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42화 (243/270)

(242)

#243 재주 넘는 곰이 되지는 말자

1.

나는 인도네시아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말로 일단 시간을 벌고 이반 부카드와 헤어졌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엘리어스였다.

엘리어스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 둘은 객실 하나를 나눠서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엘리어스는 억만장자의 아들이었고 나는 지난 1년 동안 수십억 달러를 벌었다.

그런 우리가 서로 다른 방을 쓰지만, 호텔 객실 하나에 묶는다니······.

하지만 안보 회의가 열리는 브루나이에는 남은 객실이 거의 없었다.

물론 어디나 그렇듯 돈을 아주 많이 주면 호텔 방을 따로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한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라는 신분인 이상 숙박비로 쓸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방을 잡거나 더 좋은 방을 잡으려면 엘리어스나 내 개인 돈을 써야 했다.

그렇지만 엘리어스는 국무부에서 성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엘리어스가 억만장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내세워서 방을 바꾼다면 어떤 국무부 직원이 좋아하겠는가?

따로 방을 잡고 속일 수도 없었다.

어디에 묵었는지는 돌아가서 한국으로 돌아가 보고해야 했다.

기록에 남는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지금 브루나이에는 국무부 콜린 파월 장관과 그를 수행해 온 국무부 고위관리들이 모여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개 대사관의 직원인 엘리어스가 돈이 있다고 스위트룸을 잡는다면 그건 더는 공직으로 성공하기를 포기한 행동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공직에서 성공할 생각은 이제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어쨌든 엘리어스의 수행원으로 브루나이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 돈을 추가로 지급하고 방을 따로 잡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엘리어스를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2.

내가 방에 들어서자 객실 의자에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던 엘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확인할 일이 있어서 잠시 이야기만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사무관님이야말로 장관님을 만나러 가시지 않았었나요?”

내가 물었다.

“장관님이 북한 외무상과 회담 중이라서 장관 비서에게 이야기하고 돌아왔습니다.”

엘리어스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서 엘리어스와 한 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한국은 빼고 직접 북한과 이야기를 할 생각인가 보군요.”

“보고하면서 들으니 회담이 잘되면 다음 주에 경수로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더군요.”

엘리어스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였다.

마음이 답답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좋아할 일인지 아닌지······.”

좋든 좋아하지 않든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나 같은 이민자의 후손은 떠나온 나라의 위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같은 이민자라도 영국이나 유럽 이민자 후손인 것과 아프리카 국가 후손인 것은 공직 생활을 하는 데나 사업을 하는 데 꽤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이 이렇게 미국에 무시 받는 이상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은 내게 족쇄일 뿐이었다.

한국의 현 대통령은 집권 이후 강하게 추진한 두 가지 정책은 이른바 외환 위기 극복과 남북 긴장 완화였다.

외환 위기 극복은 IMF에게서 진 부채를 모두 갚으면서 정부는 외환 위기에서 벗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카드 사태 같은 외환 위기 극복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가 드러나면서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고 있었다.

현 정부의 다른 정책 측은 이른바 ‘햇볕 정책’을 시행해 북한과의 대화를 강하게 추진하고 남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햇볕 정책’은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성과를 이뤄 내기는 했지만,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바뀐 미국의 외교정책과 서해 해전 같은 북한의 도발로 많이 퇴색한 상태였다.

“그래도 좋아하지 않겠나? 집권당에서 탈당하고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져 레임덕 상태에 빠진 대통령이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남북 대화밖에 없으니······.”

엘리어스가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에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수로 건설이 재개된다면 그건 한국을 배제한 미국과 북한의 결정이었다.

이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이 경수로 사업이라는 것은 비용 대부분을 한국에서 부담하는 사업이었다.

한국의 동의도 받지 않고 미국이 북한과 일방적으로 경수로 건설을 재개하는 것이 바로 한국과 한국의 현 대통령의 처지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경수로 건설 계획 자체가 처음부터 한국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추진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무부가 북한과 경수로 건설 재개를 합의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알기로는 백악관은 경수로 건설의 근간이 되는 제네바 합의를 재검토하는 태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뭐긴 뭐겠습니까? 이라크 때문이지요. 지금 이라크에 대한 핵 사찰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과 연계해서 경수로 건설을 재개하려는 거죠.”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이라크 핵 사찰.

두 가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지지만 실제로는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내가 말한 대로 경수로 건설의 근간은 이른바 미국과 북한이 체결한 제네바 합의였다.

1990년대 초 미국은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는 의심을 하고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 북한이 내세운 핵 개발 목적은 부족한 전력이었다.

미국은 이런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핵 동결의 대가로 북한에 핵무기로 전용할 수 없는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미국은 경수로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은 한국을 압박했고 결국은 한국이 건설비용의 70%를 부담하고 나머지 20%는 일본이 나머지 10%는 유럽연합이 부담하기로 했다.

