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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이빨이 없어도 땅콩을 씹어야 할 때가 있다
1.
아침 일찍 마상혁이 정윤호를 찾아왔다.
그는 손에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그게 뭔가?”
“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조사 자료입니다.”
마상혁이 말했다.
“어제 이야기가 나왔는데 벌써 자료를 가지고 왔다고?”
정윤호의 말에 마상혁이 미소를 지었다.
“왜 이러십니까. 아실 만한 분이······. 연말이면 대통령 당선인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사람인데, 여의도에서 이미 예전에 조사가 끝났죠.”
마상혁의 말에 정윤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마상혁의 말이 맞았다.
여의도가 어떤 곳인가?
아주 사소한 인연으로도 테마주라는 이름으로 주가가 움직이는 곳이었다.
정윤호는 마상혁에게 서류철을 건네받았다.
서류철에는 야당 후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그리고 대선 후보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자세한 이력이 나와 있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대선 후보 본인과 아들들의 병역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황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말이군.”
정윤호가 말했다.
“당연하죠. 시간이 지난 지금 증거가 남아 있을 리도 없지만, 설사 증거가 있었다고 해도 이미 지난 대선 전에 다 없앴겠죠. 그때도 당선이 될 것이 거의 확실했던 상황인데요. 대선이 끝나고 현 정부 측에서 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상혁이 말했다.
5년 전에는 정윤호와 마상혁 모두 국정원 직원이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정윤호가 해외 부서라서 국내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고 해도 그는 10년 가까이 국정원의 직원이었다.
동료를 통해 들은 정보가 있었다.
“하긴······.”
어쨌든 다행이었다.
자신들의 보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없는 이상 의혹 정도라면 자신들의 보스도 더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서류철을 넘기던 정윤호의 눈에 이름 하나가 들어왔다.
“박일환? 어디서 본 이름인데······?”
“박일환이라면 대선 후보의 대학교 후배로 검사장 출신입니다. 대선 후보 본인보다는 대선 후보의 동생과 아주 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상혁의 말을 들으며 정윤호는 서류철에 나온 경력을 읽기 시작했다.
경력을 읽어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사람이 맞았다.
“박일환 전 검사장이 대선 캠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
정윤호가 물었다.
“핵심 중의 핵심이죠. 지금 대통령 아들들을 구속한 것이 바로 검찰 내 박일환 라인이죠. 이미 다음 정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누가 되는지는 박일환 검사장이 선택할 것이라는 소문이 여의도에 파다합니다.”
본인이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넣을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상혁의 말대로라면 다음 정부 인사권에 지분이 있을 정도로 후보의 핵심 측근이라는 이야기였다.
정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일이 꼬일 수도 있겠는데······.”
“무슨 문제라도?”
마상혁이 물었다.
“이 박일환 검사장······. 야당 대선 캠프에서 어떻게 치울 방법이 없을까?”
정윤호가 되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캠프의 실세라고요.”
“후보 본인보다는 후보 동생과 가깝다면서? 그럼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정윤호의 질문에 마상혁이 고개를 저었다.
“어림도 없습니다. 후보 동생과 더 가깝다는 것이지, 후보 서울대 법대 직계 후배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으면 검찰총장이 됐을 검찰의 성골 중의 성골이고요. 지금 검찰 주류가 그 박일환 라인 검사들입니다.”
마상혁이 정윤호를 바라보니 정윤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박일환 이 사람 말이야. 우리 보스랑 좀 문제가 있어.”
“예?”
마상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회사와 무슨 문제라고 있습니까?”
정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회사가 아니야. 보스 개인적인 악연이지.”
“보스는 미국 교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학교도 미국에서 다 나왔고요. 도대체 박일환 검사장과 무슨 문제가?”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지만······. 보스 집안, 정확히는 보스의 아버지가 한국에 있을 때 엮인 문제야.”
정윤호가 말했다.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박일환 검사장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의 최측근입니다. 아니, 대선 후보 측근이 아니더라도 현재 검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해외로 떠돌았다고 해도 그걸 모르겠나?”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선배님은 모르겠지만 지금 검찰은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예전 검찰이 아닙니다.”
마상혁이 말했다.
“예전 검찰이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예전 정부 사람들이야 수십 년간 정부를 장악했던 인사들이니 검찰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5년 전에 정권 교체가 되지 않았습니까. 말이 좋아 정권 교체지 사실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권을 잡은 거죠. 아무래도 그전처럼 검찰을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렵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장악력도 정권이 끝나 가면서 거의 잃었고요. 지금 검찰 주류가 따르는
사람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박일환 전 검사장입니다.”
“단지 대선 후보 최측근만은 아니라는 말이군.”
“예. 아무리 보스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우리 회사가 외국계라고 해도 건드리면 자칫······.”
마상혁이 말을 흐렸다.
“이걸 어쩐다. 보스가 이름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사정을 이야기하면 이해해 주지 않겠습니까?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인 것 같던데요.”
