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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나쁜 일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1.
- 자네가 보낸 자료는 잘 받았네. 꽤 자세한 내용까지 있더군. 큰 도움이 될 것 같네. 고맙네.
존 베비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하긴 그 정도 자료라면 선거는 보나 마나였다.
평소 동성연애를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공화당 의원이 사실은 동성연애자였다?
이건 동성연애에 대해 부정적인 공화당 후보가 아니라 민주당 후보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유권자가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이 바로 거짓말을 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올 초 미국 정치권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가 됐던 민주당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여대생의 실종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서 가장 미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의원이 실종된 여대생과 불륜 관계였다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정치인의 불륜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었다.
이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초기부터 쏟아져 나왔던 수많은 여성 스캔들에도 대통령이 되고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여대생 실종 사건에서 국민이 분노한 것은 민주당 의원이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의원이었고 평소에 가족애를 강조했던 의원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가장 분노한 것은 여대생이 실종됐을 당시 불륜 사실을 숨겨 여대생 실종을 조기에 조사할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동성애자를 비판한 위선자라는 것은 선거에서 치명적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직접 가서 선거운동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멀리서나마 돕겠다고요.”
- 그랬지. 그 도움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아시겠지만······. 아직 예비선거 기간이니 자료 유출에 주의해 주십시오. 자칫 공화당 쪽에서 우리가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후보를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 당연하지. 그렇지 않아도 후보 토론회에서 터트릴 생각이네.
존 베비스가 말했다.
“TV 토론회라······ 좋네요.”
- 모두 자네 덕분이네. 그런데 자네 지금 인도네시아에 있다고?
존 베비스가 물었다.
“예. 일 때문에 잠시 나와 있습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러시는 것인지?”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 하······. 자네 퇴사하더니 그쪽과는 아예 소식을 끊고 사나 보군.
존 베비스가 말했다.
“인도네시아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 무슨 일인지는 전화상으로는 말하기가 그렇고······. 어쨌든 지금 당장······ 되도록 빨리 인도네시아를 떠나게.
존 베비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홍콩으로 떠나는 항공편을 예약했다.
무슨 일인지는 일단 인도네시아를 떠난 다음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2.
내가 떠난다는 말을 들은 주치앙은 자카르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아쉽네요. 조금 더 자카르타에 머무시면 좋았을 텐데······.”
“다른 일을 하다가 광산 문제 때문에 급하게 온 것이라서요. 그리고 W&R 홍콩 본사에 들러야 하고요.”
“일 때문이라니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자카르타에 오시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대인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며칠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요. 주 대표님의 아저씨분께도 이야기 잘해 주십시오.”
나는 주치앙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주치앙의 인맥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주치앙의 아저씨였다.
그는 골카당과 인맥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측을 도움을 주었다.
그런 사람이 만나자고 하는데도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것은 상대가 불만을 느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아저씨께는 제가 잘 말씀드렸습니다. 아저씨도 아저씨지만 외할아버지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외할아버지라면 그 아스트라 그룹의······.”
“맞습니다.”
주치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치앙의 외할아버지는 인도네시아 최대 기업인 아스트라 그룹의 창업주인 윌리엄 소에야다야였다.
하지만 소에야다야 가문은 아스트라 그룹에 아무런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윌리엄 소에야다야가 1990년대 다른 가족 회사를 도우려고 아스트라 그룹의 모든 지분을 매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최대 기업을 세우면서 쌓은 인맥과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스트라 그룹을 지배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소에야다야 가문은 여전히 부유한 가문이었다.
“시 대인은 저도 평소 존경하는 기업인이라서 한번 뵙고 싶은 분이었는데 참 아쉽네요.”
시 대인은 당연히 윌리엄 소에야다야였다.
윌리엄 소에야다야의 중국 이름은 시진언롱(謝建隆)이었다.
나는 화교인 주치앙에게 조금 더 친근함을 보여 주기 위해 그를 중국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화교는 자신들끼리는 중국어로 대화하고 중국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다음에 오시면 제가 꼭 약속을 잡겠습니다.”
주치앙이 말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한 것에 기쁜 표정이었다.
“저도 꼭 뵙고 싶네요.”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올 때는 시간을 내서라도 만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3.
나는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갔다.
홍콩 집에는 CIA 보안 회선과 연결된 컴퓨터가 있었다.
보안 회선을 통해서 CIA 정보망에 접속했지만, 인도네시아에 대한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아니 적어도 존 베비스가 당장 나에게 인도네시아를 떠나라고 할 만한 정보는 없었다.
‘뭐지? 외부 접속망에도 나오지 않는 정보인가?
당연히 CIA 보안 회선이라고 해서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 접속으로 볼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보안 회선을 통해서 접속하더라도 몇 가지 절차만 거치면 내부 정보망에 접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외부 접속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외부 정보망으로 제한되고 내부 정보망에 접속할 수는 없게 변경되었다.
만약의 경우 보안 회선과 연결된 컴퓨터가 탈취당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개구멍은 항상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금고 하단에서 플로피디스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플로피디스크에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잠시 외부 접속으로는 볼 수 없는 내부 정보망이 화면을 채웠다.
플로피디스크에 들어 있는 프로그램은 내가 에디 미첼에게 받은 프로그램을 내가 조금 고친 것이었다.
에디 미첼이 어떻게 이런 방법을 찾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실수로 남겨 놓은 것인지 아니면 에디 미첼이 따로 사람을 고용해서 만든 것인지······.
나도 굳이 묻지도 않았고 그가 죽은 이상 이제 물을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내부 정보망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접속한 내부 정보망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제마 이슬라미야라는 단체가 인도네시아에서 테러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이런 미친 새끼들······.’
