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38화 (239/270)

(238)

#239. 경험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없다

1.

이반 부카드와 헤어진 후 홍콩으로 돌아왔다.

홍콩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웠다.

미국 국적으로 한국에 머무는 내가 홍콩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내 재산 거의 전부가 이곳 홍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홍콩에 왔을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W&R의 리안 사무실을 찾아갔다.

“어, 왔어?”

리안은 내가 사무실에 들어온 것을 보고도 한번 돌아보고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최근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세계 주식 시장은 월드컴의 회계 부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잠시 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만하고 이리로 와서 앉지! 어차피 모니터 들여다본다고 주가가 오를 리도 없잖아.”

내가 말했다.

리안이 모니터를 보고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통 하락하는 주식시세에 답답한 듯했다.

리안은 걸어와 소파에 덥석 주저앉았다.

“어디까지 떨어지는 건지······. 911 테러 때보다 더하네.”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는 단기적인 충격이고 이번에는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는 문제니까. 까놓고 지금 회계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회사가 어디 있어.”

엔론이 회계 부정으로 걸렸을 때는 물론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엔론 회사 하나만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이어 터지는 회계 부정에 관한 이야기는 전반적인 회계감사에 대한 부정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특히 엔론과 월드컴처럼 인수 합병으로 성장한 거대 기업들은 거의 전부가 미국 금융 규제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거나 받을 예정이었다.

미국의 거대 기업들 상당수가 인수 합병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끝이 어딘지 모를 터널이었다.

“이건 미국 대통령과 재무부장관이 나서서 경제가 좋다고 해도 효과가 없어.”

리안은 얼마 전 부시 대통령과 폴 오닐 재무부장관의 말을 언급했다.

두 사람은 미국의 경제는 튼튼하며 지금의 시장 분위기는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해결될 상황이면 그게 문제겠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경제가 안전하다고 이야기해 봐야 공허한 이야기지.”

내가 말했다.

“일단 월드컴부터 어떻게 해결돼야 할 텐데······.”

“그건 그렇지. 그래도 우리는 돈을 벌어들이고 있잖아.”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세계 주가가 내려가고 있었지만, W&R은 그 기간 오히려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월드컴 회계 부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인 지난달부터 주요 주식시장에서 하락 포지션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경제 상황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이건 돈을 벌어도 기분이 좋지 않네.”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로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리안은 나와는 달랐다.

나도 이왕이면 경제가 좋아서 주가 상승으로 돈을 벌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 상황이 나쁜 것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경제란 상승이 있으면 하락이 있고 다시 상승하는 주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그것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안은 아무래도 동아시아에 태어나서 살다 보니 경제가 계속 성장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다른 점은 사회에 대한 인식이었다.

리안은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게 1년 사이에 갑자기 부자가 된 나와 오랜 전통을 가진 명문가의 후손인 리안과의 근본적인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런 리안의 모습을 볼 때 어딘지 모를 열등감이 느껴졌다.

뭔가 내가 근본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런 말들은 부잣집 도련님의 속 모르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투자회사 사람들이 네 말을 들으면 아마 너를 때려죽이고 싶어 할걸.”

“그런가?”

리안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아니겠어? 당장 이번 하락의 배경인 월드컴 주주들이나 직원들은 몇 년 사이에 알거지가 됐잖아. 지난주에만 모건 스탠리가 직원 20% 추가 감원을 발표했고 말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당 60달러가 넘었던 월드컴의 주식은 지금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월드컴이 직원들도 직원 연금이 월드컴 주식에 투자된 상태였기 때문에 해고당하면 말 그대로 맨몸으로 쫓겨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2년 동안 세계 경제가 어려웠지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회사들은 정보통신업체와 금융기관들이었다.

“하긴 최근에 직원을 채용하려고 알아봤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지원자 수가 엄청나. 전 세계 상위 30개 대학 출신에다가 골드만삭스나 모건 스탠리 제이피 모건 출신 아니면 서류 면접에서 탈락할 정도야.”

“어떻게 알기는. 직원들에게 뿌린 보너스가 얼마인데 그게 소문이 났겠지.”

