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61화 (26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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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도둑이 제발 저린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후 나는 W&R 인도네시아 파견 직원을 통해서 상황을 알아보았다.

직원과 이야기를 나는 이후 내가 연락한 곳은 CIA 인도네시아 지부였다.

이반 부카드와 함께 일할 때 알게 된 요원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먼저 인사부터 나눴다.

“여러 번 만났는데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패트릭 대니얼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다른 요원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하다 보니 주로 이반 부카드하고만 대화를 나누게 되어 다른 요원들과는 통성명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에드릭 손입니다.”

우리는 가볍게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먼저 연락을 주신 것인지?”

패트릭 대니얼이 물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이야기네요. 요즘 회사와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문제라니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패트릭 대니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찾아온 이유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물론 연기인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전부터 말했지만, 스파이와 사기꾼은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가 다를 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속여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려는 점에는 똑같았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에 제가 일했던 회사가 얼마 전 미국 대사관, 정확하게는 CIA 인도네시아 지부 소개로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석탄채굴작업계약(Coal Contract of Work : CCoW)’을 받았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손이 지금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별것 아니죠.”

패트릭 대니얼이 말했다.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전에 있었던 회사는 그렇게 받은 ‘석탄채굴작업계약’을 통해서 광업회사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탐사가 끝난 칼리만탄의 석탄 광산을 매입한 뒤 막 채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야기하시는 것 보니 그 일이 뭔가 잘못됐나 보네요.”

패트릭 대니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막 채굴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칼리만탄주 정부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작업을 중지시켰습니다. 알고 보니 뒤에 바크리 그룹이 있었고요. 무엇보다 칼리만탄 지방정부의 태도가 강경하더군요.”

바크리 그룹은 수하르토의 측근이자 현재 골카당의 중진인 아부리살 바크리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 개발할 때 문제가 된 적이 있던 회사였다.

처음 개발하려던 광산이 바크리 그룹 기존 광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때 바크리 그룹과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직원들에게 듣기로는 칼리만탄 지방정부와 바크리 그룹의 태도가 보름 전부터 갑자기 달라졌다고 하는데, 뭔가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내 질문에 패트릭 대니얼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크리 그룹이라······. 아무래도 그쪽에서 지부가 하는 일을 눈치챘나 보네요.”

패트릭 대니얼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부가 하는 일이라니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게······ 비밀이라서······.”

패트릭 대니얼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제가 어디 소속인지 아시죠? 에이전트 에스팀의 보안 등급으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휴···.”

패트릭 대니얼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후인 9월 4일 중부 자카르타 지방법원에서 골카당의 당수인 악바르 탄중에 대한 공금횡령 혐의에 대한 판결이 있습니다. 그 재판에서 3년 형을 받을 예정입니다.”

“뭐요? 악바르 탄중은 단순히 골카당의 당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인도네시아의 국회라고 할 수 있는 인민 대표 회의 의장, 즉 국회의장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죠.”

패트릭 대니얼이 대답했다.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내가 놀랄 정도로 너무나 담담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악바르 탄중은 현재 원내 2당인 골카당의 당수였다.

단순히 제2야당이 아니라 골카당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만든 정당으로, 수십 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해 온 곳이었다.

비록 지난 총선에서 제1당의 지위를 메가와티 현 대통령의 인민투쟁당에 내주기는 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기반이 튼튼한 정당이었다.

악바르 탄중은 그런 골카당의 다음 대선 후보로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이었다.

아마 골카당에 대한 국민의 여전한 거부감이 아니었다면 메가와티 대통령이 와히드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를 때 부통령이 됐을 정치 거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겨우 공금횡령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한다는 것은 인도네시아 정치를 극한 대립으로 몰고 가는 일이었다.

“공금횡령이라면 수하르토 대통령 시절 장관일 때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 일로 악바르 탄중 같은 거물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겁니까? 지방법원이야 어떻게 유죄판결을 받게 할 수 있겠지만, 상급법원에 가서도 그 판결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니, 애초에 지방법원이라도 악바르 탄중에 대한 유죄판결이 가능은 한 겁니까?”

얼마 전 대법원 판사에 대한 청부 살인으로 기소된 토미 수하르토의 판결에서 보듯이 인도네시아 법원 판결은 가진 자들에게는 관대했다.

심지어 수하르토 정권 시절의 일이었다.

당장 온갖 범죄의 몸통인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자택에 머무는 것을 생각하면 장관이었다고 공금횡령 처벌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함께 기소된 다른 피고 두 명은 이미 자백을 해서 죄를 인정한 상태입니다.”

“공짜는 아니겠군요.”