미국이 부담한 것은 경수로 건설까지 북한에 중유 50만 톤을 공급해 주는 것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백악관과 국무부는 이라크에 핵 사찰을 받도록 압박하기 위해서 북한을 끌어들인 셈이었다.

우리 미국은 핵 개발을 막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하고 있으니 이라크 너도 협조해라······ 뭐 이런 의미였다.

“악의 축으로 지목되어 위기에 몰린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이런 요구를 따라갈 수밖에 없겠네요.”

내 말에 엘리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사람이 아프가니스탄 다음은 이라크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북한이 아니라고 100% 장담할 수도 없으니까요.”

엘리어스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보고 있는 서류는 북한과 관련된 것인가요?”

“국무부 쪽에서 검토해서 기존에 한국 대사관에서 조사했던 내용을 보완해서 보고하라고 하는데······.”

엘리어스가 말을 흐렸다.

하긴 그로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북한 관련된 일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브루나이까지 와서 중국 대사관으로 옮기기 전 중국 지도부 관련 대응팀을 이끄는 상태에서 북한 관련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대충 해서 넘기세요. 말씀대로 그런 이유라면 북한과 합의를 해서 경수로 건설이 재개되더라도 오래가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역시 그렇겠죠?”

엘리어스가 되물었다.

“예. 백악관은 북한에 끌려다닐 생각이 없습니다. 당장은 이라크 때문에 북한을 이용할지 몰라도 그게 오래갈 리가 없어요. 되도록 북한 일에는 깊이 관여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나도 그건 아는데 이게 참······.”

엘리어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국무부에서 예전에 에드릭 씨와 했던 일들을 꽤 높이 평가하더군요. 결국, 예전에 했던 일이 발목을 잡는 셈이죠.”

엘리어스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순간 뜨끔했다.

북한 일에 관련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엘리어스만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가는 엘리어스가 중국으로 옮겨 간 이후에도 북한 관련 일을 맡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에이전트 에스 팀 일과는 달리 북한 관련 일을 하면서 얻는 정보는 딱히 돈이 되는 정보도 없었다.

그나마 북한 관련 정보가 영향을 줄 만한 곳은 한국의 증시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한국의 대선이 있는 해였다.

대선이라는 큰일이 있는데 북한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한국 증시에 주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3.

나는 엘리어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책상에 앉아 이반 부카드에게서 받은 보고서들을 검토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겠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직선제라고 해도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가장 대표적인 국가인 미국은 직선제가 아니나 선거인단을 뽑고 그렇게 뽑힌 선거인단이 다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다.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대부분 나라는 직접선거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1950년대만 해도 대통령 중심제 국가 중에서 직접선거제도를 채택한 나라는 사실상 필리핀이 유일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정치권이나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대통령 간선제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 의회도 내심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현 제도를 유지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반 부카드 부지부장이 이야기했듯이 지금 상황에서 간선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반 부카드가 이야기한 대로 기존 정당에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방안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인도네시아 국민과 메가와티 대통령에게 받아들이게 하느냐였다.

나는 잠시 서류 검토를 멈추고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엘리어스가 서류를 보며 문서를 작성하는 소리였다.

그리 크지 않은 호텔 방이라서 그런지 엘리어스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잠시 후 엘리어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엘리어스는 누군가와 큰 소리로 통화하기 시작했다.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류오린을 나오기 직전에는 개인 사무실을 썼지만, 작년 초만 해도 나는 수십 명이 모인 사무실에서 근무했었다.

컴퓨터 소리는 물론이고 사방에서 고객이나 거래처와 전화 통화를 하는 소리가 났지만 별로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왜 저런 사소한 소음에 집중할 수 없는지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았다.

단순히 내가 1년 사이 돈을 많이 벌고 누군가와 함께 같은 방을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 성격 때문일 것이다.

엘리어스는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명목상 내 상사였다.

생각해 보면 최근 몇 년간 나는 상사와 계속 갈등이 있었다.

일단 류오린에서는 팀장이었던 왕웬준과 웬지하오와 문제가 있었다.

오죽하면 리안이 나를 팀장으로 추천하면서 너 같은 부하 직원은 두기 부담스럽다는 말을 했겠는가?

나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류오린으로 오기 전부터 내 성격은 이랬다.

인종차별을 당하고 풋볼을 시작할 때 굳이 쿼터백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내가 쿼터백을 한다고 했을 때 감독은 노골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NFL도 그렇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쿼터백은 백인들의 포지션이었다.