최근 우리는 W&R의 기존 직원들에게 다시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어차피 지급하지 않으면 세금으로 나갈 것 미리 보너스로 지급한 것이었다.

홍콩이 동아시아 금융 중심지라고는 하지만 금융계에서 일하는 직원 그중에서도 엘리트라고 불릴 사람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알음알음 서로 아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큰돈을 벌게 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티가 나게 마련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곳에 돈을 쓰지 않더라도 말투부터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급한 보너스 액수를 생각하면 소문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덕분에 이번에 꽤 괜찮은 직원들이 들어올 것 같아.”

“그래야지. 굳이 6월 말에 보너스를 준 이유 중 하나는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지급한 것이잖아. 앞으로 점점 더 투자 규모가 늘어날 텐데 지금처럼 다른 투자회사들이 대규모 구조 조정을 할 때 인재를 끌어 와야 해.”

“그렇지, 언제까지 너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 겸사겸사 우리가 팀장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발도 줄이고 말이야.”

6월 말로 류오린을 그만둔 리안과 조민 그리고 브레이크는 지금 모두 W&R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예전과 하는 일은 같았다.

하지만 그전에는 류오린 소속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팀장이 된 것이다.

6월 말에 보너스를 지급한 이유는 이들이 7월부터 정식으로 W&R에 입사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하던 일은 그대로고 소속만 바뀌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존 W&R 직원들 처지에서는 형식상으로는 외부인들이 팀장직을 맡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브레이크였다.

리안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직원들도 리안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리안 가문이 W&R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무엇보다 대표인 카이 황이 리안 가문의 가신이었다.

조민의 경우는 조민의 집안도 집안이지만 리안과 결혼할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답은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브레이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브레이크는 리안과 친한 사이이기는 했지만, W&R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홍콩 금융가인 센트럴의 많고 많은 젊은 직원 중 하나였다.

조민 같은 집안 배경도 없었다.

회사 주인인, 아니 정확하게는 주인으로 알려진 리안이나 그 약혼녀와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당연히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고 운이 좋은 것뿐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팀원들 관리를 위해 정식으로 취임하기 전에 보너스를 지급한 것이었다.

취임 전에 보너스를 준다고 해서 그런 말들이 사라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류오린을 퇴사하고 미국 대사관에 들어간 나는 물론이고 리안과 조민 그리고 브레이크 현 팀장들은 당연히 그 보너스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W&R에서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6월까지 류오린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류오린을 퇴직하면서 류오린 쪽에서 엄청난 보너스를 받았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이제 됐으니 정확한 투자 현황에 대해 말조심은 시켜. 정확히 W&R이 어떤 실적을 냈는지는 말조심을 시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나는 것과 정확히 얼마나 벌었는지 알려지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야.”

“이미 6월 말에 보너스를 지급하면서 직원 모두에게 보안서약서를 받았어. 추가로 직원들에게 밖에서 말조심도 시켰고······.”

사람들은 누군가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 사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내가 투자로 거액을 잃는 와중을 다른 사람이 반대로 거액을 벌어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움보다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해 자책을 하겠지만 결국에는 상대가 자신의 돈을 가져갔다고 느끼거나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W&R도 마찬가지였다.

나나 리안도 놀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데 시기와 질투가 없을 리가 없었다.

“여전히 홍콩 금융 당국에 우리에 대한 투서가 들어오고 있다면서?”

“그렇지 뭐······. 최근에 한두 달 사이에 더 늘었다고 하더라고.”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봐야 홍콩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홍콩 항센 지수에 대한 투자가 전부잖아. 홍콩 금융 당국이 조사할 근거 자체가 없지.”

작년부터 W&R의 수익률이 비정상이라면서 조사를 촉구하는 요구는 많았다.

듣기로는 주로 항셍 지수가 떨어져 W&R이 선물 매도 포지션으로 이익을 얻었을 때 투서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이런 투서들과 조사 요구를 지금까지 막아온 것이 바로 리안과 카이 황 그리고 무엇보다 류오린 회사였다.

