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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실력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1.
리안이 주치앙에게 인도네시아 자회사에 대한 전권과 지분을 주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리안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은 인도네시아 자회사는 상징성과 비교하면 금액적인 측면만 보면 큰 사업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원 펀드의 첫 번째 사업이 아니라면 인도네시아 자회사는 W&R 전체 사업에서 큰 부분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석탄 광산 문제로 내가 직접 움직인 이유도 당연히 돈 때문은 아니었다.
현재 모인 투자액은 겨우 몇천만 달러 수준이고 투자하겠다고 이야기한 금액을 모두 합쳐도 몇억 달러에 불과했다.
단지 W&R이 처음으로 외부 투자자를 받아들인 펀드였기 때문에 신경 쓴 것에 불과했다.
인도네시아 문제를 이렇게 결정한 나는 다음 주 투자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 투자 전망 말인데······.”
“너는 어떨 것 같은데?”
“현재 하락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주가가 또 내려간다고?”
다음 주에도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 주야 소비자 신뢰 지수 하락으로 떨어졌다지만 그래도 다음 주에는 오르지 않겠어? 소비자 신뢰 지수 때문에 하락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악재라고 하기는 어렵잖아. 그럼 회복할 때가 된 것 아니야?”
“주가 흐름만 보면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때가 때잖아.”
“지금이 어떤 때인데? 다음 주에 특별한 일이 있나?”
리안이 물었다.
“곧 911 일주기잖아. 더구나 지금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로 한창 시끄럽고 말이야.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항상 진실은 아니지만 주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911이라······. 난 잘 모르겠네. 911이 큰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주가에 그렇게 큰 영향을 줄까?”
리안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리안의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911 테러는 미국에는 큰 충격이었지만 아무래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홍콩에 사는 리안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우리야 911 테러와는 관계없이 투자로 이익을 얻었지만 다른 투자자들은 대부분 911 테러로 큰 손해를 봤잖아. 너 같으면 작년 이맘때 투자로 엄청난 손해를 봤는데 투자하고 싶겠어?”
“하긴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만약 리안이 911 테러로 손해를 봤다면 아마 911 테러 일주기가 돌아오는 사실을 신경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자자가 911 테러로 큰 손해를 본 것과는 달리 꽤 큰 이익을 얻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911 테러 이전부터 하락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911 테러로 인한 주가 하락에도 이익을 본 셈이었다.
“그럴 수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렇다니까. 더구나 요즘 미국 분위기가 정말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고. 당장 백악관은 이라크와 전쟁할 명분을 찾고 있고 무엇보다 지금이 미국 예비선거 기간이잖아. 정치인들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떠들고 있는데 네가 작년 911로 큰 손해를 봤다면 이런 때 투자하고 싶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도 터키에 투자했다가 된통 당한 이후에 잔소리하는 투자자들에게 질려서 아시아 부서로 옮겼잖아. 그러다가 너를 만난 것이고······.”
리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꽤 지난 일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표정이었다.
“그때 너를 괴롭혔던 투자자들에게 고마워해야겠는데······.”
“고맙기는 무슨······.”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지만, 터키 주식 시장이 폭락해서 청산한 다음에도 처음 투자금에 비하면 손해는 아니었다는 거야. 이익이 줄어든 것 가지고 얼마나 난리였는지······.”
“꽤 시달렸나 보네.”
“그때 얼마나 전화를 해 댔는지 한동안 전화받기가 두려웠다니까. 어휴,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네.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더 웃긴 거라니?”
“그때 나에게 따졌던 고객 대부분이 나중에 너하고 투자를 시작하고 난 후에 어디서 내가 잘나간다는 말을 들었는지 다시 투자금을 맡기겠다고 전화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지난번에 내가 투자해서 손해를 끼쳤으니 이번에는 잘나갈 때 내가 자신의 투자 금을 받아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고생했네. 어쨌든 고마운 분들이네.”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할래? 하나도 안 고맙다니까.”
“아니, 너 말고 내가 말이야. 그 고객들 아니었으면 아시아팀으로 옮기지도 않았을 테고 나하고 만나지도 못했을 것 아니야. 나한테는 고마운 분들이지.”
“너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뭘?”
“몇십만 불로 시작해서 만 배 가까이 투자금을 늘린 놈이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리안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인도네시아에서 느낀 게 많아. 생각해 보면 처음이야 내 능력이나 운으로 투자금을 늘렸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진 다음에는 너나 카이황 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너 때문에 얻은 게 더 많지.”
리안이 말했다.
“그건 그래!”
내가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요즘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리안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이 나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리안은 내가 아니었어도 재산이 많았고 홍콩 명문가의 후계자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의 재산을 모았다.
내가 더 중요한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얻은 것도 내가 훨씬 더 많았다.
절대적인 재산 증가 총액에서나 비율 면에서나······.
특히 이번에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금액에 비해서 한국에서 내가 훨씬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주치앙을 통해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인 군부를 움직여 문제를 간단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겨우 전직 검사 하나를 만나는 것도 거절을 당했다.