나는 욕이 저절로 나왔다.
911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당연히 미리 경고를 해 줘야 하는데······.
나름 CIA 인도네시아 지부와 가까운 나도 제마 이슬라미야가 인도네시아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심지어 이반 부카드마저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4.
내가 홍콩에 온 날 저녁 리안이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서재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내가 일하고 있던 책상의 물건을 치우고 거기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홍콩에는 무슨 일이야?”
리안이 물었다.
“뭐긴 뭐야, 인도네시아 일을 보고하러 왔지. 투자 계획도 이야기할 때도 됐잖아.”
내 대답에 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대주주께서 일개 직원들에게 보고하러 직접 왔다고?”
“왜 이래. 이번 일은 대주주가 아니라 프리랜서로 처리한 건데······. 당연히 수고비도 받을 생각이야.”
“하여간 말은······.”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인도네시아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자세히 듣고 싶었는데······. 전화로는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해서 말이야.”
말을 마친 리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서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알았어.”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하자.”
소파로 가서 앉은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리안에게 인도네시아 사정에 관해 설명했다.
물론 CIA와 관련된 내용은 빼야 했기 때문에 약간 내용을 바꿔야만 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을 통해서 군부를 움직이고 다시 그 군부가 킬라만탄주 정부를 움직여서 일을 해결했다는 말이군.”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조금 위험한 것 아니야? 네 말대로라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이 대권을 노린다는 것인데······.”
“맞아, 대권을 노리는 거. 인도네시아의 주치앙 대표도 비슷한 생각이더군.”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위험한 거 아니냐고······. 네 말대로라면 지금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이 정적, 특히 다음 대선에 나올 정적을 제거하는 중이라며······?”
“그렇지.”
“그럼 대권을 노리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도 위험하고 덩달아 우리도 위험해지는 거잖아. 그런 위험을 질 필요가 있어?”
리안이 물었다.
“채굴을 재개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대통령이 되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 같지도 않아.”
내 말에 리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원 펀드 시작하면서 나도 인도네시아를 조사해 봤는데······.”
리안이 내 얼굴을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의 민주당은 다음 총선에서 기껏해야 5% 얻으면 기적이야. 나도 들어 보니 다음 대선은 개정된 인도네시아 헌법을 기반으로 치러지는데 거대 정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하던데?”
나도 얼마 전까지 리안과 같은 생각이었다.
내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쪽의 만남 요청을 거부한 이유였다.
하지만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지금은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내가 말했잖아, 이번에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인 골카당의 당수가 사실상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졌다고······.”
“그렇기는 하지만······.”
“여당에서야 현 메가와티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 나올 테고 야당에서는 누가 나올까?”
인도네시아의 대선에서 가장 유리한 것은 거대 정당의 후보들이지만 군소정당의 후보라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는 1차 선거에서 후보가 과반을 얻지 못하면 결선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다음 대선에서 메가와티 대통령이 50%를 얻을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없었다.
수하르토 정부 붕괴 직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메가와티 대통령의 인민혁명당이 얻은 득표율이 30% 중반이었다.
결국, 다음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메가와티 대통령과 야당에서 가장 많은 후보 간의 결선투표에서 결정된다고 봐야 했다.
“그게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이라는 거야?”
“꼭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이 야권의 대선 주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다음 대선까지는 2년 가까이 남았어. 그사이에 판을 흔들 사건이 일어난다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내가 말했다.
“난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대통령이 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네 생각이 대부분 들어맞은 것을 보면 정말 대통령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당장 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일단 지켜보고 상황 변화에 따라서 행동하면 될 것 같아.”
“알았어.”
리안이 대답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민주당이 다음 총선에서도 군소정당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군 장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하르토의 군부 독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국민이 다시 군 장성 출신을 대통령으로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그가 군 장성 출신치고는 이미지가 좋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군인 출신이었다.
군부 독재 기억이 생생한 인도네시아 국민이 군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런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에 관한 생각을 바꾼 이유는 조금 전 본 제마 이슬라미야의 테러 정보였다.
만약 CIA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 테러를 막지 못한다면?
치안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기 마련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군 장성 출신 중에서 그나마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사람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뿐이었다.
테러가 일어나고 그렇게 흔들린 판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장관이 잘 이용만 한다면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CIA 인도네시아 지부는 이번 테러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이번 테러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에게만 기회가 아니었다.
이라크를 공격할 명분을 찾는 미국 정부에게도 기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게 하고······. 인도네시아 지부 대표 말이야.”
“주치앙 말이지?”
“그래, 괜찮더라. 인도네시아 일은 어느 정도 맡겨도 될 것 같아. 무엇보다 인맥이 좋던데.”
내 말에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주치앙이 인도네시아 화교 중에서는 인맥이 아주 대단하지.”
“그렇더라.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지분도 주고 시간이 지나서 자리 잡히면 그쪽 집안과 합작으로 회사를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지분도 주고 나중에 합작회사를 만들자고? 뭐 하러?”
“지금대로라면 몇 년 안에 자기 집안 회사로 갈 것 같더라.”
“하긴 얼마 전에 주치앙 친가와 외가가 같이 투자회사 차렸다고 했던데 거기로 갈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이왕이면 어느 정도 이익이 줄어들더라도 인도네시아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하게 맡기자는 말이야. 언제까지 이번처럼 우리가 인도네시아 일까지 다 처리할 수는 없잖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아저씨에게 이야기할게.”
리안이 말했다.
나로서는 홍콩 일도 리안에게 맡기는 상황에서 그보다 규모가 작은 인도네시아 사업에 언제까지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 관심은 유럽과 미국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