W&R의 투자는 류오린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었다.

W&R의 투자를 조사하려면 류오린을 조사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류오린의 지분 절반 주인은 중국에 있었다.

명목상 지분의 주인은 중국의 국영기업들이지만 실제 그 지분은 상하이방과 공청단 그리고 태자방이었다.

더구나 우리 투자와 관련이 없는 거래 대부분은 중국 지도부와 관련이 있었다.

이걸 조사하는 것은 홍콩 금융 당국이 아니라 중국 정부 더 나아가 미국 정부도 불가능했다.

미국 정부가 만약 이걸 건드리면 그건 중국 정부와 대놓고 싸우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W&R의 투자 중에는 류오린과 관련이 없는 거래도 있었으니 홍콩 금융 당국이 조사하려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홍콩에 기반이 없는 내가 대표였다면 진작에 조사를 받고 그러다가 나에 대한 이런저런 비밀이 드러났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리안 집안이 가진 힘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리안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류오린을 통한 거래가 그 나름의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권력자들은 W&R의 이름이 너무 드러나서 사람들의 관심을 너무 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우리 거래로 류오린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류오린의 목적은 중국의 권력자들이 뇌물을 받고 그렇게 받은 뇌물을 해외에 안전하게 빼돌리는 통로였다.

아무리 W&R이 벌어 주는 돈이 많다고 해도 본래 목적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더 규모가 커지면 모를까.

중국 권력자들의 눈에 벗어나는 순간 지금 W&R 정도 규모의 투자회사는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었다.

지금은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2.

나는 리안의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이렇게 한꺼번에 모인 것은 오랜만인 것 같네요?”

내가 말에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몇 달 만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브레이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브레이크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류를 나눠 주고 있는 여성을 보며 말했다.

“거기 카렌 양은 정말 오랜만이고요.”

“팀장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동안 오셨을 때마다 제가 매번 운영팀 사무실에서 근무하느라 뵙지 못해서 아주 아쉬웠어요.”

내 말에 카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카렌은 예전 내가 3팀의 팀장으로 채용한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다른 3팀 사람들보다 몇 달 앞서 올 초에 이미 W&R로 이직했다.

“그러게요. 저도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부팀장이신데 직접 서류를 나눠 주시는 건가요?”

내가 말했다.

카렌은 처음 채용될 때만 해도 단순한 업무 보조를 하는 여직원이었지만 지금은 운영팀의 부팀장이었다.

“지금까지 투자 회의 때마다 쭉 해 온 일인걸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고요.”

카렌이 대답했다.

“보안 때문에 카렌 부팀장이 계속 맡고 있습니다.”

카이 황이 덧붙였다.

“하긴······.”

나는 두 사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열리는 투자 회의는 W&R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다음 일주일 투자 방향이 결정되는 만큼 보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직 회의 결과가 밖으로 유출된 적은 없었다.

일단 지금까지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카렌은 믿을 수가 있었다.

경험이 검증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카렌은 그렇게 비밀을 지킨 대가로 부팀장이라는 직책 이상을 얻었다.

직책은 부팀장이지만 대표인 카이 황은 물론이고 실세라고 할 수 있는 팀장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어느 회사나 그렇지만 간부급 직원이 사주 일가와의 친분이 있을 때는 그 조직은 그 간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카렌은 운영팀의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다른 직원들은 모르지만, 카렌은 W&R의 전체 직원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투자에 관여하지 않는 직원 중에서는 최고 연봉이었다.

이것도 경험에 따른 결정이었다.

대가를 보답받지 않는 믿음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경험 말이다.

나는 카렌에게서 시선을 떼고 리안, 카이 황, 조민, 브레이크를 한 사람씩 돌아보았다.

“이미 말했지만 이렇게 다시 모인 분들을 보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반갑네요.”

회의 참석자 중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온 조민이 들어올 때도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투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회의 시작하죠!”

불완전하지만 W&R로 독립하고 첫 번째 여는 회의였다.

투자자로서 내가 한 걸음 더 내딛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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