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64화 (265/270)

(264)

#265. 묻지도 말고 대답하지도 말라

1.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쪽과 만나고 온 주치앙이 요구 조건을 듣고 돌아왔다.

“돈보다는 다른 것을 원하는 것 같다는 말이죠?”

내가 물었다.

“예. 몹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별다른 대가 없이 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주치앙이 대답했다.

나는 윗입술을 깨물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자금 사정은요? 아무래도 새로 창당했으면 자금이 꽤 들었을 텐데요?”

“선거도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지금은 그렇게 큰 자금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주치앙이 대답했다.

의원을 뽑는 총선과 대선 모두 2년 정도가 남아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니······.

“그쪽에서 그렇게 나올 때는 뭔가 큰 것을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인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요.”

정치하는 데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당장 금전적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있다는 의미일 텐데······. 갑자기 그쪽에서 대가를 받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내가 물었다.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개를 받고 만났으니 당연히 미리 조사했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언뜻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짐작이지만······.”

주치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세요.”

“저를 통해서 제 친가와 외가에 빚을 지워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제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주치앙의 집안은 인도네시아 화교 명문 거족이었다.

명말 청초에 중국 본토를 떠나서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황족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이력을 내세우는 가문이 그렇듯 진짜 황족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현재 인도네시아 화교 중에서 꽤 비중 있는 가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친가보다 더 대단한 것은 외가였다.

주치앙의 외할아버지는 바로 한때 인도네시아 최대 기업이었던 아스트라 그룹의 창업자였다.

비록 몇 년 전 외환 위기 때 회사 최대 주주가 홍콩 쟈딘 매디슨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가문의 영향력만은 여전히 대단했다.

“마음의 빚을 지게 한다는 것인데······.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정말 소문처럼 다음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화교는 은원 관계가 확실하다고는 하나, 한편으로는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했다.

지금 아무런 대가도 없이 광산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해서 2년 후 선거 때 주치앙의 친가나 외가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를 도와줄 가능성은 보장은 없었다.

2년 후에 가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당선 가능성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이번 일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측이 현재의 확실한 이익보다 불확실한 미래의 호의를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당선 가능성은 낮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뭐 그렇기는 하죠. 정치인치고 대선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도전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칼리만탄주에서 석탄 광산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측의 말처럼 광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로서는 나름의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의 제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쪽 제안은 거절하죠.”

“예?”

거절하자는 말에 주치앙이 놀란 표정을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의 빚을 지는 이런 방식은 꺼림칙하네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진심으로 다음 대선을 노린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내가 말했다.

나는 이번 일에 주치앙의 배경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주치앙의 배경을 이용할 생각이면 굳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를 통할 이유가 없었다.

아스트라 그룹의 허씨 가문은 이런 일에 이용하기에는 아까운 존재였다.

“펀드 투자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광산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없습니다.”

주치앙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돈이 더 들더라도 직접 군 지휘부를 설득하죠. 자금은 제가 추가로 지원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잠시 말이 없던 주치앙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지만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꼭 들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라는 패가 아주 나쁜 패도 아니고요.”

“그가 차기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재 인도네시아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경제 상황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런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이 무슬림 청년층에 급격히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어떤 돌발 상황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주치앙의 말을 들으며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본 인도네시아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안정의 기본인 경제였다.

그런 면에서 인도네시아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911 테러 직후 메가와티 대통령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꽤 많은 지원을 받아 내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런 외교력과는 별개로 정작 그렇게 받아 온 지원을 경제 회복에 사용하는 내치에는 무관심했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국내 문제에 무관심한 사이 경제 불안과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한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한 것에 대한 무슬림 과격파의 불만이 인도네시아에 만연한 상태였다.

그나마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것은 얼마 전까지는 이런 정치적 불만이 헌법 개정이라는 큰 사건에 억눌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헌법 개정은 끝났다.

국내 정치 안정에 통해 경제 회복에 전념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하지만 메가와티 대통령은 최대 야당의 당수이자 국회의장에 대한 유죄 선고로 야당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아시겠지만 전임 와히드 대통령과는 달리 메가와티 대통령은 우리 화교들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우리가 수하르토 전 대통령과 손을 잡고 인도네시아인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어르신들도 이런 메가와티 대통령의 생각에 대해 우려를 하고 계십니다.”

“화교에 대해 부정적인 메가와티 대통령에 대항마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을 생각하는 건가?”