“그렇죠. 이미 6개월에서 1년 정도로 대통령궁과 말을 맞춰 놓은 상태입니다. 풀려나면 제3국을 거쳐서 미국으로 올 예정이고요.”

패트릭 대니얼이 말했다.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3년 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데다 그 후 처리 과정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그 판결에 CIA가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메가와티 대통령도 이 일로 악바르 탄중이 감옥에 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테고······. 이렇게 해서라도 악바르 탄중이 대선에 나오는 것을 막고 싶은가 보네요.”

말을 하고도 내심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메가와티 대통령 측의 행동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이번 행동은 더는 예전처럼 재선이 확실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나 할까?

그만큼 지금 인도네시아 경제 위기는 만만치 않았고 메가와티 대통령의 재선도 더는 확실하지 않았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기는 했지만, 거대 정당의 역할은 컸다.

악바르 탄중이 대표인 골카당은 수하르토 정권 몰락 직후에 치러진 선거에서도 원내 제2당을 차지한 저력을 가진 정당이었다.

아마도 다음 총선에서는 메가와티 대통령이 이끄는 인민투쟁당과 비슷한 의석수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결국 총선 직후에 치르는 다음 대선은 인민투쟁당을 중심으로 모인 정당들과 골카당을 중심으로 모인 정당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무리한 일이기는 했지만, 이번 일로 그 골카당을 이끄는 악바르 탄중은 정치 활동에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유죄를 받을 가능성은 없지만 악바르 탄중이 공금횡령을 한 것이 사실일 테니 말이다.

다만 내가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도대체 왜 CIA가 이번 일에 관여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CIA가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아마도 메가와티 대통령에게서 뭔가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인도네시아 정치 불안을 감수할 만큼 큰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이제 골카당은 메가와티 대통령에게 협조할 리가 없었고 악바르 탄중이 국회의장으로 있는 이상 국회에서 정부 정책을 뒷받침할 만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건 어려워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네시아는 경제 불황과 이슬람 과격파 세력의 세력 확장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런 인도네시아 상황을 생각하면 이번 일이 인도네시아에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만 커졌을 뿐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서 공산권 국가들과 가까운 메가와티 대통령이 재선하는 것이 미국에 이익이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도네시아 CIA 부지부장이던 이반 부카드는 대통령궁과 많은 부분에서 협조하면서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CIA라도 너무 나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넘어서 법원 판결에까지 관여하다니······.

더 큰 문제는 패트릭 다니엘의 말대로라면 골카당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서 뭔 짓을 하든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문제는 CIA를 통해 허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W&R이 피해를 받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 일 때문에 석탄 생산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미국 대사관을 통해서 칼리만탄 지방정부를 설득해 줄 수 있습니까?”

나는 패트릭 다니엘에게 요구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칼리만탄 지방정부는 군부와 아주 가깝습니다. 칼리만탄 정부를 설득하려면 군부를 통해야 하는데, 지금 미국 대사관은 인도네시아 군부와 엑손 모빌의 이리안자야(Irian Jaya) 유전 개발과 관련해서 협상하는 중입니다.”

“한마디로 나 때문에 엑손 모빌 유전 개발의 약점을 잡힐 수는 없다는 말이네요?”

“섭섭하실 수도 있겠지만 홍콩의 W&R은 홍콩 기업이지 미국 기업은 아니지 않습니까? 석탄 광산이 유전보다 중요하지도 않고요. 기다리시면 엑손 모빌과의 협상이 끝난 이후에 칼리만탄 석탄 광산 문제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패트릭 대니얼이 말했다.

‘이반 부카드가 미국으로 떠난 게 아쉽네.’

이반 부카드가 있었으면 이번 일에 메가와티 대통령과 힘을 합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911테러 이후 메가와티 대통령이 미국의 정책을 지지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지지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메가와티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해지고 권력이 확고해졌을 때도 지금처럼 미국의 편을 들어 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경제 위기와 이슬람 과격파의 확산이라는 인도네시아 문제를 해결하기에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없었다.

말이 좋아서 보이지 않는 리더십이지 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일도 인도네시아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2년 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무리수였다.

거대 정당들이 뜻을 모아서 헌법 개정을 통과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재선을 생각하고 경쟁자 제거에 나선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이거 좋은 답을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라크에서 전쟁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유전 개발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이 지부장님의 방침입니다.”

“아닙니다. 방침이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더 이야기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해결해 준다고 약속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미 다른 일 때문에 내 문제를 뒤로 미뤘다.

그때 가서 또 다른 이유로 내 문제가 밀릴 수가 있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알아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앞으로는 인도네시아에서 CIA의 협력 없이 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말이 통했던 이반 부카드는 더는 인도네시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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