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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선의가 보답받는 것은 동화 속 세상뿐이다
1.
나는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엘리어스를 찾아갔다.
엘리어스가 부탁한 일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친구분 일은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해결했다는 내 말에 엘리어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예. 내일 석방된다고 합니다.”
“나도 따로 알아보니 꽤 일이 꼬인 것 같던데······ 어떻게?”
엘리어스가 물었다.
“상대 남편이 항의를 멈추고 공안에서도 성매매가 아니라 불륜으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친구분께 연락이 오면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게 전부인가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엘리어스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되물었다.
“그렇죠. 없겠죠.”
나는 지갑에서 영수증 하나를 꺼내 엘리어스에게 건넸다.
“이번 일에 들어간 비용 영수증입니다.”
“영수증요?”
“예.”
“부탁을 한 일이니 당연히 비용은 내가 지급해야······.”
영수증을 본 엘리어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뭔가요?”
“이번 일에 들어간 비용 영수증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3만 달러요?”
“다행히 아는 변호사가 있어서 어느 정도 할인을 받은 가격입니다.”
내 대답에 엘리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남편을 설득하는데 꽤 돈이 많이 들었나 보네요.”
“설득하는 것보다 찾은 것이 더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변호사 말로는 탐정만 세 곳을 고용해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엘리어스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수표책을 꺼내 수표를 써서 내게 건네주었다.
“3만 달러입니다.”
씨티은행의 수표였다.
나는 엘리어스의 수표를 그대로 지갑에 넣었다.
“그건 그렇고······ 홍콩에서 차기 지도부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새로운 소식요?”
엘리어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쩌민은 공산당과 중국 정부 그리고 중국 군대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중앙당 당서기이면서 중국의 국가주석이고 동시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임순을 만났다.
상하이 사정에 밝은 임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건 장쩌민이 후계자인 후진타오에게 이 모든 직책을 한 번에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11월에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직위를 넘기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어느 정도는 짐작한 일인 듯 보였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였다.
우선 공산당을 장악하고 그 공산당을 통해서 정부와 군을 장악하는 구조였다.
중국은 형식적으로 보면 내각제 국가와 많은 점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집권당인 자민당의 총재이면서 일본 정부의 총리인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형식만 비슷할 뿐이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아니죠.”
“그건 그렇죠.”
덩샤오핑은 1989년 이후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직책도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실질적인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다.
제도를 뛰어넘는 권위를 통한 지배였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덩샤오핑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장쩌민은 혁명 원로도 아니었고 덩샤오핑 정도의 권위도 없었다.
자리를 잃는 순간 힘의 대부분을 잃을 수도 있었다.
공산당 내부에서 기반이 약한 장쩌민과 상하이방으로서는 권력을 공청단에 모두 넘겨줄 수가 없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은 넘겨야 할 테고······. 그럼 국가주석직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나중에 넘기는 건가요?”
“총서기직을 넘기지 않을 수는 없겠죠.”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당연히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이었다.
공산당을 통해 중국 정부를 운영하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는 장쩌민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장쩌민 주석이 모든 자리를 후진타오 부주석에게 다 넘기지 않은 게 확실하다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지겠네요.”
“그렇겠죠. 당장 차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나 상임위원 구성부터 달라질 테니까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기관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곧 중국 정부의 정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중국 정치권력의 핵심 기관이었다.
중국 권력 핵심 중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아홉 명이었다.
장쩌민이 11월 당서기만 넘기고 다른 직책을 계속 유지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었다.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다 내 주지 않음으로써 정치국 위원과 상임위원에 자기 사람을 넣으려는 목적인 것이다.
“아까 사실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어느 정도 확신하죠?”
엘리어스가 물었다.
내가 이미 확실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런데도 다시 묻는 것은 이번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거의 99%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알아보니 이미 상하이는 물론이고 베이징에도 공공연하게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뭔가 조치가 있었겠죠.”
아무리 임순이 상하이 사정에 밝다고 해도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부 교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홍콩에 있는 그에게까지 들어올 정도라면 이미 상하이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봐야 했다.
오기 전 내가 다시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이런 내 생각은 사실이었다.
‘장쩌민 주석이 후진타오 부주석에게 모든 직위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소문이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소문이 사실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일도 아닌 중국 최고 지도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실이 아니라면 진작에 중국 정부에서 나서서 단속했을 것이다.
“소문이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소문의 출처가 장쩌민 주석이나 상하이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후진타오 부주석과 공청단에 대한 일종의 경고죠. 우리는 너희에게 권력을 다 내 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헛된 욕심 부리지 말아라!”
