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67화 (268/270)

(267)

#268. 때로는 지고 때로는 이긴다.

기업을 인수하겠다는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제러미 하, 하성철이었다.

“투자 방침을 바꾸시겠다는 의미입니까?”

“어차피 지금처럼 선물 옵션과 개별 주식에 대한 단기투자를 계속 끌고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한국의 금융시장은 경제 규모와 비교하면 거래량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파생 금융시장은 911 이후 선물 옵션 거래량이 급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W&R 한국 지사의 투자 규모는 이미 이런 급증하고 있는 거래량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투자한 이후에 그 투자를 따라 하는 세력들을 따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증권사에서 우리 투자 정보를 빼돌려 투자하는 일은 한국에서 투자를 시작한 초기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말 그대로 투자 정보가 유출된 것이었다.

지금은 지사가 투자하는 금액이 커지다 보니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선물 가격이 움직이고 회사의 주가가 급등할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다른 증권사나 금융기관의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세력이나 금융기관들이 우리 투자를 따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자했다가 그 정보를 들고 몰려온 세력들에게 물량을 떠넘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계속 쓸 수는 없었다.

몇 달 전부터는 어느 정도 다른 금융기관들이 우리 투자를 따라 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도 투자 방침을 바꿔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지금도 투자 수익률이 다른 곳보다 높기는 하지만 전보다는 많이 낮아졌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을 인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인수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제러미 하의 반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강했다.

“인수하기가 쉽지 않다고요?”

“예. 현재 W&R 한국 지사는 100% 외국 회사입니다. 외환 위기 이후에 한국에서 외국 기업이 한국 회사를 인수하는 것에 법적으로 쉬워진 면은 있지만, 한국 국민 중에는 외국계 기업이 한국 기업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한국에서 맥주 시장 점유율 1위인 맥주 회사가 외국 회사 자회사 아닙니까? 은행도 해외 사모펀드에 넘어간 은행이 있고요.”

“그건 외환 위기 직후라서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것이지 지금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르다?”

“예. 당장 마이크론의 가이닉스 인수가 실패한 것도 물론 인수 가격이 주요 이유이지만 한국 국민의 감정과 노조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GM이 우주자동차를 인수하는 과정에서도 국민 반감과 노조의 반발이 거셌고요.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도 GM이 우주자동차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제러미 하가 나를 바라보았다.

“당장 그런 기업들을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기업을 인수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정확하게는 당장은 금융 관련 기업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증권이라든가 대현증권이라든가 대현투자증권 같은 기업들이요. 마침 두 증권사가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증권사라면 반발이 적기는 하겠지만 우주증권이나 대현증권은 인수하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모기업이 해체되고 위기에 빠져서 매물로 나오기는 했지만 두 증권사 모두 몇 년 전까지 증권사 1, 2위를 다퉜던 기업입니다. 실적이야 우리를 따를 투자사가 없지만 그런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래서요?”

나는 제러미 하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누군가 내 의견에 반대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평소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그렇듯 당해 보니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이야기해 보세요.”

내가 물었다.

“우선 대표님의 목적을 분명히 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라고요?”

내가 되물었다.

“예. 대표님이 기업을 인수하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단지 투자 방향을 바꿀 때가 되어서 바꾸려는 것인가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인가요?”

제러미 하가 물었다.

“그야 둘 다인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굳이 지금 상황에서 기업을 인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지사 상황을 생각하면 기업을 인수하더라도 인수한 기업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아니, 여력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투자에 더 전념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마상혁이 끼어들었다.

“인수한 기업이야 전문 경영인을 영입해서 경영을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요?”

마상혁의 말에 제러미 하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마 소장님의 말도 맞지만, 증권사나 투자사 같은 기업들은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과는 다릅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기업인 만큼 조직을 장악하고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전문 경영인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게 되면 대표님이 원하시는 간판으로 사용하기도 어렵고요.”

“어렵네요.”

마상혁이 말했다.

마상혁의 말이 바로 내 생각이었다.

내가 류오린에서 근무하고 W&R을 설립했다고는 하지만 금융기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다른 사람 특히 카이황에게 맡겨 왔다.

“누군가에게 보여 줄 목적이면 굳이 회사를 인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회사를 인수할 필요가 없다고요?”

“예. 말씀하신 회사들에 투자해서 정상화한다고 해도 지금 회사가 벌어들이고 있는 수익률에 비하면 현저하게 낮습니다.”

이번에는 정윤호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대표님이 회사를 인수하려고 하는 것은······.”

“압니다. 정 대표님이 저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번 한국 대선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정치권에 보여 줄 간판이 필요하신 것 같은데······. 그런 이유라면 회사의 자금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금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흥미 있는 이야기였다.

