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60화 (261/270)

(260)

#261. 좋은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

1.

정윤호와 마상혁은 여의도의 한 술집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각자 적이라면 적일 수 있는 대선 캠프에서 일을 시작한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상혁은 에드릭이나 정윤호와 관련됐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둘이 W&R 한국 지사 건물에서 떨어진 여의도에서 만나는 이유였다.

자신이 출근하지 않는 동안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던 마상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대표님 기분은 여전하세요?”

마상혁이 질문에 정윤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전히 저기압이지 뭐······. 오늘 홍도현 변호사가 사임계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도 별로 나아지신 것처럼 보이지 않아.”

“홍도현 변호사가 사임했으면 이제 소송은 문제 없는 건가요?”

마상혁이 물었다.

“그렇지. 뭐 처음부터 홍도현 변호사가 붙었다고 해도 어지간한 대형 법무법인에 의뢰했으면 소송은 문제가 없었지. 혹시나 회사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나오고 그러다가 자칫 우리가 작업했다는 사실을 밝혀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지. 아무래도 홍도현이 영장 전담 판사 출신이다 보니 신경이 쓰였던 것뿐이야.”

“이쪽에서 정보를 기사로 내보내서 국회의장 임명 동의안을 부결시킬 명분을 주면 소송 건을 처리해 준다더니······. 어쨌든 그래도 그쪽에서 약속은 지켰네요.”

“공짜는 아니야. 어제 내가 내 차로 현금 5억을 현금으로 전해 줬으니까.”

“아······.”

정윤호의 말에 마상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대표님같이 돈이 많은 분이 겨우 5억이 아까워서 기분이 안 좋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국일 팀에 잠입은 고사하고 박일환 전 검사장하고 대화조차 못 한 것에 충격이 크셨나 보네요.”

마상혁의 말에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자기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특히 우리 대표는 실패라는 것에 익숙하시지 않은 것 같아.”

“하긴 그 나이에 그 정도 돈을 벌었다면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인생이었겠죠.”

마상혁이 말했다.

“적어도 나를 만난 이후로는 대표님의 생각이 이번처럼 크게 벗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대표님 뭔가 열등감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정윤호가 말했다.

“대표님이 열등감요?”

정윤호의 말을 들은 마상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표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아니에요?”

“그렇기는 한데······. 전에 스쳐 가듯 듣기로는 미국에 있을 때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하더라고. 그 일 때문인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정윤호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관심을 받지 않으면 못 견디는 그런 것 같아. 누구에게 무시를 당하면 그걸 못 견뎌 하는 거지.”

“그건 열등감과는 좀 다른 것 아니에요?”

마상혁이 물었다.

“아니지. 대표님의 재산이나 능력을 생각해 봐. 그런 사람이 열등감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겨우 이런 일에 기분이 움직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잖아.”

정윤호가 말했다.

“하긴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대표님이 한국에서 운용하는 투자금만 생각해도 박일환 전 검사장 정도 만나지 못한다고 신경 쓸 레벨이 아니죠.”

“그러니까.”

정윤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표님 같은 사람도 그런 면이 있다니 저는 좋은데요. 이제야 인간처럼 보이고요.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너무 완벽해 보여서 좀 그랬는데······.”

마상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여간 너랑 내가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오늘 내가 한 이야기는 잊어. 괜히 그런 생각하고 있다가 대표님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시잖아요. 저 예전 선배님이 알던 막 국정원 합격하고 연수받던 마상혁이 아니에요.”

“그때 네가 아니니 문제지. 그때 너라면 제대로 내 앞에서도 제대로 말도 못 할 텐데 내가 왜 말실수를 걱정하겠어.”

“하여간 선배님은 저를 너무 애송이 취급하시는데······. 여의도에서 제가 만드는 정보지가 구독자 수만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요.”

정윤호가 손을 들어 마상혁을 달래고는 입을 열었다.

“잡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일 이야기해 보자고······.”

“하여간 불리하면 말 돌리시는 것은 여전하시네요. 선배님이 먼저 명단을 넘기셔야죠. 야당의 정국 주도권 장악으로 여당 쪽에서 흔들리는 사람은 누구누구예요?”

“주로 야당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관료와 기업 출신들이지 뭐······.”

“하긴 그렇겠군요. 아무래도 여당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야당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내가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여당의 당권을 가지고 있는 게 호남계잖아. 이쪽도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래요? 하긴 한번 양지에 있어 봤는데 다시 그늘로 들어가는 게 싫겠죠.”

“당권을 가지고 있으니 매수하기는 어렵겠지만 자당 후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아.”

“좀 뻔뻔한 것 아니에요? 올봄 경선이 끝날 때만 해도 지지율 60%가 넘었던 여당 후보가 10%로 떨어진 게 따지고 보면 지금 여당 호남 주류 비리 때문이잖아요.”

“왜 그래, 다 알면서······. 지금 검찰에서 VIP 측근들 비리를 다 털었겠어? 아마 나중을 위해서 남겨 놓았을 테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 죽기보다 야당이 되는 게 싫겠지. 야당이 되더라도 대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찍히는 것은 더 싫을 테고 말이야.”

정윤호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마상혁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당장은 여당 의원 중에서 관료 출신들과 기업인 출신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말씀이죠?”

“그야 그렇지.”

“알았어요. 대표님 말대로 명분은 후보 단일화 요구 정도로 해서 당내에서 흔들다가 연쇄 탈당하는 식으로 가면 되겠네요.”

마상혁이 말했다.

