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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대가를 지급한다고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1.
박일환은 여의도 국일빌딩 사무실로 김희중을 불렀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 격조······.”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인가! 물어볼 말이 있으니 거기 앉게!”
김희중은 서둘러 소파로 가서 박일환의 옆에 앉았다.
박일환은 검사장 시절부터 부하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배 검사의 조인트를 차는 것으로 유명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네. 여의도에 W&R이 우주증권이나 대현증권을 인수할 거라는 찌라시가 돌고 있다고 하던데······.”
“그건 저도 봤습니다.”
“정말 그 회사가 두 증권사를 인수하는 게 사실인가?”
박일환이 물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주 그룹이 망하기는 했지만, 우주증권이라면 한국에서 가장 큰 증권사인데 이름도 처음 들어 본 회사가 인수하는 게 가능하다고?”
“홍콩 본사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아보니 한국 지사만 지난 1년 사이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우주증권을 인수하려면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해야 하지 않나?”
우주증권은 우주 그룹이 파산한 이후 다른 계열사처럼 우주 그룹 청산에 관여한 산업은행의 최대 주주였다.
“맞습니다.”
“우주증권 산업은행 지분이······?”
“43%입니다. 우주증권 시가총액은 1조 2천억 원 정도이고요.”
“시가총액이 1조 2천억 원이고 지분 43%면 프리미엄까지 하면 적게는 7천억에서 많게는 1조 원은 있어야 할 텐데 그 정도 여력이 있다고?”
“홍콩 쪽 인맥을 통해서 알아보니 W&R이 지금 홍콩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금융회사라고 합니다. 홍콩 부호들은 물론이고 중국 부호들까지 서로 투자하겠다고 줄을 선다고 하더군요.”
“그래?”
“예.”
김희중이 대답했다.
“지난번 자네가 한번 만나 보라는 했던 사람이 바로 거기 한국 지사 대표였지?”
“한국 지사 정식 대표는 아닌데······ 홍콩 본사 창업 멤버라서 한국 지사 대표보다 영향력이 크다고 합니다.”
“이거 내가 실수했군. 그런 거물인 줄 알았으면 만나야 했는데 말이야.”
“그때야 그럴 만하지 않았습니까. 선거가 반년도 남지 않았는데 수상한 외국인 투자회사 사람을 만나서 입방아에 오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수상하기는 하지만 돈이 많지.”
박일환이 말했다.
박일환의 말에 김희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거 자금이 모자란 겁니까? 제가 듣기로는 대현과 엘제이에서······.”
박일환이 말을 흐렸다.
아무리 비선 캠프 사무실이라고 해도 문제가 될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선거 자금이야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지. 더구나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선에서 압승이 그냥 나왔겠나? 아무리 우리가 유리했어도 자금이 꽤 많이 나갔어. 더구나 곧 있으면 장우진이 출마를 공식적으로 발표한다는 정보야. 장우진이 누구야, 바로 대현 그룹 아들이잖아.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지.”
“그렇죠.”
“지금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게 우주증권 인수를 부탁하려는 것 같아. 우주증권 인수를 진짜로 할 생각이면 정부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김희중이 말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우주증권 주채권이자 지분 43%를 가진 산업은행은 정부 국책은행이었다.
한마디로 우주증권을 매각할 결정권을 가진 것은 정부라는 의미였다.
한국 금융기관도 아니고 외국계 회사가 한국 최대 증권사를 인수하려면 정부의 허가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말인데······. 외국계 회사니 뒤탈도 없을 것 같고 우주증권 인수를 허가해 줘도 외자 유치라는 명목으로 포장하는 것이 어렵지도 않고 말이야. 자네 아직 그쪽과 연락되겠지? 지난번 소송 처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 않나.”
“그게······.”
김희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완전히 종결됐습니다.”
“그래도 W&R 쪽과 연락이 될 것 아닌가? 다리 좀 놓아주게.”
박일환이 말했다.
박일환의 말에 김희중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박일환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알아봤는데 W&R 대표 중 한 명이 여당 선거 캠프에서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순간 박일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미친놈들 아닌가? 끈 다 떨어진 여당에 붙어서 뭘 하겠다는 거야?”
“아무래도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당과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임기 중에 우주증권을 매각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까요.”
선거는 연말이지만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것은 다음 해 2월이었다.
