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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뛰어나다는 말은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든 인생을 산다는 의미다
250. 뛰어나다는 말은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든 인생을 산다는 의미다
“어서 오게. 말했듯이 나는 뭐 그리 상황이 좋지는 않군.”
다시 만난 이반 부카드의 표정은 지난번에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어두웠다.
와 달라는 이반 부카드의 말투에서도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큰 문제인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물었다.
“이 미친 북부연맹 새끼들······.”
이반 부카드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기에?”
내 질문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군이나 다른 연합군이 잡은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를 계속 아프가니스탄군에 넘기고 있네.”
“당연하죠. 탈레반 포로를 우리가 잡고 있어 봐야 쓸모는 없고 귀찮은 일만 생기죠.”
미국은 다른 나라의 여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 포로를 관리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을 뿐 아니라 상당히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생포한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가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
“물론 그렇겠죠. CIA와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지도부를 쫓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행적을 알 만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알 만한 포로들은 이미 따로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쓸 만한 포로 중 운이 좋은 일부는 쿠바 미군 기지로 보내졌지만, 운이 나쁜 이들은 키르기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로 보내지니 말이야.”
“중앙아시아라면······? 그들이 간 곳은 최근 중앙아시아에 CIA가 마련한 블랙 사이트입니까?”
내가 물었다.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듣기로는 그 블랙 사이트에서는 포고들에 대한 심한 고문이 실행되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뭐······.”
이반 부카드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쿠바 미군 기지에서도 고문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
“그럼······. 중앙아시아로 간 이들이 운이 없다고 하는 이유가······?”
“쿠바 미군 기지는 어떤 포로를 들어왔는데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만, 중앙아시아로 간 자들은 공식적인 기록 어디에도 이름이 남지 않네. 그 차이가 뭐겠나?”
이반 부카드가 되물었다.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자네 생각이 맞아. 지난 몇 달간 중앙아시아 블랙 사이트로 간 자 중에서 대부분은 다시 이름을 들을 일이 없게 됐다고 하더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의미였다.
바로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방법은 미국 정부와 미군이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수용소나 시설에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문 중에는 그 과정에서 대상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이 많았다.
아니, 그런 고문을 받고 설사 살아난다고 해도 다시는 세상에 나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중에 자신이 미국에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면 곤란하니······.
물론 그 일은 주도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일했던, 아니 지금도 관여하고 있는 CIA일 것이다.
세계 경찰을 자처한다는 미국 정부가 벌인다고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었다.
911 테러가 없었다면 미국 정부와 CIA가 그런 일까지 벌일 리가 없었다.
이반 부카드의 말을 들으며 나는 911 테러가 미국에 어떤 충격을 줬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미국은 그리고 미국인들은 지금 그런 일까지 벌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미국을 공격했고 또다시 공격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공포감.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두려워하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사실을 깨달으며 깨달은 다른 진실이 있었다.
내가 이런 미국 정부와 미국인의 생각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911 테러나 알 카에다에 대해 지금 평범한 미국인이 느끼는 것처럼 공포를 느끼지도 엄청난 분노를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당한 일이 이런 감정 때문인가?’
문득 학교에 다닐 때가 떠올랐다.
그때 다른 이들이 나를 따돌렸던 것은 내가 단순히 아시아계라서가 아니라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생각이 중단된 것은 이반 부카드의 말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우리가 너무한다고 생각하나?”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라도 정보를 알아내야죠.”
내가 말했다.
이반 부카드는 베테랑 요원이었다.
내 생각을 알게 된다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더는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CIA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쓸 만한 도구로 존재하는 이상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 쓸모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요. 아프가니스탄군에 포로를 넘기는 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문제가 생겼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군에 넘긴 포로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어쩌다가······?”
“말이 아프가니스탄군이지 실제로는 북부연맹군이고 그 지휘관 중에는 아주 미친놈도 많아.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거느리던 부대의 지휘관을 놓지 않고 있고 말이야.”
“그렇겠죠. 북부연맹 지휘관들이 자신의 부대를 포기할 리가 없으니까요.”
북부연맹은 소련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부터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대를 근거로 활동하는 군벌 세력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들어서고 아프가니스탄 정부 산하의 군대도 있지만, 기존 탈레반과 싸우던 북부연맹 군이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했다.
여전히 실제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부터 활약하던 군벌의 지도자들이었다.
북부연맹의 지휘관들은 소련과의 전쟁과 탈레반과의 내전을 겪으면서 힘이 총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라면 정확히 어떤 문제이기에······?”
어지간한 일이라면 이반 부카드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에는 정식 정부가 들어섰다.
그게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이든 북부연맹군이든 우리가 일단 포로를 넘긴 그 후에 벌어지는 일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아프가니스탄군의 책임이었다.
“하······ 이 미친 새끼들이 진짜······.”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짜로 어이가 없는 일을 당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포로를 사망할 정도로 고문하는 일을 말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이반 부카드가 저런 말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가니스탄군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우리가 넘긴 포로를 살해해서 암매장했다더군.”
