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56화 (257/270)

(256)

#257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1.

CIA가 아니 정확하게는 미국 정부가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확실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렇다고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른 나라의 선거에 끼어드는 것은 큰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다.

어느 나라나 선거에 나서는 이들은 그 나라의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의 대선은 그 나라 기득권층들의 이해관계와 갈등이 가장 첨예하고 부딪치는 현장이었다.

당장 내가 끼어들려고 하는 한국 대선만 해도 한국사람 열 명 중 일곱에서 여덟 명은 야당 후보가 다음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야당 후보가 당선되고 내가 자신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것을 알면 그는 분명 나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다른 나라 정치에 거침없이 끼어들 수 있었던 이유는 만약의 사태가 생겼을 때 미국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이상 이번에는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외면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 나는 정식 요원도 아니었다.

말이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는 외주 팀이지 정식으로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설사 정식으로 임명됐다고 해도 미국 동아시아 전략 거점 중 하나인 한국의 대통령과 정보기관의 용병에 불과한 외주 팀의 일개 요원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국 정부는 이번 대선에 관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야당 후보가 압승을 거둘 것으로 생각해서 굳이 끼어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떻게 한다······.’

미국의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때처럼 대놓고 나설 수는 없었다.

나는 순간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2.

“무슨 일 있어요? 어제부터 표정이 왜 그래요? 보스에게 가서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요?”

마상혁이 물었다.

“아니 뭐······ 그냥······ 주가가 연일 바닥이라서 회사 전체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전부 울상인데 나라고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정윤호는 주가 하락 핑계를 댔다.

“그게 무슨······ 그걸 변명이라고······ 하여간 선배님은 예전부터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 것 같아요.”

“무시는 무슨 내가 언제 널 무시했다고······ 그거 너 피해 의식이야. 너야말로 처음 훈련소에서 봤을 때부터······.”

정윤호는 웃으며 화제를 훈련소 시절로 돌렸다.

마상혁이 자신의 핑계를 믿을 것이라고는 정윤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상혁이라고 해도 에드릭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었다.

마상혁이 정윤호가 야당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대선에 끼어들 생각을 알게 되면 무슨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윤호도 그랬지만 마상혁도 국정원이 안기부이던 시절부터 근무한 전직 요원이었다.

한국에서 공권력, 특히 대통령이 가진 힘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통령이란 존재는 비록 시한부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 대통령은 수십 년간 군을 장악해 온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한순간에 숙청했고 여당 내 확실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전 대통령 둘을 감옥에 보냈다.

현 대통령은 말이 좋아서 정권 교체지 제대로 된 지지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이 됐음에도 꽤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현 대통령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현 대통령은 정부에 제대로 된 지지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외환 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권 교체를 이뤄 냈다.

임기 내내 외환 위기 수습에 매달리느라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임기 2년이 남은 작년부터는 권력의 핵심인 사정 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완전히 잃고 측근과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야당 대선 후보는 현 대통령과는 또 달랐다

말이 좋아 야당 정치 거물이지, 평생 권력 주변부를 머물렀던 현 대통령과는 달리 야당 대선 후보는 한국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었다.

오래된 법조계 집안 출신으로 한국 최고 명문 고등학교와 최고 명문 대학을 나왔고 판사로서 요직을 모두 거쳤다.

대통령이 되면 현 대통령은 물론이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이전 대통령보다 공직 사회에 대한 장악력이 더 높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에드릭이 그런 야당 대선 주자 당선을 막을 생각이라는 사실을 마상혁이 알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할 지 정윤호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십중팔구는 배신하거나 최소한 받은 돈을 돌려주고 떠나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비밀을 알게 된 마상혁을 그대로 보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칫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에드릭이 문제가 아니라 정윤호 자신의 안전이 위험해진다.

정윤호는 마상혁에게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선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그리고 마상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그냥 침묵을 지키면 되는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한동안 정윤호와 마상혁은 훈련소 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둘은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처음 만났던 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둘 모두 이야기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둘 다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이야기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색한 상황에 처한 둘을 구해 준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정윤호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대표님! 예! 제가 지금 대표님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예? 마 소장은 저와 함께 있습니다만? 함께 오라고요?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정윤호의 표정은 언제 밝아졌느냐는 듯 다시 어두워졌다.

“보스가 저도 사무실로 함께 오랍니까?”

마상혁이 물었다.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정윤호를 바라보았다.

“그래. 함께 오라는군.”

정윤호가 대답했다.

“몇 년을 본 교관님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보스가 저를 더 믿으시는 것 같은데요?”

마상혁의 말에 정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도 대표님께 믿음을 보여 주게.”