“그럴듯한 이야기네요.”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본국 정부는 물론이고 우리도 장쩌민이 완전히 권력을 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리를 다 넘기지 않을 거라고 못 박을 줄은 몰랐네요.”
“아무래도 장쩌민 주석은 물론이고 상하이방 자체가 찔리는 구석이 많으니까요.”
이른바 중국 3대 정치 세력 중에서 상하이방은 가장 취약한 세력이었다.
혁명 원로의 후손도 아니었고 공산당에서 성장한 세력도 아니었고 덩샤오핑이 중국 경제를 개방하면서 기업체에서 영입한 세력이었다.
약간 이상한 이야기지만 공산당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용한 용병에 가까웠다.
중국의 경제 개방과 경제 발전 과정에서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축적했지만 물러난 뒤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기 지도부에 대해 지금까지 짜 놓은 전략 자체를 전부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알기로는 기존 정책은 차기 지도부가 공청단을 중심으로 운영될 것으로 생각하고 대책을 세웠었다.
“장쩌민 주석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이상 그 전략은 수정될 수밖에 없죠. 공청단은 중국공산당의 엘리트 조직이기는 했지만 구성원들이 말 그대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관료적인 성격이 강하니까요.”
나는 엘리어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에 반해 장쩌민 주석은 권력 투쟁에 관한 한 무패를 자랑하죠.”
천안문 진압으로 개혁파를 몰아냈고 그 이후에는 천안문 진압을 함께한 보수파와 양가장으로 대표되는 군부를 몰아내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말대로 권력 투쟁에 관한 한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상대가 될 수 없겠군요.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하나······.”
엘리어스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국 대통령 지금 상황을 보면 장쩌민 주석이 잘 생각한 거죠. 한국 대통령은 총리 하나 임명하지 못할 것 같더군요.”
내 말에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한국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는 신임 총리의 국회 비준 여부였다.
월초에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총리가 임명에 성공하지 못하고 낙마할 위기였다.
2년 전 한국은 총리에 대한 국회 청문회를 도입했고 이번 총리는 그 첫 번째 대상자였다.
그런데 바로 그 첫 번째 대상자부터 낙마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긴 우리 대사관에서도 총리가 국회 비준을 받지 못할 것 같다고 낙마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당도······ 아니, 탈당했으니 이제 여당도 아닌가? 하여간 한국 정치인들을 만난 직원들 말에 의하면 총리가 국회에서 비준될 가능성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으로서는 말 그대로 엄청난 타격이었다.
이번에 임명된 국무총리는 레임덕에 처한 대통령으로는 나름의 승부수였다.
최초의 여성 총리였고 이번 정부의 이전 총리들이 정치인이었던 것에 비해 대학 총장 출신이었다.
하지만 청문회에서 나온 위장 전입이나 자식들의 국적 문제, 재산에 관한 논란으로 야당이 국회 비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한국 정치인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조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대사관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 정치인 중에서 재산 문제나 위장 전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야당도 그런 사실을 몰라서 인준을 거부한다기보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여당에 대해 기선 제압을 하는 목적이었다.
여당, 정확하게는 여당이었던 정당도 총리 후보의 국회 비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당의 중심인 차기 대선 후보가 선거를 앞두고 측근과 아들들의 비리로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60년대 중후반부터 30년간 야당의 중심이었던 현 대통령이 이런 처지가 될 줄 예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현 대통령이 이런 상황에 부닥친 이유 중 하나는 아들의 비리도 비리지만 당내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여당의 총재 자리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 주석이 당서기 직을 넘겨준 이후에도 권력에 집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현실 세상은 동화 속 세상이 아니었다.
선의로 한 일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본인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2.
우리 예상처럼 한국의 총리 후보는 결국 사퇴했다.
한국 대통령이 레임덕이나 식물 대통령이 아니라 허수아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일종의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엘리어스와 나는 그 뉴스를 들으며 브루나이 향했다.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 지역 안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북한 관련 문제로 주한 미국 대사관에 관련자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진 한국을 빼고 북한과 회담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북한 사정에 정통한 주한 대사관 직원을 불렀다.
그 직원이 바로 얼마 전까지 북한 관련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엘리어스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을 만나러 간 것은 엘리어스뿐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동행한 것뿐이었다.
“어서 오게.”
이반 부카드였다.
인도와 파키스탄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져서인지 그의 표정은 얼마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가 없다면 나를 브루나이까지 부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브루나이까지 오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일이 있다면서 거부했다.
CIA도 그만둔 마당에 끌려다닐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이라는 말과 부탁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도대체 여기까지 부를 정도로 큰 문제가 무슨 일일지 걱정부터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