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39화 (240/270)

(239)

#240. 현실이 소설을 뛰어넘는다

7월 22일 화요일 아침.

리안은 피곤한 눈으로 S&P 지사와 나스닥 지수 선물거래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국 증시 개장 시장에 맞춰 선물거래를 하느라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미국의 주식시장은 닫혔지만, 선물거래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물론 주식시장이 폐장한 이후의 선물거래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선물거래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아직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흐름이 유지되자 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선물거래의 흐름은 S&P나 나스닥 모두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리안이 의자에 기대 잠시 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카이 황이 들어왔다.

카이 황을 본 순간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리안과 카이 황은 소파에 다가가 마주 보고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이 황이었다.

“이번에도 에드릭 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가가 흘러가는군요.”

카이 황의 말에 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과 중앙은행이 나서도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던 세계 증시가 정작 월드컴이 파산 보호 신청을 하자마자 이렇게 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미국 시각으로 7월 21일 월요일인 어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시가총액 1천억 달러가 넘었던 월드컴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엔론에 이어서 회계 조작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몇 달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월드컴이 회계 조작으로 부풀린 영업이익은 인정한 것만 30억 달러가 넘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는 것이 대부분의 예상이었다.

파산 보호 신청한 월드컴이 갚아야 할 공식 부채만 300억 달러가 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월드컴이 파산 보호 신청을 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 달 넘게 바닥을 모르겠다는 듯이 떨어지던 미국 증시가 거짓말처럼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난 한 달 넘는 전 세계적인 주가 하락의 시작이 월드컴의 회계 조작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월드컴의 파산 보호 신청으로 아무리 불확실성이 제거됐다고 하지만 너무나 극적인 반전이었다.

미국 시장만이 아니었다.

월드컴 파산 보호 신청이 알려진 순간 개장해 있던 거의 모든 주가가 상승했다.

이런 극적인 반전 순간에 많은 투자자가 제대로 대비를 못 하고 허둥지둥했다.

하지만 W&R은 예외였다.

W&R은 이미 주요 주식시장에서 직전에 모든 숏 포지션을 청산하고 롱 포지션으로 전환해 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다른 투자자보다 빨리 포지션을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에드릭의 투자 전략 때문이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에드릭 님이 주가 흐름을 보는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큰 수익을 내는 회사 대표의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에드릭의 예상이 맞는 것은 주가 흐름만이 아니죠.”

카이 황의 말에 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리안도 표정이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치나 외교에 대한 전망도 지나고 보면 거의 맞더군요. 매주 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증시 전망에 대한 예상이 더 눈에 띌 뿐이죠.”

“어디서 정보를 따로 받는 것도 아니고······.”

“물론 따로 정보를 얻은 통로가 있는 것 같지만 누가 미래 주가를 에드릭처럼 정확히 예상합니까. 에드릭을 보기 전에 다른 사람이 그런 사람이나 기관이 있다고 이야기했다면 헛소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건 그렇죠.”

카이 황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정보가 있더라도 에드릭 정도의 주가 예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렇게 오래 한 사람에게 끌려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을 하다 말고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몇 년 사이에 가세가 주춤했다고는 하지만 홍콩에서 첫 번째 갔던 가문이 겨우 한 사람을 감당하는 것을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답답하네요.”

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걱정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동업자가 너무 뛰어나서 그걸 걱정해야 한다니······.

에드릭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리안이 아무것도 없던 에드릭과 손을 잡은 것은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는 정도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처음 에드릭이 나스닥에 정신 나간 레버리지로 선물과 옵션 거래해서 거액을 벌었을 때는 단순히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파생 상품에서 몇십 배의 대박을 내는 경우는 능력보다는 운인 경우가 많았다.

선물이나 옵션은 내가 이익을 보면 다른 사람은 손해를 보는 투자였다.

누군가 단기간에 몇십 배의 대박을 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합리적으로 투자하는 투자자들의 투자와는 반대되는 투자를 했다는 의미였다.

리안이나 카이 황 모두 에드릭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식 투자가 계속 성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함께 W&R을 세우고 나중에 투자까지 한 것은 에드릭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에드릭을 얻는 대가로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할 생각이었다.

W&R이 지금처럼 성공할 줄 알았다면 겨우 지분 10%가 조금 넘는 지분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할 자신이 있었다.

작년 카이 황은 리안이 현물 투자할 때 연말에 자산 재평가를 통해 지분을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었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리안이 출자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자산 재평가를 통해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리안이 출자한 홍콩의 부동산 가격은 두 배 정도 상승했지만 911을 거치면서 현금 투자액은 그 몇 배가 늘어났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W&R에 투자한 리안과 카이 황의 지분 가치가 리안 가문의 다른 재산보다 많아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건 W&R을 리안이 더는 가문의 힘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정확하게는 에드릭을 리안은 물론이고 리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인 가문이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연말까지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에드릭에게 앞으로도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중국 상하이방의 요구에도 버텼던 우리 가문이 한 사람에게 끌려가게 된다는 말이죠.”

리안이 말했다.

지금까지 리안의 가문은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오대 전에는 군벌의 압박에 맞서 홍콩으로 기반을 옮겼다.

그리고 비록 캐나다로 쫓겨나기는 했지만, 리안의 아버지는 홍콩인들의 이권을 지켜 내기 위해 중국 정부의 부당한 압력에 맞섰다.

