동시에 의뢰하죠.”
- 여러 곳에 동시에요?
임순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앞으로 중국에서 조사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옥석 좀 가리죠.”
- 그렇게 하겠습니다.
임순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계속 이용하던 업체가 아닌 다른 곳에 의뢰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임순과의 전화를 끊고 나는 엘리어스를 찾아갔다.
그에게 진행 상황을 이야기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문제가 복잡하네요. 이거 괜히 에드릭 씨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조사하고 있다니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엘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에드릭 씨는 그럼 홀든이 함정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중국 비즈니스가 여러 가지 복잡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하네요. 당장 11월에 중국에 가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나도 조심해야겠네요.”
엘리어스가 말했다.
“팀장님이야 외교관으로 가는 것인데 이런 문제에 엮일 일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팀장님이 바나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호텔에 가실 분도 아니고요.”
“그건 모르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요.”
“팀장님은 안 그러실 것 같은데요.”
“나도 젊은 남자인데 미녀가 접근하면 넘어갈 수도 있죠. 사람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나는 굳이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 일단 조사는 계속 진행하고 결과가 나오면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럼 홀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사람을 통해서 일단 공안의 보고는 잠시 홀드해 놓은 상태입니다. 짐작대로라면 추방을 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무혐의로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인 것 같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꼬였다니 가서 만날 수도 없고······.”
“잠시 기다리십시오. 지금 상황에서 팀장님이 만나는 것은 문제를 키울 뿐입니다. 일단 상하이 영사관을 통해서 처리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정보부는 바보가 아니었다.
엘리어스가 외교관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순간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 테고······.
그의 아버지가 부시 대통령의 후원자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홀든은 단순한 경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이 아니라 엘리어스의 약점이 되는 셈이었다.
그건 홀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잠시 오늘 저녁에 자카르타에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회사 일 때문인가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물론 여기서 회사란 W&R이 아니라 CIA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 전에 하던 일이 남아서요.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사 일인데 어쩔 수 없죠.”
나는 엘리어스의 허락을 받고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내가 자카르타에 가는 동안 카슈미르에는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파키스탄 카슈미르 민병대가 인도를 공격해서 28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한 것이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왜 하필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