기업 인수는 W&R의 이름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해서 내놓은 해결책일 뿐이었다.

어차피 기업을 인수해도 내가 직접 경영할 생각은 없었다.

“정치인 중에 돈 많은 부자를 싫어하는 정치인은 없으니까요. 당장 인수하신다는 우주증권과 대현증권의 시가총액은 각각 1조 1천억 원과 9천 5백억입니다. 이런 기업을 인수할 자금력을 가진 회사 관계자가 만나자고 하는데 거절할 정치인이 있을까요?”

제러미 하가 말했다.

우주증권이나 대현증권 인수를 일종의 블러핑으로 이용하자는 말이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내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 장이 개장되면 우주증권이나 대현증권 주식을 2%나 3% 정도 시장에서 구매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왕이면 말보다는 행동을 함께 보여 주면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주식까지 매입하자는 말입니까?”

“인수하는 말로만 끝나기보다는 주식을 매입까지 하면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W&R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금융권 밖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단번에 3%나 4% 정도 주식을 매입하면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 겁니다. 마침 3분기 금융주 실적 개선 기대로 주가가 오른다는 전망이 있으니 투자로도 나쁘지 않고

요.”

제러미 하가 주식 매입을 제안했다.

“지금 증권주를 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도대체 누가 그럽니까? 3분기 증권회사 수익이 높아진다고요?”

“다른 증권사의 보고서를 보면······.”

“다른 회사 보고서를 제 말보다 더 믿는 겁니까?”

제러미 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증권사 수익률은 결국에는 주가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했지만 지난주에 이어서 다음 주도 전 세계 주가가 하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전망도 그리 밝지 않고요.”

“그럼 증권사를 인수하신다는 말씀은?”

“증시가 나빠지고 우주증권이나 대현증권의 주가가 내려가면 우주증권의 주 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이나 대현 그룹으로서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그때 인수할 생각이었죠. 두 증권사의 실적이 좋으면 돈이 있다고 우리가 업계 1, 2위 증권사를 인수할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제러미 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렵겠죠.”

“증권사 인수는 올해 하반기 한국 주가 하락으로 증권사 전망이 어둡다는 예상에서 나온 계획이었습니다. 도대체 W&R의 유가증권 투자를 책임지시는 분이 우리보다 훨씬 수익률이 나쁜 다른 기관의 보고서를 그대로 믿으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내 말에 제러미 하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런 제러미 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러미 하가 내 인수 계획을 반대할 때만 기분은 나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내가 들어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의 말대로 거액으로 증권사를 인수하지 않고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굳이 수익성도 낮은 회사를 인수할 필요가 없었다.

제러미 하는 한국 시장에서 유가증권 투자 부분 책임자였다.

그가 능력이 뛰어나서 나쁠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지사는 개별 기업 주식에도 단기투자를 하다 보니 내가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제러미 하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한국 시장 투자를 맡길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국 기관들이 낸 보고서를 보고 투자 제안을 하다니······.

이건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나는 제러미 하에게서 마상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 소장님, 일 좀 하나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마상혁이 대답했다.

그의 말소리는 긴장감이 들어 있었다.

직전에 바로 눈앞에서 제러미 하를 내가 꾸짖은 것에 영향을 받은 듯 보였다.

“여기 있는 하 대표에게 자료를 받아서 한국 언론사에 W&R 한국 지사에 관한 기사 좀 내보내 주십시오. 정확한 숫자는 밝히지 말고 홍콩 투자 법인의 한국 지사가 지난 1년간 한국에서 대단한 수익률을 올렸다더라······. 뭐 이런 논조로요.”

“알겠습니다.”

마상혁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런 기사가 나면 날파리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그건 어쩔 수 없죠. 어차피 한국 지사가 한국 기업들에 투자하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여의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인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형성되면 W&R 한국 법인이 본격적인 한국 진출을 위해서 우주증권이나 대현증권을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 주십시오.”

“아······. 예, 아는 기자들 만나서 처리하겠습니다.”

마상혁이 대답했다.

나는 시선을 다시 제러미 하에게로 돌렸다.

“하 대표님!”

“예!”

제러미 하가 대답하며 나를 향해 몸을 세웠다.

그의 표정에는 평소 보여 주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금융권에서 인수할 만한 적당한 기업 알아봐 주세요. 인수했을 때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으로요.”

나는 제러미 하에게 인수할 기업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건 그에 대한 시험이었다.

만약 그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찾을 생각이었다.

내가 한국에 계속 있을 수 없는 이상 한국 지사를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다.

직원 중에서 제러미 하보다 더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W&R 본사나 한국 지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제러미 하를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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