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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소수자의 편에 서라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블룸버그 통신과 CNN 그리고 BBC 뉴스를 들으며 식사하고 한국 신문을 보고 W&R 한국 지사로 출근하는 일상으로 말이다······.
그 뉴스 중에는 미국의 국토안보부가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테러 조직원 여섯 명을 체포했다는 소식이나 미국의 부통령과 국방부장관이 이라크 핵을 막기 위해 미국이 독자행동을 할 수 있다는 소식도 들어 있었다.
내가 이반 부카드와 나눴던 대화 중에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꼭 저런 행동들이 내 이야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계획이었고 딕 체니 부통령이나 럼즈펠드 국방부장관이라면 할 수 있는 발언들이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조간신문을 확인하던 나는 주요 신문 일 면 기사가 거의 같은 내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신문들을 그대로 집어 들고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정윤호와 마상혁을 사무실로 불렀다.
뉴스를 보고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온 마상혁이 나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
“본사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나에게 인사했다.
“아, 예.”
나는 그의 인사에 당황했다.
나로서는 낯선 인사 방식이었다.
“앞으로 회사 내에서는 인사를 할 때 고개를 숙일 필요 없습니다.”
“예?”
내 말에 마상혁이 당황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윤호를 돌아보았다.
“우리 회사 내에서는 상급자라도 고개를 숙이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아······ 예.”
마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상급자에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예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는 인사와 부하 직원인 마상혁에게 받는 인사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부하 직원에게 저런 인사를 받는 것은 나로서는 낯선 경험이었다.
저런 인사는 호텔이나 상점에서나 받는 인사였지 회사에서 받는 인사는 아니었다.
홍콩에서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직장이 꽤 있다.
하지만 내가 일했던 류오린이나 W&R은 아니었다.
류오린은 명목상 평등을 내세우는 중국의 영향을 깊게 받은 회사였다.
W&R은 반대로 직원들 상당수가 미국이나 영국 혹은 유럽 출신이거나 유학파였다.
나는 두 사람이 소파에 앉자 입을 열었다.
“제가 두 분을 부른 것은 물어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마상혁 씨!”
“예, 말씀하십시오.”
“여의도에서 일하셨으니 정치권이 돌아가는 사정도 알고 있겠네요.”
“사설 정보지의 주요 내용이 정치권과 기업 동향이다 보니 어느 정도는······.”
나는 들고 있던 신문들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것 어떻게 된 겁니까?”
“신임 총리 후보에 대한 의혹 기사네요.”
내가 탁자에 올려놓은 신문들 모두 이달 초 지명된 총리 후보에 대한 각종 의혹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 가지 신문만 빼고······.
“그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번에도 총리 인준이 실패하는 겁니까? 뭐 아는 것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달 전 대통령이 지명했던 여성 총리 후보 국회 인준이 부결되었다.
투표에서 총리 후보 지명이 부결된 것은 한국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현 대통령이 정국을 장악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국회를 통과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야당 의석이 과반을 넘는다고 해도 연속해서 총리 인준을 부결시키는 것은 정치적인 부담이 클 겁니다.”
정윤호가 말했다.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내 생각도 정윤호와 같았다.
한국의 대통령은 이번에는 지난번 의욕적으로 여성 총리를 지명했다가 국회 인준에 실패했다.
그런 실패를 경험한 한국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통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총리 후보를 지명했다.
이번 총리 후보의 아버지는 현 대통령과 동향 출신이기는 하지만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 군과 정부 그리고 외교관으로 활동한 보수적인 인사였다.
심지어 총리 후보는 언론사의 사주였다.
총리 후보에 대한 의혹 제기를 하지 않은 주요 신문이 바로 이번 총리 후보가 사주인 경제신문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총리 후보를 가장 강하게 공격했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사 중 세 곳 중 두 곳의 회장들과는 친구 사이였다.
말 그대로 가장 통과가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지명한 총리 후보자였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기 보면 현 총리 후보와 친구 사이라는 사람들의 신문사도 1면이 총리 후보에 대한 의혹 제기네요.”
이론적으로는 언론이 아무리 의혹을 제기해도 그게 국회 임명 동의안이 부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총리 임명 동의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여론의 아니라 국회의 표결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였다.
정당들로서는 여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상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야당 총재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야당 총재라면 당선 가능성이 가장 큰 대선 후보였다.
“야당 총재요?”
“예! 지금 한국에서 3대 언론사를 움직여서 언론사 사주를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은 사성 그룹 회장과 야당 대선 후보뿐입니다.”
“사성 그룹 회장이 언론사 사주를 공격할 리 없으니 마상혁 씨 말대로 야당 총재겠네요.”
