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37화 (238/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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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과거는 되풀이된다

내가 이야기한 다음 날 이반 부카드가 나를 인도네시아에 있는 CIA 안가로 불렀다.

“자네 제안을 본부를 통해 국무부에 전달했고 국무부에서 영국 정부와 인도를 방문하고 있는 영국 외무부장관에게 자네 제안을 이야기한 것을 확인했네.”

“벌써요?”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CIA에 보고하고 CIA는 다시 국무부에 제안했다고 해도 놀랐을 것이다.

CIA는 보안을 중시하는 조직이니만큼 명령과 보고 체계가 그렇게 빠른 조직이 아니었다.

보고의 속도를 중시하다 보면 아무래도 보안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랐을 텐데 국무부에 내 제안을 받아들여 이미 영국 정부에 이야기했다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인도 파키스탄 문제에 관한 한 영국 정부와는 핫라인을 유지하고 있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 정부가 파키스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동원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몇 주 전 군 캠프 공격 직후에 부시 행정부의 삼인자라는 럼즈펠드 국방부장관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지금은 영국의 외무부장관이 방문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는 미국 외교 정책을 책임지는 국무부장관 그리고 한 달 뒤에는 국무부부장관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런 거물급 인사들의 연이은 방문은 미국 외교의 최우선순위가 바로 인도와 파키스탄 문제 해결이라는 의미였다.

“무샤라프 장관을 인정하자는 제안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반응은 어떻다고 합니까?”

내 제안에 대한 영국 측의 반응이 궁금했다.

영국 연방 자격 정지를 풀어 주자는 내 제안은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다음 선거에서 재선이 된다면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외교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영국으로서는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리 달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고 하더군. 하지만 결국 받아들일 거야. 영국으로서도 아프가니스탄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이번에 인도가 강경 대응을 자제하도록 설득한 것이고 말이야.”

“인도 국방부장관이 이번 파키스탄 민병대의 공격에 대해서 예상과는 달리 차분한 대응을 하는 것이 영국의 영향이었군요.”

이번 민병대 공격에 대한 인도 정부 특히 국방부장관의 반응은 지난번 군 캠프 공격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도 국방부장관은 지난번 군 캠프 공격 때는 당장이라도 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일 것 같은 강경 발언을 쏟아 냈었다.

“맞아.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본국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지.”

“부지부장님도 모르시는 겁니까?”

“이런 일은 커튼 뒤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내가 영국 정부가 하는 일을 어떻게 알겠나. 영국 놈들은 음흉한 놈들이니 인도인민당의 약점이라도 쥐고 있나 보지.”

영국이 과거 영국 제국 시절 식민지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은 뿌리가 깊었다.

인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내가 지난 2년간 머물렀던 홍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홍콩은 도시 곳곳에 영국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홍콩도 그런데 인도는 어떨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때 인도는 영국 제국의 보석이라고 불렸던 나라가 아닌가.

아마 인도의 정·재계에 영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영국이 인도를 어떻게 설득했느냐가 문제가 아니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파키스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의 영연방 자격정지를 풀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여.”

“그렇기는 하죠. 영연방 자격 정지를 풀어 줌으로써 정권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당장에 무샤라프로서는 얻는 것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무샤라프가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고······. 해도 약속은 약속일 뿐이었다.

더구나 영연방 자격 정지 해제는 2년 후 재선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뭔가 다른 것은 없겠나? 영국이 아니라 우리가 무샤라프에게 줄 수 있는 것으로 말이야. 아무리 영국이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영국이 여기서 파키스탄에 영향력이 더 늘어나는 것도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파키스탄에 줄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파키스탄의 지도자인 무샤라프에게 줄 선물이었다.

‘무샤라프에게 줄 선물이라······.’

쉽지 않았다.

단순한 정치인이라면 모르겠지만 무샤라프는 인구 2억의 파키스탄 지도자였다.

뇌물 정도로는 그를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밖에도 결정적인 제약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무샤라프에게 대놓고 선물을 줄 수는 없겠죠?”

“뭐, 그렇지. 자네도 알겠지만, 국내에서 파키스탄뿐 아니라 무슬림 전체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는 않아. 거기에는 자네도 한몫 거들었고 말이야.”

말을 마친 이반 부카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 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반감을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였다.

더구나 이런 반감은 내가 제안한 작전으로 더 높아진 상황이었다.

내 계획은 미국 내에서 테러를 계획하던 무슬림을 체포하는 데서 시작했다.

미국 국민 사이에 911의 기억은 아직 생생했다.

그런데 본토 내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계획한 무슬림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일반 시민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영국 외무부장관이 파키스탄을 방문하는 것이 이틀 후라고 했던가요?”

“맞네. 이왕 무샤라프에게 선물하려면 그 전에 주는 것이 좋겠지.”

