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244. 집토끼를 먼저 잡아라.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이반 부카드는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래서 파키스탄 군 정보부 놈들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했잖아, 조심했어야지. 하여간 알았어. 바로 자카르타 들렀다가 카라치로 갈 테니 미리 준비해 놔.”
전화통화를 끝낸 이반 부카드가 휴대전화를 거칠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 미치겠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내가 물었다.
“파키스탄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총격이 발생해서 여섯 명이 사망했다더군. 문제는 지금 용의자를 쫓고 있는데 아무래도 카슈미르 민병대인 것 같다는 거야.”
“카슈미르 민병대요? 카슈미르 민병대가 왜?”
파키스탄 내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알 카에다와 연결된 과격파의 행동이었다.
파키스탄 민병대는 말이 민병대였지 실제로는 파키스탄군의 통제를 받는 비정규 병력에 가까웠다.
“왜기는, 무샤라프 대통령이 민병대 훈련 캠프를 해체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겠지.”
“아······.”
“문제는 군의 통제를 받는 민병대원들이 이슬라마바드까지 와서 저런 일을 벌일 동안 파키스탄 주둔군이나 군 정보부에서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는 거야.”
이반 부카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번 일이 단순히 민병대 훈련 캠프 해체에 불만을 품은 민병대 단독 행동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군부가 무샤라프 대통령에 돌아섰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파키스탄군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샤라프의 가장 강력한지지 세력이었다.
“그건 아닐 거야.”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파키스탄에는 우리는 물론이고 다국적군이 머물고 있어. 군부가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해도 뭔가 행동을 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무샤라프 이후의 대안이 없거든······. 무샤라프가 무너지면 당장 부토나 샤리프 같은 정치인들이 귀국할 텐데 다른 군부 인물 중에는 무샤라프 정도의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 없어.”
“그럼 이번 일은?”
“뭐······ 실력 행사 같은 거겠지. 무샤라프 대통령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테고 말이야.”
“복잡하네요.”
“이쪽 일이 다 그렇지. 그래, 자네는 벌써 방법을 찾은 건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될지는 모르지만 해 볼 만한 방법은 있습니다.”
“그래?”
“예.”
“말해 보게.”
“자료를 보니 현재 군부에 배당된 의석이 38석 정도 되더군요. 맞습니까?”
내 질문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당연히 이번에 군부에 배정된 의석수는 삭제될 예정이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수하르토 집권 때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는 건국 때부터 정부와 군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군부에 일정 의석을 배정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였다.
500석인 의석 중에서 38석이 작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탄핵당한 와히드의 인도계몽당 의석수가 겨우 51석이었다.
메가와티의 민주항쟁당의 의석수가 겨우 151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39석은 의회 내에서 군부의 목소리를 내기에 충분한 의석수였다.
“헌법 개정안에서 군부에 배정된 의석수를 삭제하려던 계획을 철회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언론에 흘리면 어떻겠습니까?”
“뭐?”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메가와티가 그걸 두고 보겠나?”
“메가와티가 아닌 일반 인도네시아 국민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반대하겠지. 애초에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이유가 수하르토 시절에 대한 혐오 때문인데 군부가 의석을 유지하는 것을 두고 보겠나?”
“그런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군부가 계속 의회 내 의석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되겠군요.”
“그렇지······. 자네 설마?”
고개를 끄덕이던 이반 부카드가 뭔가 깨달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인도네시아 국민의 관심을 대통령 직선제가 아니라 군부가 의석을 유지하느냐로 돌릴 생각입니다.”
“음······. 괜찮은 생각이기는 한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겠나? 군부가 의석을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순간 3년 전처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올 텐데? 자칫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메가와티 대통령이 있지 않습니까.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으로 버티고 있는 이상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군부의 의석수를 미끼로 던져 놓고 정당 중심의 직선제를 추진하자는 이야기군. 어차피 미끼니 메가와티 대통령 쪽을 설득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일단 제 계획은 그렇습니다.”
“한 번 해 볼 만한 방법이기는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게······ 조금 내 이야기를 들었으면 알겠지만 지금 파키스탄 사정이 심상치 않아. 그래서 내가 자리를 곧 파키스탄 카라치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면 이번 일은 미루는 겁니까??”
“그게 안 되니 문제지. 당장 다음 주면 헌법 개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될 예정이야. 이번 일을 하려면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은 물론이고 정당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정작 내가 시간이 없으니······.”
“굳이 모든 사람과 만나서 이견을 조율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메가와티 대통령의 민주항쟁당만 설득하고 민주항쟁당을 통해서 다른 정당들을 설득하면 될 것 같은데요. 대통령 선거에서 정당의 힘이 세지는데 기존 정당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민주항쟁당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인도네시아 미국 대사관이나 CIA 지부에는 그런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한데 성격이 좀······.”
이반 부카드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와 좀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 능력은 좋은데 외부 팀을 다들 돈에 팔린 인간 사냥꾼이라고 생각하거든······.”