“아······.”
“별로 놀라지 않는군.”
“예······ 뭐······.”
이반 부카드의 말대로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니 놀랄 일도 없었다.
“전쟁 중에 포로를 살해해서 암매장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까요. 어느 전쟁이나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전쟁사에서 전쟁 포로를 살해해 암매장한 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평전투 이후 벌어진 학살이었다.
기원전 260년 중국에서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일로 당시 사망한 포로 숫자만 45만이었다.
그 후 50년 후에는 항우가 진나라군 20만 명을 같은 방법으로 학살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진나라 백기는 50만을 죽여 결국에는 전국을 통일했고 항우는 20만을 죽여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예전과 같이 공개적으로 포로에 대한 학살을 벌이지는 못한다.
제네바협약으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지금도 행해지고 있었다.
미군도 2차 대전이나 625전쟁 그리고 가깝게는 베트남 전쟁에서 벌인 일이었다.
아니, 지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전쟁이란 그만큼 그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성을 상실하게 하기 일이기 때문이었다.
CIA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서 고문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북부연맹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몰아낸 직후에 탈레반에게 정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었다.
911 테러가 아니었다면 북부연맹은 탈레반에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탈레반이 증오하는 북부연맹군이 포로를 죽였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자네 말이 맞아. 포로를 살해하는 일이 놀라운 일은 아니지.”
내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반 부카드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적은 숫자가 아니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숫자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기에······?”
“그 숫자가 1천 명이라면 어떤가? 그것도 한 곳에서 한 번에 말이야?”
“예?”
이반 부카드가 말에 나는 이번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숫자에서 0이 2개는 더 많았다.
나는 많아 봐야 수십 명 선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잠시 뭐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짜 미친 것 아닙니까? 그 정도 규모를 어떻게 감추려고······?”
말했듯이 포로 살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1천 명을 한 번에 살해하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 정도 규모로 포로를 살해하면 그건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희생자 수가 두 자리나 세 자리 숫자라면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숫자가 네 자리 숫자가 넘어가면 최소한 소대나 중대 규모가 동원되어야 포로를 처형하고 그렇게 처형된 시체를 묻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많은 인원이 관여된 일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관여한 병사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하지. 이미 유엔에도 알려진 것 같아. 막고는 있는데 다음 주에 유엔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될 것 같네.”
유엔까지 알려졌다니 큰 문제였다.
“포로를 넘겨준 미군도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겠네요.”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잔당들은 어지간해서는 항복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게 문제지. 북부연맹 놈들이 탈레반을 죽이는 거야 둘 사이의 문제지만 하필 우리가 넘겨준 포로를······.”
“탈레반은 북부연맹군과 싸울 때는 거의 항복하는 경우가 없죠. 항복한다고 해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그나마 미군과 다국적군이 포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적이기는 하지만 심한 처우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남은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당과의 전투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포로에 대한 학살은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실제 장평전투에서 조나라군을 학살한 백기는 벌을 받아 사망했고 진나라는 통일에는 성공했지만 50년을 가지 못했다.
진나라군을 학살한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천하와 모든 지인들을 잃고 죽었다.
그리고 그들의 악명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전해지고 있었다.
포로 학살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규모를 넘으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였다.
“더 큰 문제는 이라크야.”
“하긴 지금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중동 국가들을 상대로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한 여론전을 진행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중동 국가들을 상대로 한 여론전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지.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말이야.”
말을 마친 이반 부카드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뭔가 방법이 있겠나?”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건······.”
이건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최근 1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여론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는 정보전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 눈앞에 있는 CIA와 한 일들이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이쪽으로 재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한 개 국가에 한정해서 여론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언론의 황제라는 머독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이반 부카드의 말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다른 곳은 다 필요 없네.”
“그럼?”
“미국 내 비판만 돌리면 되네. 다른 곳이야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돌릴 수 있네.”
“미국 내 여론요? 하지만 CIA는······?”
CIA는 미국 국내에서 작전을 벌이는 것이 불법이었다.
더구나 올해는 미국에서 중간선거가 열리는 해였다.
지금 한창 미국 내에서는 예비선거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해에 만약 CIA가 미국 내 여론을 조작하는 데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두 명의 목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자네에게 하는 요구는 CIA에서 내려온 요구가 아니네.”
“그러면? 설마······?”
“국토안보부에서 내려온 지시네.”
내 걱정과는 달리 백악관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을 관장하는 국토안보부의 지시라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토안보부의 지시요? 그런데 어떻게 국토안보부에서?”
국토안보부에서 나를 어떻게 알고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질문에 이반 부카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국토안보부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 같네.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이 많을 거야.”
“······.”
나는 이반 부카드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CIA도 모자라서 이제 국토안보부······.’
순간 눈에 뭔가 들어간 것처럼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