마상혁이 말했다.
그가 알기로는 에드릭은 단순히 상관인 게 아니라 한국에서 투자를 주도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성적이기는 한데 행동을 보면 상당히 충동적인 부분이 많아. 감정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성적인데 충동적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네요.”
“그렇기는 하지. 보면 한국 정부를 신경을 쓰는 것은 같은데 미국 정부 고위층에 인맥이 있어서 그런지 한국 공권력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미국 고위층요?”
“그래. 전에 말했지만,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현재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야. 출근도 하지 않는데 그런 신분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주한 미국 대사관에는 확실한 끈이 있다고 봐야지.”
“미국 고위층에 인맥이 있고 대사관 직원이라면 안전은 보장된 셈이네요. 하지만 보스야 그렇다고 해도 선배님이나 저는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도 한국에 있고요.”
마상혁의 말에 정윤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호는 에드릭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에드릭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임시 직원이었다.
대사관 임시 직원이라는 것이 정식 외교관처럼 면책특권까지 가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윤호는 에드릭이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장 한국 지사에서 운용하고 있는 투자금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설사 외교관 면책특권이 없다고 해도 에드릭이 한국에서 어떤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낮았다.
엄청난 재산과 미국 정부 고위층에 인맥을 가진 미국인을 한국 정부가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에드릭이 아니라 정윤호 자신이었다.
에드릭과는 달리 자신은 한국인이었고 가족도 한국에 있었다.
무엇보다 에드릭은 금전적인 문제에 관한 한 아주 후한 편이었다.
정윤호는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지난 1년간 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냥 박일환에 관한 내용을 빼죠!”
마상혁이 말했다.
“빼자고?”
“예. 지난번에 보니 지금까지 한국 대선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가 박일환의 이름을 빼도 알 게 뭡니까!”
솔깃한 제안이었다.
에드릭은 한국보다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대선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 이름 하나 서류에서 뺀다고 해도 그 사실을 에드릭이 알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정윤호는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박일환의 이름을 뺀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릭은 이미 박일환 이름이 들어 있는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명단이 의미하는 것은 복수할 대상이었다.
에드릭이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박일환이 활동하는 이상, 박일환이 대선 캠프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숨긴다고 해도 나중에 자신들이 박일환의 이름 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아마도 에드릭은 자신이 배신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에드릭은 수십 년이 지난 복수를 하겠다고 자신에게 조사를 부탁한 사람이었다.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W&R 한국 지사는 엄청난 속도로 투자금이 늘어나고 있었다.
돈이 권력이 되는 세상이었다.
정윤호는 몇 년 후 그런 권력을 가진 에드릭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지만······.”
“자네는 보스가 만만해 보이나?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이나.”
“만만해 보여서가 아니라······.”
“됐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상사를 속일 생각부터 하는 건가?”
“속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가 생길 것을 알면서 보고를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 아닙니까?”
“자네 밖에 나와서 많이 변했군. 우리가 언제부터 지시를 받고 조사한 정보 영향까지 생각했나! 우리는 그냥 정보를 전달하면 끝이야. 우리는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족일 뿐이지, 머리가 아니야. 밖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일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그런 생각도 꿈에도 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마상혁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보스가 나이는 어리지만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돈을 벌지도 못했겠지. 이번은 처음이니 그냥 넘어가지만, 혹시 자네가 임의로 정보를 누락시킨다면 나부터 자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이런 실수는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마상혁이 대답했다.
“자네는 일단 여기서 대기하게.”
말을 마친 정유호는 마상혁을 한 번 노려보고는 서류철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휴······.”
정윤호가 사라진 후 마상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정윤호는 마치 마상혁이 처음 국정원에 들어가서 연수를 받을 때 처음 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정윤호는 유능하고 존경할 만하지만 엄격했던 교관이었다.
당시 마상혁과 연수를 함께 받았던 동기들은 그런 정윤호를 굉장히 어려워했었다.
지금 정윤호는 카센터에서 일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완전히 옛날로 돌아가신 것 같네.’
마상혁으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드릭이라는 새로운 보스가 자신이 존경하는 교관이자 선배인 정윤호가 저런 모습을 보일 정도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에게 돈벼락을 내린 운이 좋은 교포일 뿐이었다.
한국에서 투자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 사는 교포라는 인간 중에는 한국에서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 주제에 한국인인 척하면서 돈을 벌어 가는 인간들이 많았다.
얼마나 한국을 우습게 보면 그런 짓거리를 하겠는가?
2.
정윤호는 에드릭의 사무실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어떻게 에드릭을 설득할지 생각했다.
마상혁에게 말했듯이 에드릭이 섣부른 행동을 하면 자신이나 회사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정윤호로서는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정윤호는 문을 두드렸다.
언뜻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게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이빨이 없어도 땅콩을 씹어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에드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린 상사를 설득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