나는 잠시 과연 무샤라프라 무슨 선물을 가장 좋아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생각할수록 결론은 한가지였다.

“국제적으로 무샤라프 대통령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신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영국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래서 자네도 영국 정부가 무샤라프의 재선 이후 파키스탄의 영연방 자격 정지를 풀어주는 것을 제안한 것 아닌가.”

“그럼 파키스탄 내부적으로 가장 원하는 게 뭘까요?”

내가 물었다.

“그야···. 아마도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

“글쎄요. 무샤라프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릴 것으로 생각할까요?”

“아니라고 생각하나?”

“예. 여러 가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샤라프는 파키스탄군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은 1999년 상반기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벌어졌던 카길 전쟁의 여파였다.

당시 카슈미르의 카길을 점령했던 파키스탄군은 인도군과의 전투에서 초반에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인도는 파키스탄보다 여섯 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결국 파키스탄군은 점령했던 카길을 포기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문제는 당시 카길에서 후퇴한 것을 패배로 받아들인 군부의 반발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나와즈 샤리프는 이런 군부의 반발을 카길 전쟁을 지휘했던 당시 군 참모총장이었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현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책임을 지워 해임하려고 했다.

당연히 무샤라프는 반발했고 샤리프 총리가 외국에 나간 사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무샤라프의 쿠데타에 파키스탄 군부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파키스탄 군부는 카길 전쟁의 패배가 파키스탄군 때문이 아니라 샤리프 총리를 비롯한 정치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파키스탄 군부 입장에서는 무샤라프는 오히려 군의 명예를 지켜 준 셈이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파키스탄 군 정보부와 카슈미르 민병대도 최근에 완전히 장악했지.”

말을 마친 이반 부카드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작년 말부터 파키스탄 내에서 가장 강한 조직이라는 파키스탄군 정보부가 완전히 무샤라프 손에 들어갔다.

작년 말 파키스탄 군 정보부 간부 습격 때문에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인도 국회의사당 습격 때는 카슈미르 민병대의 자금 흐름을 차단했다.

이번 군 캠프 직후에는 카슈미르 민병대를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영향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훈련 캠프를 폐쇄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에 내가 제안했던 작전이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었다.

“저는 작전을 계획한 것일 뿐 그걸 실제 실행에 옮기는 데는 부지부장님이 큰 역할을 하셨죠.”

“그것도 그렇군. 그러면 나도 무샤라프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협조해서 그의 독재를 도운 셈인가?”

이반 부카드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쾌했다.

나도 모르게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내 얼굴을 이반 부카드가 말을 이었다.

“내가 신입 요원일 때 예전 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독재자를 도와주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하는 게 그 일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만약 이반 부카드가 독재를 도왔다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건 결과적으로 그런 것이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습니까!”

내가 말했다.

나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네가 아니라면 아니겠지.”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죠.”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하긴,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기는 하지.”

고개를 끄덕인 이반 부카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네는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무샤라프가 파키스탄 내부적으로 가장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같은 무슬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연합군을 돕는다는 배신자 이미지 아니겠습니까?”

“배신자라······ 하긴 최근 파키스탄 내부의 반발 대부분이 그런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 그래서 배신자 이미지를 어떻게 벗어나게 하자는 건가?”

“배신자 이미지는 벗어날 방법은 없죠.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이상, 아니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뭐야?”

“배신자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없지만 조금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일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뭔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다니엘 펄을 납치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사에드에 대한 재판이 거의 끝나서 이번 주에 선고가 있습니다.”

내가 다니엘 펄의 이름을 언급하자 이반 부카드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니엘 펄이라······. 그러고 보니 그 친구가 죽은 지도 넉 달이나 지났군.”

예전 둘의 모습을 봤을 때 이반 부카드와 다니엘 펄은 꽤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사에드에 대한 판결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떤 판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국무부를 통해서 그에 대한 송환을 요구하죠.”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이미 짐작하겠지만 다니엘 펄을 죽인 것은 사에드가 아니네. 사에드는 오히려······.”

이반 부카드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사에드는 파키스탄군 정보부 그리고 영국 정보부 그리고 CIA와 관련이 있었다.

테러리스트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일한 스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판결에서 사형이 나올 가능성은 없었다.

“어쨌든 사에드를 국내로 송환할 수는 없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국무부를 통해서 강하게 송환을 요구하고 그런 우리의 요구를 무샤라프 대통령이 거부한다면요?”

내 이야기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무샤라프에게 본국의 요구에도 자국민을 보호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인가?”

“예.”

“나쁘지 않은 계획이군.”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는데 더 들어 보시겠습니까?”

“이야기해 보게.”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리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배신자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한 계획을 의논했다.

이반 부카드는 물론이고 나도 예전 과거의 CIA 요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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