그런 압박도 버텨 냈던 가문이 자신의 대에 이르러 한 사람에게 끌려 다니게 될 위기였다.

리안은 에드릭을 친구로 생각했고 그의 능력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W&R의 지분 가치가 가문의 다른 재산을 넘는다는 것은 더는 리안이 에드릭과 동등한 상대가 아니게 된다는 의미였다.

“지금이야 저나 도련님을 방패로 내세우지만 지금 성장 추세라면 홍콩 정부가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리 먼 미래가 아니죠. 이번 해 안에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빠르면 당장 반년 후인 연말 정도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에드릭이 직접 나설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W&R은 리안 가문이 외국에서 투자를 받아서 세운 회사로 알려져 있었다.

높은 투자 수익률이 소문이 나면서 리안의 가문은 완전히 재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에드릭이 직접 나서게 된다면 그 순간 이런 평가는 비웃음으로 바뀔 것이다.

“예. 지금까지 에드릭 님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직접 나설 것 같지는 않지만, 완전히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게 11월까지니까요.”

카이 황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상대의 호의에 기대는 관계는 더는 동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그전까지 에드릭이 우리를 버릴 수 없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에드릭이 홍콩을 떠난 후에도 W&R이 가진 영향력을 우리가 그대로 가질 수 있으니까요.”

리안이 카이 황을 보며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뭘 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곳 홍콩에서만이라도 가문이 에드릭과 계속 동등한 위치에 서려면요?”

리안이 말했다.

리안은 언제까지 에드릭과 함께 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드릭이 계속 있기에는 홍콩은, 아니 동아시아는 너무 작았다.

그는 언젠가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미국으로 떠날 사람이었다.

그때가 되면 리안이나 가문은 더는 에드릭에게 필요가 없었다.

리안의 가문은 홍콩이나 아시아를 벗어난 후에는 에드릭에게 도움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홍콩에서부터 에드릭에게 뒤처지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선 회사에서 에드릭 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에드릭 님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에드릭 님이 아무런 투자 방향을 알려 주지 않으면 다음 주 투자부터 막힐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직원을 계속 뽑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으로는 부족합니다. 앞으로는 직원들 채용할 때 정리 해고된 직원들뿐 아니라 우수한 인재를 스카우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W&R의 명성이라면 동아시아에서는 꽤 매력적인 투자회사니까요.”

W&R은 홍콩은 물론이고 도쿄 그리고 싱가포르까지 아시아 금융권에서는 떠오르는 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비록 골드만삭스 아시아 지부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도 W&R에서 이직을 제의하면 한 번쯤은 고려할 정도까지 올라온 것이다.

“좋네요. 그렇게 고용한 직원들이 자리를 잡으면 선물 투자에 집중된 투자를 채권이나 유망 기업에 대한 투자까지 확대하자고 에드릭에게 건의할 생각입니다. 에드릭이라도 그런 투자까지 관여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죠.”

“하긴 아무리 에드릭 님이 뛰어나시더라도 그런 투자까지 일일이 직접 관여할 수는 없겠죠.”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W&R의 투자에서 에드릭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줄일 생각입니다.”

“그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지금 하는 파생 상품 투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제 W&R의 파생 상품 투자는 그 투자 자체로 파생 상품 가격에 영향을 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W&R의 투자금도 늘어났지만 높은 투자 수익률이 소문이 나면서 W&R의 투자를 따라 하는 회사들이 꽤 있었다.

결과적으로 조금씩 투자 수익률에서도 손해를 보고 있었다.

아직은 큰 차이가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몇 달 안에 자금이 있어도 원하는 만큼 선물 계약을 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은요? 그 정도로는 부족해 보이는데요.”

리안이 말했다.

“다른 방법은 W&R 밖에서 에드릭 님이 할 수 없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요? 정확히 어떤 일을 말하는 겁니까?”

리안이 물었다.

“중국 본토에 투자해서 가문의 영향력을 더 키우는 거죠. 에드릭 님은 미국인입니다. 물론 중국 지도부가 외국인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지만, 외국인 투자는 한계가 있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제약을 벗어나서 중국 본토에 직접 투자하거나 기업에 투자할 수가 있습니다. 본토에 대한 이런 투자는 결국에는 본토는 물론이고 홍콩에서도 우리의 영향력을 키울

겁니다.”

“본토에 대한 투자라면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 종가가 있는 저장성에 대해 투자만 해도······.”

“저장성은 물론이고 광둥성에도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둥성이라······.”

홍콩인들 상당수가 광둥성 출신이지만 리안의 종가는 저장성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홍콩의 다른 유력 가문들과는 달리 리안 가문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주로 저장성에 투자해 왔다.

“홍콩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광둥성이고 광둥성에서 우리의 영향력이 커지면 그건 바로 인접한 이곳 홍콩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겁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말을 마친 카이 황은 리안을 바라보았다.

광둥성에 대한 투자는 지금까지 가문의 방침과는 다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리안 가문의 본토에 대한 투자는 수익보다는 가진 부를 고향에 환원한다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리안이 카이 황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제안을 받아들이자마자 카이 황이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제가 조사한 광둥성의 유망 기업들입니다.”

이익이 될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가문의 방침 때문에 투자하지 못했던 기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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