“용병요?”
“그래.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팀이 좀 특이할 뿐 CIA에서 고용하는 기존 외부 팀은 타격대인 경우가 일반적이야.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타격대처럼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경력이 얼마 안 되나 보죠?”
“다른 일을 하다가 CIA에 온 지는 얼마 안 됐어.”
“아······. 그래도 우리 팀을 타격대와 비교하는 것은 좀 그러네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CIA가 운용하는 두 개의 타격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특수부대에서 차출한 정예 병사였지만 다른 하나는 전직 특수부대 출신들로 구성된 외부 팀이었다.
외부 팀의 팀원들은 연봉이 최소 10만 달러 이상일 정도로 베테랑이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을 추격하는 것이었다.
말이 추격이지 실제로는 인간 사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가 최대한 막고는 있지만, 이들은 추격 중에 꽤 많은 민간인 피해를 유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작전을 수행하려면 인간성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타격대와 우리, 정확히는 나를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외부 팀을 움직이는 동기는 오로지 돈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돈만으로 에이전트 에스 팀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쪽 세계에 대해서 아직 잘 몰라서 하는 생각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이해는 하는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일을 같이하는 게 어렵다고?”
이반 부카드가 되물었다.
그는 내 말에 놀란 표정이었다.
“예. 당장 다음 주가 인도네시아 헌법 개정안 의회 투표일이라면 시간이 많아야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인데 호흡도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수는 없죠.”
“아니, 지금 와서 일할 수 없다고 나오면 어쩌나?”
“제가 계획은 알려 드렸으니 그 외부 팀을 용병 취급한다는 유능한 사람이 하면 되겠네요.”
“아무리 다른 곳에서 능력이 검증됐다고 해도 이제 막 CIA에 들어온 요원에게 그런 일을 어떻게 맡기겠나.”
“그래도 저는 호흡이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같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엘리어스와의 불화 때문에 이반 부카드를 찾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자네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좀······. 좀 과장해서 그렇지 그렇게 문제가 있는 요원은 아니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는 내 거부에 굉장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단순히 나와 만나기 전에 신입 요원에 대해 조심을 시키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나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거 참······. 정말 안 되겠나?”
이반 부카드가 다시 물었다.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인도네시아 언론에 소문을 흘리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전에 썼던 통로를 이번에도 이용하면 되니까요.”
“알겠네. 자네가 손발이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같이하기 어렵다니 어쩔 수가 없지.”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말해 보게.”
“인도네시아 광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사람을 소개해 주십시오.”
“광산 투자?”
이반 부카드가 되물었다.
이반 부카드의 표정은 놀랐다기보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예. 이미 제가 지난번 이름을 밝혔을 때 조사해 보셨겠지만 저는 얼마 전까지 홍콩 투자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자네 지금은 한국에 있는 대사관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사관에서 하는 일은 임시직이고 투자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투자 일을? 에이전트 에스 팀은?”
“에이전트 에스 팀의 일을 하기 위해서 투자 일을 계속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에이전트 에스 팀의 자금 조달을 계속해야 하고요.”
“단순한 위장이 아니었나?”
“처음에는 위장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팀에서도 그걸 원하고 있고요.”
“팀에서도 원한다고?”
“제가 얼마 전까지 다닌 회사에서 받은 성과급이 단위가 8자리가 넘습니다.”
“8자리라면 1천만 달러?”
“그보다는 조금 많습니다.”
“허! 요원 중에 가장 돈이 많이 버는 요원이 내 눈앞에 있었군. 그 정도면 요원을 계속할 이유가 없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살아남기 위해 하다 보니 어느 날 그렇게 됐더군요.”
“하다 보니 됐다라······. 그래, 누구를 소개해 달라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중앙정부의 광산업, 특히 석탄 쪽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다른 자원 부국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도 광산업에 대한 허가를 받는 것은 까다로웠다.
인도네시아 석탄 생산은 국영 석탄 회사가 5% 정도를 생산하고 있고 나머지는 85%는 중앙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80여 개의 민간 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그건 쉽지 않아. 더구나 외국인이 신규 개발권을 갖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광산업 허가권을 가진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권입니다. 중앙정부가 그런 투자를 눈감아 줬으면 하는 거고요.”
“알겠네, 내가 한번 알아보지. 이번 일과 엮으면 어떻게 가능할 것도 같고······.”
“감사합니다.”
인도네시아 석탄 개발 업체에 대한 투자는 시작이었다.
나는 중국이 WTO 가입으로 경제 발전이 더 빨라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은 한동안 제조업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면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다.
중국도 자원 대국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더구나 중국 경제개발은 동쪽 해안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내륙에서 해안 도시 공장에 석탄이나 철광석을 운반하느니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에서 자원을 수입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었다.
인도네시아 천연자원에 대한 투자는 앞으로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집토끼를 먼저 잡는 게 중요했다.
내게 집토끼는 바로 우선 돈을 버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