사성 그룹과 재계 1, 2, 3위를 다투며 경쟁하던 다른 그룹들이 지난 3년 사이에 분할되거나 몰락했다.
이런 사성 그룹이 굳이 언론사의 사주인 현 국무총리 지명자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사성 그룹이 한국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누가 국무총리가 되느냐는 물론이고 다음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했다.
그럼 남은 사람은 야당 총재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야당 총재가 가장 당선 가능성이 크기는 하죠. 그런데 왜요?”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총리 지명자는 총리에 낙마하면 갈 곳이 시민 단체나 정부 산하 단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공격받고 있는 국무총리 후보자는 총리 인준에 실패한다고 해도 경제지의 사주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영향력이 큰 3대 언론사가 보수 성향이었다.
현 국무총리 후보자는 그 언론사 회장들과 친구였다.
그런 언론이 언론사 사주인 총리 지명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하게 하려면 야당에서 언론사에 강압적인 수단이나 협박을 했을 것이다.
내 생각이 사실이라면 총리 낙마에 성공한다고 해도 협박을 받은 앙금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옆에서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윤호가 끼어들었다.
“최근 검찰이 자기 아들 병역 문제를 조사하는 것에 대한 보복인 것 같습니다.”
지난달 국회에서 총리 임명 동의안이 부결된 이후 검찰은 곧바로 현 야당 대선 후보 아들들의 병역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누가 봐도 총리 후보 낙마에 대한 보복 성격이었다.
“겨우 그거로요? 어차피 검찰이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현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져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잃은 상태였다.
어떻게 야당 후보 아들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설사 비리가 있었다고 해도 제대로 조사를 통해 유죄를 증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만약 현 대통령이 검찰에 대해 그 정도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들들이 잇달아 검찰 조사를 받고 구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겨우가 아니겠죠. 지난번 대선에서 떨어진 이유가 아들들의 병역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윤호가 대답했다.
현 야당 총재이자 야당 대선 후보는 지난번 대선에서 현 대통령과 맞붙었던 당사자였다.
당시 대선 투표에서 둘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경제 위기, 제3 후보의 약진이라는 악재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차이는 아니었다.
“지난 대선에서 현 야당 대선 후보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본인과 아들들이 모두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이기는 하죠.”
마상혁이 덧붙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금 섣부른 행동인 것 같네요. 지지율이 높기는 하지만 아직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닌데요. 벌써 저렇게 대통령 행세를 하는 것은 좀······.”
이번 일이 후보 본인이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서 과잉 충성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무리한 일이었다.
선거가 4개월도 남지 않았다.
이번에 지명되는 총리가 지금 정부 마지막 총리라고 봐야 했다.
총리를 연속으로 낙마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제가 듣기로는 야당 후보 측근들은 이미 연말 선거에서 이길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상혁이 말했다.
“지지율만 보면 그런 생각이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 총리 후보는 한국 기득권층의 일원이었다.
그런 총리 후보를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기득권층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야당 내에서도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다만 야당으로서는 대안이 없어서······.”
“그렇기는 하죠. 어쨌든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국회에서 총리 인준이 통과되기는 어렵겠네요.”
“그럴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언론을 동원한 이유는 국회에서 임명 동의안을 부결시키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마상혁이 대답했다.
“마상혁 씨는 야당 후보 아들 병역에 대한 정보를 조금 모아 주세요.”
“야당 후보 아들 병역에 대한 정보를요?”
“예. 그쪽에서 이렇게 과민하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병역 문제가 중요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내 지시에 마상혁이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미 5년 전에 다 끝난 문제이고 내년에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지 아직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죠. 더구나 아무리 봐도 제 생각에는 아들들 병역 문제가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네요.”
외부인인 내가 한국 국민 사이에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낀 것은 올 초였다.
올 초 미국 영주권을 가진 가수가 군대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미국으로 가서 시민권을 얻고 입국하려다가 거부된 일이 있었다.
당시 온 나라가 그 일로 시끄러웠었기 때문이다.
정윤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대표님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여기가 외국계 회사라고 해도 자칫하다가는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습니다.”
정윤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주식 투자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소수자의 편에 서라. 그리고 목숨을 걸어라.”
“그건······.”
정윤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다고 제가 다른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미국인인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고요. 하지만 왠지 제가 보기에는 선거가 이대로 끝난 것 같지는 않네요.”
물론 내가 한국 선거에 개입할 이유도 목숨을 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남아에서 여러 번 선거에 개입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야당 대선 후보와 그 측근은 나무 자만하고 있었다.
방심한 상황에서는 실수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미 야당 후보 측은 한국 기득권의 핵심 고리인 거대 언론사들을 적으로 돌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음에 또 무슨 실수를 할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