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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항상 해결할 방법은 있다
1.
“그러니까······. 이 박일환이 아버지를 구속한 검사라는 말이죠?”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예! 경력을 보면 확실합니다.”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의 최측근이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이 조사 내용대로라면 배승윤보다 처리하는 게 까다롭겠는데요.”
아버지 일과 관련된 인물 중에서 내가 가장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은 지금 감옥에 있는 배승윤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필 대통령 아들들도 관련된 대규모 스캔들에 엮이면서 복수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일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배승윤은 그사이에 대통령과 관련된 비리로 조사를 받고 지금은 감옥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증인을 매수해서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조사 내용대로라면 박일환을 처리하는 것은 배승윤보다 훨씬 어려워 보였다.
“임기가 다 끝나 가는 대통령 친인척과 친분이 있었던 배승윤과는 달리 박일환은 차기 대통령의 최측근입니다.”
“한국 대통령 임기가 5년이던가요?”
“예.”
“박일환에게 뭔가 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네요.”
내게 아버지의 복수란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언젠가 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해야 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숙제.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최소 3년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지금 야당 대선 후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질문에 정윤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조건이면 박일환을 포기할 것 같냐는 말입니다.”
“예? 그게 무슨······?”
“아무리 선거에서 유리해도 선거를 하려면 돈이 필요할 것 아닙니까.”
“설마 돈으로 야당을 매수해서 박일환 전 검사장을 선거캠프에서 쫓아내자는 말씀입니까?”
정윤호가 나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됩니까?”
“그게······. 박일환 전 검사장은 현재 검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정윤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앞뒤가 바뀐 것 같은데요? 물론 경력을 보니 박일환이 검찰의 요직을 거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검찰이 그의 말을 따르는 이유일까요? 검찰이 박일환의 말을 따르는 것은 그가 자신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서 아닐까요?”
검찰이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해도 공무원이었다.
대통령이 공무원 조직을 장악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인사권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박일환의 힘이 차기 대통령의 측근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면 그를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요?”
박일환의 검찰 요직을 거쳤다지만 그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을 구하자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알아보니 한국 대선은 누군가에게 돈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던데요?”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고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선거 자금이 필요했다.
미국은 사실상 선거 자금 한계가 무제한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선거에서 쓸 수 있는 자금의 한도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종류의 법들이 그렇듯 현실과는 동떨어진 부분이 많았다.
당연히 법으로 허용된 선거 자금으로는 대선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드는 막대한 선거 자금을 합법적으로 모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어디선가 돈을 불법으로 받아서 그 돈으로 선거를 치러야만 했다.
“전보다 선거비용이 줄었다고 해도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은 최소 1천억입니다.”
“어차피 1천억을 우리가 다 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한 150억에서 200억까지는 낼 생각이 있습니다. 어차피 대통령이 되면 다 받아 낼 수 있을 테고요.”
“150억에서 200억요?”
“측근이라면서요? 그 정도 측근을 쳐 내는 일인데 그만한 돈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자금은······. 그런 정도 규모의 정치자금을 낼 수 있는 기업은 한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단지 박일환 한 명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차피 정치자금이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정치자금도 공짜는 없습니다.”
“그럼?”
“돈을 낼 때는 그만한 대가를 받아 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죠. 정치자금 100억에서 200억을 주더라도 5년 임기 중에 최소 10배에서 100배는 받아 낼 자신이 있습니다.”
“하긴 대표님이 지금까지 보여 준 실력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던 정윤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려울 겁니다. 지금 야당 후보는 꽤 원리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돈에 측근을 팔아먹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그래도 캠프의 자금 담당이 있을 것 아닙니까? 자금 담당을 통하면······.”
선거 자금은 중요하지만, 후보 본인이 선거 자금까지 신경 쓰기는 어려웠다.
어느 조직이나 인사와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가장 큰 힘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그것도 어렵습니다. 실질적인 캠프 자금 담당이 박일환 전 검사장과 막역한 사이인 대통령의 동생입니다. 더구나 지금 야당 캠프는 재벌들이 서로 돈을 가져다주려고 하는 상황이라서 돈으로는 어려울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수밖에요.”
“예? 그게 무슨······?”
내 말에 정윤호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야당 후보가 박일환을 내칠 가능성이 없다면서요? 그럼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박일환 정도를 처리하는 일로 5년을 기다릴 생각은 없습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정윤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전에 좀 더 조사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네요. 굳이 선거에 개입하지 않고도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그게 좋겠죠. 돈이 얼마가 들든지 정보를 조금 더 모아 주세요. 야당 캠프에 사람을 심어도 좋고 아니면 야당 캠프의 적당한 사람을 매수해도 좋고요.”
“알······겠습니다.”
정윤호가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그는 한국 국정원 출신이었다.
한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는 일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
정윤호에게 지시를 내린 후 나는 이반 부카드에게 연락해서 사람을 한 명 소개받았다.
