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41화 (242/270)

(241)

#242. 답은 정해져 있다

이반 부카드와 만난 나는 그를 따라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열었다.

가방에는 정체 모를 전자 장비가 들어 있었다.

이반 부카드는 전자 장비를 가동해 무언가를 확인했다.

확인을 마친 다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가방을 닫았다.

“그건······?”

내가 물었다.

“도청 확인 장치네.”

이반 부카드가 대답했다.

그는 가방을 탁자 아래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나도 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내가 다음 달 말에 곧 다른 그룹으로 갈 것 같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다른 그룹이라면?”

“중동, 북아프리카 그룹(MENA)로 갈 것 같네.”

“아, 역시······.”

“자네도 예상한 일인가 보군.”

“예. 지금 같은 시기에는 유능한 요원이 가장 필요한 곳이니까요.”

이반 부카드는 나이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지만, 베테랑 요원이었다.

동아시아로 오기 전 80년대는 유럽에서 활약했고 90년대 초 걸프전 당시에는 중동에서 활약했다.

한마디로 CIA 작전 요원 중에서 최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중동 사정에 밝은 베테랑 요원이 동아시아 지부에 언제까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그는 예전에 파키스탄 지부로 한 번 이동할 뻔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었다.

아직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 분쟁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건 CIA가 아니라 백악관과 국무부가 해결할 일이었다.

이반 부카드가 중동 북아프리카 그룹으로 옮겨가면 나도 완전히 손을 뗄 생각이었다.

“중동으로 가시면 고생 좀 하시겠네요.”

나는 중동으로 가게 된 이반 부카드에게 동정이 갔다.

“나도 그 생각을 하면 벌써 답답하네.”

“지금 거기가 좀 그렇죠.”

“자네도 백악관과 국방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다음에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것은 알고 있을 거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죠.”

“백악관과 국방부는 911 직후부터 알 카에다 배후에 이라크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더군.”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세속주의 국가인 이라크가 원리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알 카에다의 배후라니요. 차라리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더 가능성이 크겠네요. 물론 그것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요.”

“문제는 백악관을 비롯한 현 정부 요직에 있는 관계자들은 알 카에다 같은 테러단체가 단독으로 911 같은 일을 벌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배후를 억지로 찾다 보니 가장 유력한 국가가 이라크이고······.”

이라크가 선택된 이유는 아마도 미국의 가장 최근 전쟁이 바로 이라크와의 걸프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그 걸프전 당시 대통령은 현 대통령의 아버지였고 현 정부 최고위직 중에는 그 당시 이라크전에 관여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이라크가 알 카에다의 배후로 지목된 이유는 당연한지도 몰랐다.

“문제라면 이라크가 알 카에다의 배후라는 증거가 없다는 거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관계가 없는데 증거가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죠.”

원리주의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와 이슬람 세속주의 정부인 이라크는 이슬람이고 미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같을 뿐 거의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그래서 찾은 명분이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도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영국을 제외하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들마저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있고 야당인 민주당도 순순히 전쟁에 동의해 줄 것 같지 않고 말이야.”

대통령과 국무부 장관을 제외하면 미국 외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바로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인 존 바이든 상원의원이었다.

바로 그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인 조 바이든 의원은 며칠 전 이라크 공격의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바로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할 때만 이라크를 공격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한편 독일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 시락 대통령은 이라크 공격은 유엔 결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반 부카드가 중동으로 가서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증거를 찾는 것!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있다고 해도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미국의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렵다고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미 백악관은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답이 정해진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911 테러를 막지 못한 CIA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국토안보부가 생기면서 위상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떨어진 신뢰를 회복할 방법은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찾아서 이라크를 공격할 명분을 백악관에 찾아 주는 것뿐이었다.

만약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다면 증거를 만들기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나로서는 이반 부카드가 중동으로 떠나는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귀찮게 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중동으로 떠날 사람이 왜 나를 여기까지 불렀느냐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마지막으로 일 하나만 도와줬으면 하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대답했다.

귀찮기는 하지만 이제 마지막이라니 어렵지 않으면 해 줄 생각이 들었다.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전에 마무리했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잠시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봤던 이반 부카드가 말을 이었다.

“자네 토미 수하르토 기억하나?”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죠. 토미 수하르토······. 아마 죽기 전까지 잊기 어려울 것 같네요.”

부탁한다면서 갑자기 꺼낸 이름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아들로 내 제안으로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다가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몇 달 전이지만 아직도 가끔 그에게 살해된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고는 한다.

사실 지난 1년 반 동안 내가 제안한 작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토미 수하르토의 일이 생각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인간,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나에게 알려 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토미 수하르토는 검찰총장의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대법관을 청부업자를 보내 살해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런 짓을 벌인 것은 그의 아버지인 수하르토 대통령이 쫓겨난 다음이었다.

당연히 검찰 법원이 당하고 있을 리가 없었고 토미 수하르토는 수배를 당하고 쫓겨 숨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반 부카드를 통해 판사를 매수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나였다.

메가와티를 도와주기 위해 수하르토가 이끌던 골카당과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는가.

