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62화 (263/270)

(262)

#263. 조금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1.

나는 우선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미국에 있는 이반 부카드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 이것 미안하게 됐군. 회사 때문에 허가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니 말이야.

“어떻게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이반 부카드는 직전까지 CIA 인도네시아 부지부장이었다.

그것도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와 인도, 파키스탄의 일까지 관여하던 실세였다.

- 그게 좀 어려워······. 자네도 알겠지만, 국토안보부의 목적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내 영토를 보호하는 것이네. 그런데 이번 일은 그 목적과는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서 말이야.

이반 부카드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게는 핑계로 들릴 뿐이었다.

물론 국토안보부가 CIA의 상급 기관이기는 하지만 둘의 관계가 명확하게 상하 관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이라는 일이라는 게 꼭 공식적인 관계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토안보부가 CIA 활동에 관여할 권한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CIA가 국토안보부 간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꼭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반 부카드만이 가진 경력의 특수성이 있지 않은가?

“꼭 국토안보부의 간부라는 직책이 아니더라도 여기 지부에 있는 사람들 다 얼마 전까지 부하였던 사람들 아닙니까. ”

- 거 참······.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이반 부카드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데요?”

- 내가 미안해서 말을 하지 못했는데, 자네 일에 문제가 생긴 데는 CIA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어.

“CIA의 책임요? 작전을 펼치다가 생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내가 물었다.

- 그게······. 자네도 CIA 인도네시아 지부장이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거네.

“예, 알고 있습니다.”

- 지금 지부장이 나와 친했던 자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지 CIA 인도네시아 요원들은 물론이고 대사관 직원들에게 자네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더군. 회사나 미국의 일이 아니라면서 말이야.

“그래요? 어이가 없네요.”

- 그리고 이건 완전한 추측인데······. 지부장이 지나가는 말로 자네를 한 번 손을 봐주겠다는 말을 했다더군. 그 후에 자네 허가에 어려움이 생겼고 말이야. 지부장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어.

“아······.”

어쩐지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많은 외국 기업 중에서 나만 문제가 생겼다고 했을 때 뭔가 수상한 생각이 들었었다.

이반 부카드의 말대로 인도네시아 지부장과 부지부장이었던 이반 부카드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지부장은 일본 지부의 단테 패트릭과 마찬가지로 미국 본부 행정 본부 출신이었다.

둘 다 작전 요원이 아닌 행정직 출신이다 보니 현장 실무에는 어두웠다.

차이라면 일본 부지부장이었던 단테 패트릭과는 달리 인도네시아 지부장은 지부의 최고 책임자였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단테 패트릭이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실적을 쌓아 미국 본부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인도네시아 지부장은 지부장으로 있는 동안 별다른 실적을 쌓지 못했다.

당연히 본국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었다.

이건 그가 지부장으로 부임했을 때 이미 인도네시아 지부에는 부지부장 이반 부카드가 실질적으로 지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정직 출신인 지부장이 현장에서 작전 요원으로 이름을 날린 이반 부카드를 밀어내고 지부의 실권을 장악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런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결국, 911 테러라는 실적을 쌓을 기회가 생겼지만, 그마저도 실적을 이반 부카드에게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CIA 인도네시아 부지부장이었던 이반 부카드는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에서 벌어지는 작전에 관여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지금 이반 부카드는 새로 생긴 국토안보부의 요직으로 영전해 갔다.

지부장으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참······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이 저를 그렇게 미워한다니······ 어이가 없네요.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부 지부장님에 대한 불만이 나에게로 향한 셈이네요?”

-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데 그럴 가능성이 있지. 만약 사실이라면 내가 자네에게 이번 일은 확실히 보상해 주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하지만 나중은 소용이 없었다.

CIA 지부장이 관여됐다는 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은 골카당이 CIA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더 쉬운 해결 방법이 있었다.

“차라리 지금 골카당 쪽에 전화를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부 지부장님 악바르 탄중 의장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반 부카드는 메가와티 대통령 측근뿐 아니라 골카당 인사들과도 가까웠다.

그중에는 이번 CIA 작전 목표인 악바르 탄중은 물론이고 하비비 전 대통령 같은 골카당의 거물들도 있었다.

-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나도 돕고 싶지만, 이번에는 그게 좀 어려울 것 같네.

이반 부카드가 딱 잘라 거절했다.

“어렵겠습니까?”

- 미안하네. 차라리 예전처럼 내가 요원이라면 모르겠지만 국토안보부에 있는 지금 내가 골카당에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은 자칫 내정간섭으로 보일 수가 있네. 위기에 몰린 악바르 탄중이 내가 전화를 건 사실을 폭로할 수도 있고 말이야.

이반 부카드가 이유를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이번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보겠습니다.”

