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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57화 (258/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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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모든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회의가 끝나고 나가려는 정윤호를 잡았다.

“할 말이 있으니 정 대표님은 잠시 남아 주세요.”

“그럼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마상혁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상혁이 나간 후 나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정윤호에게 건넸다.

“열어 보세요.”

내가 말했다.

서류 봉투에서 나온 것은 두 개의 통장이었다.

“이건······?”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려면 돈이 들 테니 거기서 꺼내 쓰세요. 한국에서는 뇌물을 사과 상자에 넣어서 준다면서요? 사과 상자 하나에 2억 정도가 들어간다고 해서 2억씩 넣었습니다. 하나는 정 대표님이 쓰시고 다른 하나는 마 소장에게 주면 됩니다.”

“제 돈으로 해도 되는데······.”

“회사 일도 아니고 제 개인적인 일 때문에 하는 일인데 그럴 수야 없죠.”

내가 말했다.

나는 이번 일이 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정윤호에게 숨기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잠시 머뭇거리던 정윤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계획을 바꾸신 겁니까? 지난번에는 분명 당선을 방해한다고.······.”

“지지율이 너무 압도적인 차이라서 다른 사람을 당선시키는 게 어렵겠더라고요. 이길 수 없으면 동료가 돼야죠.”

내 말에 정윤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쉽게 내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여전히 내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표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선거가 끝난 이후에 박일환을 제거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왜, 안 될 것 같습니까?”

“물론 저는 대표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처음 만난 이후 하신 일만 봐도 보통 분이 아니라는 알 수 있죠. 선거가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대표님이 야당 대선 캠프에 참여하시면 꽤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어렵다는 말씀이시죠?”

“예. 박일환 전 검사장과 대선 후보 형제들과의 친분을 떠나서 박일환 전 검사장은 국일 팀의 핵심 멤버입니다. 국일 팀은 야당 대선 후보의 핵심 사조직이고요. 선거가 끝난다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윤호가 말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국일 팀은 공식적인 선거 캠프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이번 대선 전략을 총괄하는 곳이었다.

국일 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사조직의 사무실이 여의도 국일빌딩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 빌딩에 이른바 국일 팀이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대선 때였다.

지난 대선 때 생겼으니 무려 5년이나 된 조직이라는 이야기였다.

국일 팀의 목표는 당연히 야당 대선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난 5년간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 조직······.

충성도는 물론이고 대선에 대한 가장 많은 연구를 한 곳이 바로 국일 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 대선 전략이 결정되는 곳은 야당 대선 캠프가 아니라 국일 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알고 있습니다. 선거가 반년도 안 남은 지금 선거 후에 당선자가 박일환이 아닌 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죠. 단순히 공을 많이 세운다고 몇 년 동안 야당 후보를 위해 일했던 박일환을 제거하는 것은 다른 문제고요.”

“예.”

내 말에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당 후보는 명예를 꽤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대선 직후에 대선 공신을 토사구팽했다는 말을 듣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내가 대답했다.

“생각해 두신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없습니다. 우선 저도 국일 팀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우선 대선 후에 말이라도 해 보려면 진짜 큰 공을 세워야 하고······. 공식 선거 캠프에 참여해서는 절대 박일환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일단 국일 팀에 들어가서 거기서 기회를 봐야죠.”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정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리 국일 팀에 들어간다고 해도 대표님의 계획은 쉬운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어지간한 공을 세워서는 야당 대표가 그동안 노력한 박일환 전 검사장을 버릴 리가 없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보던 정윤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다른 생각이라니요?”

“제 생각에는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 이후에 박일환 전 검사장을 쳐 내라고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더 쉬워 보이는데요.”

결국, 정윤호의 질문은 내가 말과는 달리 다른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나는 정윤호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윤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두 분을 다른 후보 선거 캠프에 집어넣으려는 겁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박일환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두 분이 열심히 해 줘야 현 구도를 바꿀 수 있고 그래야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두 사람만 믿겠습니다.”

정윤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정윤호가 입을 열었다.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정윤호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 것은 내가 처음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아들들도 감옥에 가는 상황이었다.

야당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선거에 개입했다가는 대선이 끝난 후 후환을 걱정해야 했다.

그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배승윤 큰아들에 대한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배승윤은 박일환과 마찬가지고 아버지와 악연으로 엮인 인물이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직원으로 그나마 가장 만만하게 생각해서 처음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내가 막 복수를 하려던 순간 그 복수를 미뤄야만 했다.

배승윤이 현 정부 대통령 아들들과 측근을 통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들면서 국정원과 검찰의 타깃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증인을 조작해서 배승윤을 구속하기는 했지만 나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 아들들이 관련된 게이트로 구속된 배승윤을 당장 어쩔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배승윤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은 본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부동산이었다.

적어도 그가 가진 재산을 뺏었고 부동산을 찾아오는 것이 복수의 조건 중 하나였다.

배승윤이 구속된 이후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그의 큰아들이었다.

나는 배승윤 아들을 직접 만났었다.