토미 수하르토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소수민족 독립운동가와 그 운전사를 살해했다.

더 엽기적인 것은 검시를 위해 자카르타 검시로 보낸 독립운동가의 심장을 중간에 빼돌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빼돌린 심장으로 뭔 짓을 했는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는 이 전 독재자의 아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나와 이반 부카드는 토미 수하르토를 다시 잡아넣어 재판에 넘겼다.

“그 토미 수하르토가 얼마 전에 15년 형을 받았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15년 형요? 생각보다 형이 작네요? 청부업자들은 무기징역 받지 않았나요?”

“여전한 수하르토 가문의 돈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것도 많이 나온 거지. 지금 토미 수하르토가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는 줄 아나? 감옥에 텔레비전과 냉장고는 물론이고 침대도 밖에서 들어왔다고 하더군.”

“호텔이네요.”

“감방에 있는 물건 대부분이 호텔에서 쓰는 것이기는 하다더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느 나라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건 미국이나 영국 독일과 프랑스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심지어 현재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수하르토 대통령을 증오한다는 메가와티 수카르노였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메가와티 대통령도 묵인한다는 소리였다.

“제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토미 수하르토에 관한 일입니까?”

내가 물었다.

이 시점에서 굳이 토미 수하르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반 부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토미 수하르토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자네도 더는 그런 인간 신경 쓸 필요 없네. 더는 본국이나 CIA에게 가치도 없고 자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인간이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토미 수하르토에 관한 일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나를 불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내가 물었다.

“지금 인도네시아 의회는 한창 헌법 개정 작업 중이네. 대통령을 의회가 아닌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 중심이기는 한데······.”

이반 부카드가 말을 흐렸다.

“그런데요? 직선제 개헌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 아니었나요?”

“그렇지. 그런데 순수하게 국민의 투표로만 대통령이 선출되면 좀 곤란해서 말이야.”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곤란하다니요?”

“인도네시아는 최대 무슬림 국가네. 국민의 투표로만 대통령이 선출된다면 다른 국가들처럼 결국에는 무슬림 정당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어.”

“기우 아닐까요? 인도네시아는 무슬림 국가이기는 하지만 중동의 국가들과는 달리 세속주의적인 국가로 알고 있는데요. 당장 재선이 거의 확실한 메가와티 대통령부터가 여자 아닙니까.”

무슬림 국가에서 여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슬람 율법만으로 따지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인도네시아가 세속주의 국가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다른 무슬림 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지만 요즘 인도네시아 상황이 심상치 않아. 911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로 과격파가 급격히 힘을 얻고 있네.”

“요즘 무슬림이 있는 곳은 다 비슷하죠. 듣기로는 본국에서도 무슬림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면서 그 반감에 알 카에다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적으로 무슬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으로 보고 노골적으로 차별하거나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알 카에다에 동조하는 무슬림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악순환이었다.

이건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 국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가장 좋은 것은 현재의 간선제를 유지하거나 아예 내각제로 개헌을 하는 것인데······.”

인도네시아는 독립 이후 대통령제를 유지해 온 나라였다.

갑자기 내각제로 개헌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현재의 간선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인도네시아 국민 대부분은 수하르토의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가 대통령 간선제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죠.”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기존 정당들이 최대한 참여하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방법은 의석수 25% 이상을 가진 정당만이 대통령 후보를 배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25%요? 너무 높은 것 아닌가요? 그 의석수라면 메가와티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항쟁당만이 가능하다는 말인데요?”

지난 선거에서 메가와티가 이끄는 민주항쟁당은 33%의 지지를 받아서 500석 중에서 150석 정도를 얻어 의회 최대 정당이 되었다.

나머지 67%를 수십 개의 정당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그래서 대통령 선거에서 정당들이 연합해서 후보를 내는 게 가능하도록 추진하고 있지.”

이반 부카드의 말대로라면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있는 후보는 최대 네 명 현실적으로는 두 명에서 세 명 정도였다.

부통령 제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러닝메이트로 정당들이 선거 때마다 이합집산하게 계획된 방법이었다.

“그런 제도라면 의회에서 별문제 없이 통과될 것 같은데요? 뭐가 문제죠?”

이반 부카드의 말대로라면 개헌 방향은 현 정당들로서는 기득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내지 못하더라도 자신들이 지지한 연합의 후보가 당선되면 지분을 요구할 수도 있는 제도였다.

“뭐긴 뭐겠나. 국민이 반대하고 있는 거지. 지금 인도네시아는 직접선거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야.”

수하르토의 독재에 지친 국민이 이왕이면 자신들의 손만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문제겠군요.”

메가와티는 현 대통령이자 의회 최대당의 대표이자 차기 재선이 가장 유력했다.

선거 제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지. 메가와티 대통령으로서는 어차피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이런 분위기를 자네가 좀 바꿔 줬으면 좋겠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무슬림이 80%가 넘는 국가에서 이슬람교가 최대한 영향을 주지 않는 선거 제도라니······.

그는 한마디로 직접 선거로 대통령이 뽑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보다는 기득권층의 의사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지는 일단 인도네시아 가서 상황을 좀 지켜봐야 알 것 같네요.”

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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