그 차이는 인맥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투자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때는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차입금을 최대로 사용했을 때였다.
내가 파생 금융 시장을 시작할 때 작년 초중반 나스닥의 주가가 하루 이틀 일주일 사이에 10% 이상 올랐다가 떨어지는 변동성이 높은 장세였던 것이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투자는 위험성도 컸고 실제로 내가 혼자서 계속 그런 투자를 이어 갔다면 곧 투자금 전부를 잃었을 것이다.
나스닥 선물이나 옵션 모두 포지션 청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거대한 자금을 굴리는 투자자들이 순간적으로 주가를 움직여 나 하나쯤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아니 어떻게 포지션 청산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그런 미친 투자로 계속 성공했다면 미국 금융 당국의 감시를 피할 수가 없었을 테고 결국에는 CIA에 나에 대한 정보가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위험들을 막아 준 게 중국 고위층의 자금 흐름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류오린의 시스템이었다.
일개 직원인 내가 그런 류오린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리안 도움 덕분이었다.
2.
인천공항에 도착해 휴대전화를 켜자 열 통이 넘는 부재중 통화 기록이 보였다.
리안이었다.
내가 지금 전화를 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 중에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 이건 뭐야?
리안이 다짜고짜 물었다.
“다청의 임순에게서 설명 못 들었어?”
- 들었지. 그런데 이게 뭐냐고?
“뭐긴 뭐야, 싱가포르에 있는 회사를 내가 너에게 넘긴다는 서류지. 거기 서명하면 임순이 나머지는 처리할 거야.”
- 그러니까······. 이걸 왜 나에게 넘기냐고?
“이름뿐인 회사라서 불만이야?”
- 이름뿐인 회사? W&R 지분 2%를 가진 회사가 이름뿐인 회사야?
“왜, 2%로는 부족해?”
- 야! W&R 지분 2%면 지금 얼마에 팔 수 있는 줄 알아! 우리 예비 장인어른이 내 지분 1%를 2억 달러에 사시겠다더라······.
“장인 어르신 돈 많으시네. 좋겠네. 예비 장인어른이 부자라서······.”
- 내 말이 그게 아니잖아.
“그냥 받아. 너도 주치앙에게 인도네시아 자회사 지분 넘기는 것 찬성했잖아. 그것과 똑같아. 최대 주주로서 더 열심히 일해 달라고 주는 뇌물이야.”
- 너······.
“그럼 나는 경호원이 마중을 나와서 이만 끊어야겠다.”
나는 전화를 끊고 마중을 나온 랄 바하두르에게 다가갔다.
내가 뒷좌석에 타자 랄 바하두르가 문을 닫고 앞으로 가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일단 집으로 가죠!”
내가 말했다.
3.
한국에 온 다음 날 나는 W&R 한국 지사의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제러미 하, 정윤호, 마상혁과 서울 근교 별장으로 불러 모았다.
이 세 명 외에도 정윤호의 후배로 부동산 사업을 돕고 있는 강윤호도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부동산 투자에만 관여할 뿐 내가 하려는 일과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딴 산속에 홀로 있는 별장은 꽤 규모가 있었다.
정윤호가 부동산 투자를 하다가 만난 사업가에게서 빌린 별장이었다.
우리는 별장 창가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잠시 바라보았다.
“별장 좋네요. 보안도 괜찮고요.”
별장이 있는 위치가 좋아서 아래를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주인이 예전에 경기도 일대에서 꽤 사업을 했던 인물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적을 많이 만들어서 이런 곳에 별장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정윤호가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옆에 있던 마상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 적요? 무슨 일을 하면 이런 곳에 별장을 만들 정도랍니까? 이건 조금 보안만 하면 요새나 마찬가지겠는데요?”
마상혁의 말에 정윤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주먹 세계 쪽이라는데······ 특히 일본 쪽과 사업을 크게 했다고 하더군요.”
“일본 쪽이면 마약이나 밀수?”
마상혁이 정윤호를 보며 물었다.
“뭐 상관있나?”
“선배님 많이 타락하셨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놈들과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니죠.”
“걱정하지 마! 원래 주인은 지금 병원에서 몇 년째 오늘내일하고 지금 관리하는 것은 아들인데······ 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으로 마카오나 다니는 한량이니까.”
정윤호가 대답했다.
“마카오라······. 이것 잘하면 뭔가 나오겠는데요.”
마상혁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한번 작업해 볼까요? 우리도 이런 별장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마상혁에 말에 주위를 둘러본 정윤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할 때야! 대표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부르신 것을 보면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는 거잖아.”
정윤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다시 모였다.
“뭐······. 제가 하려던 이야기도 마 소장님 이야기나 다를 게 별로 없는 이야기인데······.”
“예? 무슨 말씀이신지?”
내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투자만 하니 저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요. 적당한 회사를 인수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되도록 싸게 사면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