NFL을 씹어 먹는 아프리카계 선수들도 쿼터백을 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시아계인 내가 쿼터백 주전으로 나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쿼터백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쿼터백이 백인들이 주로 맡는 포지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기보다는 누군가를 내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조직 생활에는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

왕웬준이나 웬지하오는 물론이고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엘리어스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가 내 상사가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엘리어스가 먼저 도발을 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한발 뒤로 물러났으면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 성격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제 굳이 바꿀 필요도 없지 않은가?

다음으로 든 생각은 내가 엘리어스가 다시 사이가 좋아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내 성격에 더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엘리어스의 욕심이 더 책임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한 가지 원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와 내가 엘리어스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없었다.

나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슷한 순간에 통화를 끝낸 엘리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다 끝냈나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약속이 있어서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트북과 서류를 챙겼다.

“저는 다른 방을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방요?”

“예.”

내 대답에 엘리어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안 된다는 것을 아실 줄 알았는데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저 혼자 브루나이를 먼저 떠나겠습니다.”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내 말에 놀랐는지 엘리어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차피 같이 왔지만 같은 일 때문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라······. 무슨 일 때문에 가는지는 물어도 대답하기 어렵겠죠?”

“팀장님 보안 레벨이 2단계 높다면 모를까······.”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한국에서 뵙죠.”

엘리어스가 말했다.

말을 마친 엘리어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내가 방을 떠날 때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내 말과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을 보며 역시 엘리어스와는 상사와 부하로 잘 지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도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엘리어스도 부하를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상사는 아니었다.

4.

나는 이반 부카드에게 가면서 내가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엘리어스를 팀장으로 모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이름만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남겨 놓고 내 볼일을 볼 생각이었다.

아니, 앞으로는 출근도 굳이 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하면서 살 생각이었다.

우선 지금 당장 할 일은 이반 부카드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개헌을 미국 정부의 뜻에 맞게 통과시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반 부카드가 인도네시아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가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역시 마음이 복잡했다.

나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떠맡을 사람이 한 사람 줄어든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사람은 일본의 단테 패트릭 부지부장,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 부지부장 그리고 필리핀의 엘만 지부장과 조엘 요원이었다.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일본의 단테 패트릭 부지부장이었다.

그는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처음 활동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와 필리핀의 엘만 지부장이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비해 단테 패트릭 부지부장은 그래도 이런저런 정보를 내게 전해 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내 사업을 도와주고 있는 정윤호가 단테 패트릭에게서 받은 명단을 통해 영입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에이전트 에스 팀을 실체가 있는 조직으로 만들려고 결심한 이후 영입하려고 접촉하고 있는 인물들도 그가 준 명단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이반 부카드는 그런 도움을 준 적은 없지만 그를 통해 나는 스파이 세계의 비정함과 권력자들의 잔혹함을 알 수 있었다.

이반 부카드가 내게 맡긴 임무를 통해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단테 패트릭과 이반 부카드를 통해서 나는 이쪽 일에 꽤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테랑 요원인 이반 부카드가 나를 찾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나름 그들에게 고급 정보를 얻어서 꽤 여러 번 써먹었다.

이반 부카드가 사라지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고급 정보를 얻을 기회도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막상 인도네시아 고위층과 연결된 통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아주 아쉬웠다.

‘중동으로 가기 전에 인도네시아 정부 고위 관리라도 소개해 달라고 해야 하나?’

생각해 보면 그건 단테 패트릭도 마찬가지였다.

단테 패트릭은 올해 말 때쯤에 미국 본부로 갈 예정이었다.

아직 인사 발령은 나지 않았지만, 단테 패트릭은 꽤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본부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일본 고이즈미 정부와의 인맥이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당선부터 위기마다 단테 패트릭은······ 정확히는 나는 꽤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내가 했다는 것은 나와 단테 패트릭 그리고 CIA 본부와 일본 지부에서 소수만 알 뿐이지 정작 고이즈미 총리나 그 측근은 모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고위층이야 알아도 그만이지만 일본 정부 고위층, 그것도 50년 가까이 집권하고 있는 자민당과의 인맥은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단테 패트릭과 이반 부카드가 맡긴 일들을 귀찮기는 하지만 재미가 있었다.

지난 1년간 돈을 많이 벌기는 했지만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었다.

마땅히 쓸 곳도 없었다.

하지만 정보를 분석하고 시장의 움직임을 예상해서 돈을 버는 것은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재미가 있는 것은 여론을 조작해서 사람들을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CIA도 그만둔 마당에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일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제안한 작전 덕분에 지난 1년간 미국은 꽤 많은 이익을 얻었다.

재주 넘는 곰 노릇은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셈이었다.

이제 나도 재주 넘는 곰을 이용해 돈을 버는 왕 서방이 될 차례였다.

이왕이면 사람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면서 돈까지 벌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결심을 굳히고 이반 부카드의 벨을 눌렀다.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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