- 그래······. 아까 말했듯이 다음에 내가 이번에 진 빚은 갚겠네. 그리고 참, 자네 인도네시아에 언제까지 머물 생각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글쎄요? 아마도 한두 주는 더 머물 것 같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 요즘 같은 때 치안이 불안한 곳에는 어지간하면 오래 있지 않은 게 좋네. 특히 무슬림이 많은 국가에는 말이지.

“혹시 무슨 테러 경보라도 있는 겁니까?”

- 그냥 조심하라는 말이네. 알아서 하겠지만 치안이 불안하고 사람 많이 있는 곳은 피하게.

이반 부카드가 경고의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말이었다.

2.

CIA나 미국 정부가 이번 일을 도와줄 가능성은 없었다.

여기에 이반 부카드에게마저 도움을 거절당한 이상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아크바 탄중이 3년 형을 받은 날 저녁 나는 해결을 위해 리안이 새로 영입했다는 W&R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 책임자를 만났다.

“주치앙입니다. 예전부터 카이 황 대표에게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주치앙은 W&R이 자원 펀드를 모집하면서 새롭게 영입한 인도네시아 지부의 대표, 정확하게는 W&R 본사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인도네시아 광산업체의 대표였다.

주치앙은 30대 중반이었다.

리안에게 듣기로는 인도네시아 유력 화교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말로는 리안의 집안과는 꽤 예전부터 이런저런 사업을 같이해 온 가문이었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바로 일 문제로 넘어갔다.

“시간이 없으니 우선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산업 허가를 받는 데 도움을 줬던 분 쪽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 쪽 행동에 불만을 가진 골카당 쪽에서 미국인인 제가 허가받은 광산을 가로채려고 하는 중입니다. W&R 자원 펀드는 그 일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나는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CIA나 이반 부카드 같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나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아크바 탄중 의장의 유죄 판결에 미국이 관여됐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네요.”

주치앙이 말했다.

그는 CIA라는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요? 그건 몰랐던 사실이네요.”

나는 일단 모른 척을 했다.

“저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골카당 최고위층과 잘 아시는 집안 어르신분 중 한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확실하지는 않고요.”

주치앙의 말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얼마나 보안이 허술하면 일개 사업가인 주치앙까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인도네시아 화교가 골카당과 친하다지만 보안이 얼마나 허술해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인지······.

앞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CIA와는 거리를 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상황이네요. 주 대표님!”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이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음······. 아시겠지만 칼리만탄주는 지금 여당인 메가와티 대통령의 인민투쟁당 보다는 골카당의 영향이 큰 곳입니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작은 곳이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

메가와티의 인민투쟁당은 의회에서 30%가 훌쩍 넘은 의석은 차지한 최대 정당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인민투쟁당은 가장 인구가 많은 자카르타 인근 다섯 개 정도 주에서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을 뿐 다른 섬에서는 골카당이 여전히 우세였다.

특히 가장 경제성이 높은 석탄이 매장된 칼리만탄섬은 골카당의 뿌리가 깊었다.

이번 일도 그 여파로 생긴 일이었다.

나는 주치앙이 집안사람을 통해서 악바르 탄중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까 가문에 골카당 지도부와 친하신 분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을 소개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어쨌든 이번 일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골카당과 직접 협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내가 질문에 주치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진작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골카당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골카당은 메가와티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한계 상황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요?”

“예. 그쪽에서는 지난번 와히드를 탄핵하고 쫓아냈을 때 의회 의석수만 따지면 당연히 악바르 탄중 의장이 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런데도 여론을 생각해서 양보해 줬는데······. 이번에도 헌법 개정에 골카당이 협조해 준 직후에 다시 뒤통수를 때렸다면서요.”

주치앙이 말했다.

“그런 분위기라면 한동안 골카당과 협상하는 것은 어렵겠군요.”

내 말에 주치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한동안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아저씨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주치앙이 말을 흐렸다.

“시간이 없죠. 홍콩 본사 투자 펀드가 제대로 하루라도 빨리 채굴을 시작해야 하니까요.”

“그렇죠, 그게 문제죠. 시간······.”

자원 펀드는 홍콩과 중국에서 W&R의 우군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자원 펀드에 이어 다른 펀드도 함께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인 자원 펀드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칼리만탄 지방정부에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다른 곳은 없습니까?”

“그게, 있기는 합니다.”

주치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곳이 있습니까?”

내가 주치앙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어딥니까?”

“군부입니다.”

주치앙이 대답했다.

“군부요?”

내가 되물었다.

“예. 인도네시아 중앙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군부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인도네시아 군부가 아직도 그 정도 영향력이 있습니까?”

“예, 인도네시아 군부는 돈이 많으니까요.”

주치앙이 대답했다.

“돈이 많다고요?”

“예. 인도네시아군 예산 중에서 3분의 2는 정부의 세금이 아니라 바로 군부가 소유한 사업체에서 나옵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와 예산이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그중에서 예산이 독립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군부는 말 그대로 인도네시아 내의 또 하나의 나라라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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