“사람이 없으니까요. 골카당에서 그나마 대통령 선거에 나올 사람이 악바르 탄중 의장 정도였는데······. 이번에 큰 타격을 입었으니 어쩌면 다음 대선에서 골카당은 대선 후보를 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주치앙이 말했다.

내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측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는 이번 일로 주치앙이나 그의 친가 외가에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런 생각이라면 오히려 주치앙, 아니 인도네시아 화교가 이번 일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와 접촉할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더구나 어쨌든 인도네시아 광산 기업에 투자한 기업의 대표는 주치앙이었다.

주치앙 본인의 일을 위해서 자신의 배경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주치앙이 한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려면 그에 따른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리안에게 말해서 일을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지분이나 나눠 주라고 하면 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알겠습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쪽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알겠습니다.”

대답한 주치앙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측에서 홍콩 본사 책임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거절하세요. 정 만나고 싶다고 계속 이야기하면 홍콩 본사에 이야기해 보든가요. 저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장관을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만남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는 다음 대선을 진지하게 노리고 있었다.

내가 그런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를 지금 만난다면 메가와티 현 대통령과 반대편에 서는 셈이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CIA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CIA는 다음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메가와티 대통령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였다.

인도네시아 CIA 지부와 함께 갈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2.

미국 버지니아.

공화당과 민주당의 예비선거가 끝나고 양당의 후보가 사실상 확정되었다.

존 베비스는 에드릭이 사람을 통해 보내온 자료를 본 순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자료만 있으면······.”

존 베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 그가 버지니아 제2선거구에 출마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말렸다.

그들은 현역 지역구 의원인 에디 쉬록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존 베비스는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번 선거는 911 이후 처음 열리는 중간선거였다.

어느 때보다 공화당이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예비선거에서 무슬림에 대해 동정적인 이야기를 한 현역 의원이 낙선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나마 버지니아 제2선거구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당선되는 지역구였음에도 존 베비스가 제2선거구에 출마했을 때 민주당의 어떤 후보도 출마하지 않았다.

덕분에 존 베비스는 예비선거를 아무런 경쟁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민주당에서 제2선거구에 존 베비스만 출마한 이유는 현역 의원인 공화당 소속 에디 쉬록 의원 당선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에디 쉬록 현 하원 의원은 군 출신 중에서 가장 유권자들이 좋아한다는 해군 출신이었다.

이번 선거는 예비선거 때부터 군 경력을 가진 후보들이 다른 후보에 비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에디 쉬록 의원은 전역 후에도 꽤 오랫동안 주 상원 의원을 지내 지역 기반도 굳건했다.

여기에 정책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낙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동성애 대한 강경 발언으로 보수층과 기독교계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민주당의 후보로 존 베비스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무투표로 당선됐을 정도로 연임이 확실한 현역 의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존 베비스의 손에 든 자료만 있으면 그런 예상을 깨고 단숨에 선거 판세를 뒤집고 역전할 수 있었다.

자료에는 자신이 출마한 지역구의 현역 의원인 에디 쉬록이 동성애자라는 증거가 들어 있었다.

동성연애자라는 사실만으로 상대를 낙선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존 베비스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은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비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디 쉬록 의원이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그는 이미 말했듯이 미 해군 출신이었다.

1993년 빌 클린턴 정부는 이른바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소수자 복무 병역법을 시행했다.

이 법으로 군을 떠나는 사람이 매년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넘었다.

해군 출신인 에디 쉬록 의원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은 그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인 군 경력이 오히려 약점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보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말했듯이 에디 쉬록 의원이 미 공화당 내에서 가장 강력학계 동성연애를 비판해 온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미국 유권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정치인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이 드러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에드릭이 보내온 자료에는 결정적인 폭탄이 들어 있었다.

바로 에디 쉬록 예전 파트너가 지금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이었다.

의료 기록은 철저한 비밀이기 때문에 현재 에디 쉬록 의원이 에이즈 환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사를 강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에디 쉬록 의원이 에이즈 환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 파트너가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에디 쉬록 의원도 에이즈 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유권자들이 가지는 순간······.

선거는 해 보나 마나였다.

아니, 존 베비스는 에디 쉬록 의원이 선거를 완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할 일은 폭탄을 적절한 시점에 터트리는 것뿐이었다.

시작은 당연히 TV 토론회가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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