그리고 굳이 내가 관여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배승윤 아들에 대한 작업을 지시했었다.

작업이란 당연히 큰아들이 관리하는 배승윤 재산을 뺏어 알거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배승윤 일가와 회사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 대부분은 이미 회수해서 회사 소유입니다.”

“그래요?”

“예! 배승윤 큰아들이 자주 가는 술집에서 재미 교포 출신 외국계 투자은행 직원을 사칭한 정보원을 접근시켰습니다.”

“재미 교포 출신 외국계 투자은행 직원을 사칭한 전직 요원요?”

나는 정윤호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나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윤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도 내가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아는 눈치였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외국계 투자은행 교포 출신이 많아서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예전 제가 국정원에 있을 때 홍콩에서 만난 현지 정보원이죠. 제가 아직도 국정원에 있는 줄 알고 있어서 잡히더라도 비밀을 털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대만 국적이기는 하지만 영어도 능통하고 무엇보다 서툴게나마 한국어를 할 줄 알아서 이번 작전에는 안성맞춤입니다.”

“알겠습니다.”

“친분을 쌓은 이후에 처음에는 가이닉스 주식 투자를 권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재작년부터 올 초까지 가이닉스는 말 그대로 한국에 주식 투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래해 보는 그런 주식이었다.

가이닉스는 빠르게 늘고 있던 개인투자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안성맞춤인 회사였다.

주가 등락도 심했고 거래서 거래량 중 적게는 절반에서 많게는 50~60%가 가이닉스 주식거래였다.

한국 최고 재벌 기업의 계열사였기 때문에 유동성도 풍부했다.

나도 처음 한국에서 거래했을 때 가이닉스 주식거래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었다.

하지만 이건 다 예전 이야기였다.

올 초 마이크론의 합병 제안을 거부한 이후 감자까지 겹치면서 개인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안겨 준 주식이었다.

“손해를 많이 봤겠군요.”

“그렇죠. 가이닉스 합병이 무산되고 얼마 후에 감자가 되면서 배승윤 일가가 소유한 현금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가이닉스 감자 이후에는 어떤 사람을 접근시킨 겁니까?”

내가 물었다.

내심 홍콩에서 정보원까지 불러온 것치고는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경력이 비슷해서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재미 교포 출신 외국계 투자은행 직원이라는 신분은 한국에서는 꽤 통하는 배경이었다.

당연히 처음에 접근시켰던 정보원은 쓸모가 다했다고 생각해서 물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윤호의 대답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처음 접근시켰던 정보원이 여전히 배승윤 큰아들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예? 가이닉스 주식 투자에서 큰 손해를 봤다면서요?”

“가이닉스 합병이 무산된 직후에 매각하자고 이야기했다고 권했었습니다.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팔아야 한다고요.”

“가지고 있던 현금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매각을 권했던 것은 배승윤의 큰아들이 매각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만 해도 상당수 개인투자자들처럼 배승윤의 큰아들도 감자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때처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오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죠.”

한국의 개인투자자들이 가이닉스 주식에 투자했던 이유는 풍부한 유동성 때문에 언제든지 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한국 정부가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가이닉스를 포기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맞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주식소각을 통한 감자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정보원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원을 통해서······.”

정윤호는 배승윤 일가와 회사 재산을 가로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코스닥 상장사 인수를 통한 작전주로 한 번 그리고 선물 옵션 거래를 통해서 한 번 이런 식으로 배승윤 회사 소유 부동산 대부분을 가로챘다.

과정을 보면 사기꾼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작전이었다.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스파이나 사기꾼이나 하는 일은 다를 바가 없었다.

목적이 무엇이냐가 다를 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대표님이 배승윤을 구속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배승윤은 30년간 건설 회사를 운영해 왔다.

아무리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속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수고하신 것은 수고하신 거죠. 이번 일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지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승윤은 자신의 부동산이 전부 우리에게 넘어온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배승윤의 큰아들이 가족에게도 철저히 숨기고 있다고 합니다.”

“배승윤이 감옥에서 이 사실을 알면 뒤로 넘어가겠네요.”

“그렇겠죠.”

“대충 그 정도면 작전을 멈춰도 될 것 같네요. 명동을 통해서 배승윤 회사 채권을 사들였다고 제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은행에 넣으세요.”

부동산을 가져온 것에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배승윤의 큰아들이 저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송요? 우리를 상대로요? 우리가 한 일을 눈치챈 겁니까?”

내 질문에 정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담보로 맡긴 부동산이 전부 우리에게 넘어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윤호가 말했다.

“문제가 될까요?”

“증거는 없습니다만······ 그쪽에서 얼마 전 퇴직한 부장판사를 변호사로 선임했습니다.”

나도 한국에는 전관예우라는 관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찮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래도······”

정윤호가 말했다.

“오히려 잘됐네요.”

“예? 그게 무슨······?”

“박일환에게 무슨 명목으로 접근하나 했는데······. 이 사건을 들고 가면 되겠네요. 전관이 아무리 강해도 미래 권력만 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악습에는 더한 악습으로 대항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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