- 전화하면 자네를 도와줄 거야. 내가 미리 이야기해 놓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나는 다음 날 전화를 걸었다.
“샌더스 사무관님?”
-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이반 부카드 씨에게 소개를 받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에드릭이라고 합니다.”
앨런 샌더스는 이반 부카드가 소개한 CIA 한국 지부의 요원이었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CIA라는 사실이 알려진 화이트 요원이었다.
- 그렇지 않아도 이반 부카드 씨에게 연락을 받고 기다렸습니다. 하버드 크림슨의 그 에드릭이라고요? 무패 우승의 주역?
앨런 샌더스의 입에서 처음 나올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하버드 크림슨은 내가 뛰던 하버드 풋볼 팀이었다.
아무래도 이반 부카드가 소개한 사람은 내가 풋볼 팀에서 활동하던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풋볼을 그만둔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대학을 졸업하고 풋볼과는 거리를 둔 생활을 하다 보니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면 굉장히 어색했다.
아니, 2년 전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무리 하버드 재학생들조차 풋볼 팀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무패 우승은 꽤 화제가 된 일이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감격한 순간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생활하다 보니 풋볼 이야기를 들으면 어딘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맞는 것 같네요.”
‘나와 같은 하버드 출신인가?’
동문은 아니더라도 무패 우승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풋볼 팬인지도 몰랐다.
물론 미국에서 풋볼 팬이 아닌 사람을 찾기 어렵지만 의외로 아이비리그 출신 중에는 풋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건 무패 우승 당시 마지막 경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경기를 보러온 하버드 재학생들은 우리 팀의 무패 우승보다는 경기 후 벌어질 바비큐 파티에 더 관심이 많았으니까.
- 그 에드릭이 내게 연락을 할 줄은 몰랐네요. 그래, 무슨 일입니까?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 혹시 비공식적인 일입니까?
“개인적인 일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그럼 대사관으로 저를 찾아오면 되겠네요. 들어 보니 에드릭 씨도 대사관의 임시직원이라면서요? 대사관에서 보는 게 비밀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앨런 샌더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사관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아쉬운 것은 나였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는 데 대사관보다 좋은 곳이 없다는 말도 틀린 말도 아니었다.
물론 대사관에서도 대화할 때는 조심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외부에 알려질 가능성은 없었다.
내가 대사관에 들어가자 직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사관에 출근할 당시에도 보지 못한 직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샌더스 사무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에 있는 방에 들어섰다.
방에는 30대 중반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앨런 샌더스라고 합니다.”
“에드릭 손입니다. 반갑습니다.”
앨런 샌더스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반 부카드 씨에게 들었는데 자네가 말로만 듣던 에이전트 에스 팀 소속이라고요?”
“예.”
“거참······. 신기하네요.”
“신기하다니 무슨······?”
“지원한 것인가요?
앨런 샌더스가 다시 물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지원한 것도 맞습니다.”
“도대체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대학 풋볼 스타를 요원으로 발탁할 생각을 한 것인지······.”
“그게 무슨······?”
“아니요. 우리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것인데 대학 풋볼 스타는 그게 어렵지 않습니까?”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현장 요원이 아니라 정보 분석 요원입니다.”
“에이전트 에스 팀 파견 요원이었다가 얼마 전부터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옮겼다고······?”
“생각보다 아시아 쪽에서는 풋볼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앨런 샌더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찾아온 것은 에이전트 에스 팀 일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해 미국과 CIA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거 왜? 에이전트 에스 팀이 한국 대선에 관여할 생각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내 말을 들은 앨런 샌더스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가장 중요한 동맹 중 하나입니다. 미국 정부나 CIA는 한국 대선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내가 먼저 찾아와서 그런지 앨런 샌더스는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난 1년 반 동안 해 온 일은 뭐란 말인가?
한국이 미국의 우방이라서 그렇다?
헛소리였다.
한국이 미국의 중요 동맹국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일본보다 더 중요한 동맹국일 수는 없었다.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처음 한 일이 바로 그 일본 총리 선거에 개입한 일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미국의 혈맹은 다섯 개의 눈을 이루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뿐이었다.
다른 나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말씀드린 것처럼 에이전트 에스 팀도 한국 대선에 개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선에 개입할 생각이 있는 것은 에이전트 에스 팀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에 소속된 사람이 지금은 나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CIA 한국 지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서로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면 한국 지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지만······.”
“야당 후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개입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지금 야당 후보가 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겠죠.”
내가 말했다.
말을 하면서 앨런 샌더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제가 대답할 질문이 아닌 것 같네요.”
앨런 샌더스가 말했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내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는 한국 정부 대북 정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비록 탈당했다고는 여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보다는 미국과 같은 대북 정책을 가지고 있는 야당의 집권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미국 정부나 CIA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쩌면 적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항상 해결할 방법은 있는 법이었다.
물론 그 해결 방법이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