“그렇지.”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이러다가 선배님이나 제가 미는 후보들이 단일화되어서 당선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지금으로 봐서는 네 쪽이 될 가능성이 큰데 글쎄······. 지금이야 월드컵 열기로 지지율이 높지만, 워낙 지금 여당지지 기반과는 성향이 달라서 정작 투표는 이기기 어려울걸.”

“그럼 단일화되더라도 선배가 돼야 하겠네요.”

“그건 더 가능성이 없고 우리 캠프 내에서도 사실상 반쯤 포기한 분위기야.”

정윤호가 딱 잘라 말했다.

2.

유난히 길었던 한 주가 지나고 다음 투자 방향을 정하기 위한 리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 투자 결과를 보도한 리안이 다음 주 투자 방향에 관해 물었다.

- 이번 주에는 네 말대로 내구재 주문 상승과 소비자 신뢰지수 하락으로 주가가 내려가기는 했는데······. 다음 주에는 어떨 것 같아?

“조금 있으면 911 테러 1주기잖아.”

- 그러게, 그 일이 벌써 1년이나 지났네. 아침에 빌딩에 비행기가 충돌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한데······.

“그러니까. 요즘 백악관이 당장에라도 이라크를 공격할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년 전 기억도 다시 생각나지 않겠어.”

- 주가가 다음 주에도 안 좋을 것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럴 것 같아. 그런 큰 충격에서 벗어나기에는 1년은 너무 짧지. 빈 라덴도 잡지 못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라크와도 전쟁이 날 것 같고 말이야.”

- 하긴······.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사람 중에는 911 테러도 테러지만 그 직후에 주가 떨어진 일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 많을걸. 그 기억 생생한데 주식을 선뜻 사기는 어렵지.

“그것도 그렇지.”

- 그럼 투자 방향은 그렇게 정할게. 그리고······.

대화를 나누던 리안이 말을 흐렸다.

“왜 무슨 할 말이 있어?”

- 인도네시아 석탄 광산 말이야.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 허가를 받았다고 했지?

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잘못된 듯 보였다.

나는 인도네시아 광산에 투자하는 자원 펀드.

정확하게는 석탄 광산을 개발하는 인도네시아 기업에 투자하는 자원 펀드 운용을 리안에게 넘겼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야당 캠프에 선거운동하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후 석탄 수입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허가를 받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인도네시아 광산 투자는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 일은 서류 정리 다 해서 너에게 넘겼잖아? 왜 문제라도 생긴 거야?”

내가 물었다.

“그게, 지방정부에서 채굴 허가를 내 주지 않는다고 하네. 무슨 환경 어쩌고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는데 현지에 보낸 직원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 광업권을 회수해서 다른 기업에 주려는 것 같다고 하더군.”

“뭐? 그게 사실이야?”

내 입에서 저절로 큰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만큼 리안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 직원 말에 의하면 심각한 것 같아. 허가권이 있으니 인도네시아에서 다른 석탄 광산을 알아보면 되는데······.

“그건 말이 안 되지. 이미 펀드에 투자금이 꽤 많이 들어왔잖아, 지금 광산으로 설명회도 했고 말이야. 처음 이야기한 광산을 채굴하기도 전에 다른 광산을 알아본다고 하면 투자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 그렇기야 하지. 그래서 인도네시아 화교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정을 알아봤는데······.

“알아봤는데?”

- 지방정부에서 뭔가 단단히 우리 회사와 틀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

리안이 말했다.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도네시아에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멋대로 계약을 파기한다는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외국인 투자자와 지방정부가 계약관계로 엮인 사업이 아니었다.

중간에 미국 정부, 정확하게는 CIA가 관여된 사업이었다.

이걸 지방정부에서 멋대로 계약을 취소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 그래?

“응. 아무래도 내가 직접 인도네시아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이럴 수가 없는데······.”

- 나도 네가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리안이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미안하네. 인도네시아 내 일을 도와준 쪽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 아니야. 이번 일은 네가 다하고 나는 숟가락만 올린 일인데 불평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나도 돈 문제라면 내가 처리하겠는데 알겠지만, 이번 일은 돈만이 걸린 일이 아니잖아.

- 그야 그렇지.

자원 펀드는 홍콩과 중국 내에서 W&R의 우호 세력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시작은 인도네시아 광산 하나지만 차츰 규모를 늘려 갈 생각이었다.

자원 펀드를 만들기 전에 걱정했던 것은 누구를 투자자로 받아들일 것이냐이지 펀드의 성패가 아니었다.

그런데 첫걸음부터 삐끗하게 생긴 것이다.

“내가 첫 번째 비행기 편으로 인도네시아로 가볼게.”

- 알았어. 가서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바로 홍콩으로 전화해 줄 수 있어? 열흘 후에 중국 쪽 철강업체와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서 말이야.

“벌써 무슨 철강업체와의 회의야? 아무리 인도네시아 광산이 채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해도 너무 이른 것 아니야?”

- 그게 여기 대표가 우리 본토 집안사람이어서 말이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연기해도 큰 문제는 없어.

“너무 서두르지 마. 가서 상황 파악 끝나는 대로 빨리 연락할게.”

- 이번에 인도네시아 가는 김에 거기 현지 화교 네트워크와도 이야기 좀 나눠 봐, 도움이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인도네시아도 주요 기업 중 상당수가 우리 쪽이야.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화교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비슷했다.

“알았어. 필요하면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의 대선 같은 사소한 일은 잠시 잊고 내 일을 할 시간이었다.

기다린다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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