“당연하죠.”

마상혁이 대답했다.

정윤호는 여전히 마상혁이 불안했지만 젊은 대표를 믿기로 했다.

마상혁이 계획을 듣고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정윤호가 대표의 어이가 없는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표에게 무슨 특별한 충성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대표와 함께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대표가 선거에 개입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야당 캠프로 가 봐야 정윤호가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물론 아주 무시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을지도 모르지만 한국 지부가 움직이는 돈의 규모를 알게 되면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 지부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은 최소 수천억이었다.

돈의 힘을 알고 있을 테니 아주 무시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정윤호가 얻을 것은 기껏해야 차기 정부에서 어중간한 자리를 얻는 것 정도일 것이다.

지난 1년간 정윤호가 수십억을 인센티브로 받은 것을 생각하면 배신하는 것은 바보 짓이었다.

마상혁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것보다 대표와 함께 있는 게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마상혁에게 그런 확신을 줄 수 없지만 대표는 가능했다.

그가 버는 돈에 비하면 자신이 받은 수십억도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으니······.

3.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잠시 후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정윤호는 잠깐 보지 못한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듣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보였다.

‘조금 미안하네.’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두 사람을 소파로 안내했다.

“두 분만 따로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은 부탁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요.”

마상혁이 대답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대선에 조금 발을 담가 보려고 합니다.”

내 이야기에 마상혁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선요? 연말에 미국에서 치러지는 중간선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미국 중간선거가 아니라 한국 대선,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관여할 생각입니다.”

내 대답에 마상혁이 고개를 돌려 정윤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도 정윤호를 향했다.

그는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표님은 미국 교포 2세인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마상혁이 물었다.

“맞습니다. 투표권도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 대선에는 왜?”

마상혁이 물었다.

“다음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보스 같은 사람이 대통령에게 하려는 부탁이라면 쉬운 부탁은 아니겠네요?”

마상혁이 물었다.

“어려운 부탁이죠. 대통령도 쉽게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니까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정윤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선에 관여하려는 겁니다. 그런 어려운 부탁을 하려면 아무래도 당선에 공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을 듣던 정윤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 말씀은 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선배님, 뭘 그런 걸 물어요. 그럼 누구겠어요. 당연히 지금 야당 후보죠.”

옆에서 듣고 있던 마상혁이 끼어들었다.

“다른 후보들 지지율 다 합쳐도 지금 야당 후보 지지율보다 낮은데요.”

“맞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잠시만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마상혁이 멈추더니 이번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보스가 부탁을 하려면 당선에 공을 세워야 한다면서요?”

마상혁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죠.”

내 대답을 들은 마상혁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이미 말했지만 누가 봐도 야당 대선 후보가 당선될 것이 확실한 데 당선에 공을 어떻게 세운다는 이야기인지?”

“일단 접근한 이후에 기회를 봐야죠. 아무리 지금 당선이 확실한 것처럼 보여도 위기가 한 번도 없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러느니 차라리 축협 회장을 미는 것은 어떻습니까?”

“축협 회장요?”

“예. 월드컵 성공으로 이미지도 좋고 야당 대선 후보가 가장 유력하기는 하지만 지지율이라면 축협 회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조직이 약하기는 한데 지금 여당 대선 후보는 지지율이 10%가 조금 넘으니······ 시간이 가면 야당 후보와 축협 회장의 일대일 구도가 될 겁니다.”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네요. 직전 대선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는 단일화가 이뤄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삼국지에서 가후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강자 편을 들어 봐야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요. 약자 편을 들어야 대접을 받는다면서 조조를 선택했죠.”

마상혁이 말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었다.

마상혁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어딘지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준비된 발언처럼 보였다.

“혹시나해서 그런데······ 그쪽 캠프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습니까?”

내 질문에 마상혁이 당황했다.

당황한 마상혁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니 뭐······ 꼭 관련이 있다고 보다는 그냥······ 예전 기관에 있을 때 작전 중에 만났던 사람을 얼마 전 만났는데······ 그쪽 캠프에서 활동을······.”

“그만하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마 소장님께서 그쪽 캠프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 제가요?”

마상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는 의사를 보이고는 나는 정윤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된 것 정 대표님은 여당 캠프에 참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예. 뭐······ 저도 그쪽은 아는 사람이 있어서 참여하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지만······.”

“잘됐네요. 제가 야당 캠프에 참여하면 가장 유력한 후보 세 캠프 모두에 참여하는 셈인가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사람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두 분이 열심히 하셔서 선거에 위기가 닥쳤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제가 공을 세워서 대선이 끝나면 부탁을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떨떠름한 표정이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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