아직 6개월이나 남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정권 바뀌고 그놈들이 무사할 것 같아!”
박일환이 소리쳤다.
“홍콩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돈세탁해서 흔적을 지우는 것은 문제도 아닐 테고요. 그리고······.”
“그리고 뭐? 또 뭔데?”
“지난번 선배님과 만나게 하려고 했던 사람 말입니다······.”
“홍콩 본사 사람이라면서?”
“홍콩 본사 창업 멤버이기는 한데 지금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홍콩 금융기관 사람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예! 주한 미국 대사관에 엘리어스 사무관이라고 대사관에서도 실세라고 불리는 젊은 사무관이 있는데 그 측근이라고 합니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다면 진작 이야기했어야지! 갑자기 홍콩 금융기관에서 일하다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게 우연일 리는 없고······. 더구나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여전히 투자회사 일에 관여하고 있다면······. W&R이라는 회사가 미국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홍콩 내에서도 W&R은 갑자기 이름이 알려진 회사라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홍콩에 있는 자네 지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W&R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게. 미국 쪽 자본이 투자된 회사라면 한국에서는 건드리기 어려워······. 어쨌든 이거 큰일이군. 지금 우리가 압도적으로 여당 후보를 따돌린 것은 대통령의 레임덕도 레임덕이지만 우리 쪽에서 자금을 푼 결과인데 저쪽에서도 자금을 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설마 이미 다 끝난 선거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아까 말했지만, 우주증권을 인수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7천억은 들어. 리베이트를 10%만 풀어도 7백억이야. 7백억이면 선거 판세를 바꾸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야. 돈만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는 없지만 돈은 쓰면 영향이 없을 수는 없어.”
“그래도 설마 여당 후보에게 지겠습니까?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이 10% 조금 넘던데요?”
“장우진 쪽은 생각 안 하나? 아직 출마 선언도 하지 않았고 조직도 없지만, 지지율은 우리 쪽과 큰 차이가 없어. 더구나 어차피 W&R로서는 쓴 만큼 정부와 여당에서 알아서 인수 대금을 깎아 줄 테니······. 선거에서 이기면 좋고 져도 2월 안에 인수만 끝낼 수 있으면 되니 잃을 게 없는 싸움이야.”
현재 시장에서 우주증권의 인수 대금으로 7천억 정도를 예상하지만, 현재 주가대로라면 산업은행 지분 가치는 5,100억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7천억은 50% 정도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인 금액이었다.
여기에 국내 증권사 중 1위를 인수한다는 프리미엄과 외국계 회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현재 주가의 200%인 1조 원까지도 가능했다.
하지만 반대로 외국 자본 유치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7천억 이하에서 인수 금액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산업은행이 인수 프리미엄으로 얼마를 책정하느냐는 전적으로 정부의 결정이었다.
700억을 써서 인수 대금을 몇천억을 아낄 수 있다면 W&R로서는 해 볼 만한 싸움이었다.
나중에 정권을 잡은 이후에 문제로 삼는다고 해도 분명한 증거가 없는 이상 정책 결정을 법으로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90년대야 선거에 몇천억이 들었지만, 지금은 700억도 큰 금액이었다.
여당 후보의 지지율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700억이면 판세를 바꾸는 게 아주 불가능한 금액도 아니었다.
선거에서 자금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느냐는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쓴 수백억으로 대세론을 굳힌 박일환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만약 박일환 자신이 만나자는 요청을 거부해서 저쪽으로 그 자금이 넘어간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그때는 끝이었다.
설사 당선된다고 해도 이번 무사히 당선된다고 해도 이번 실수가 알려지면 당선 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자신은 철저하게 제외될 가능성이 컸다.
“그쪽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지난번에 날 만나려고 했던 에드릭인가?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내가 만나고 싶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2.
“회사로 대하의 김희중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박일환 전 검사장 쪽에서 약속을 잡았으면 한다고요······.”
마상혁이 말했다.
“정 대표님이 여당 캠프에 참여했다는 정보가 잘 전달됐나 보네요.”
내가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정 선배님이 W&R 명함을 캠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돌렸다니 당연히 그쪽도 들었겠죠. 그나저나 정보지 때문인지 명함을 여당 캠프 내에서 은근히 자금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마상혁이 물었다.
“일단 지난번 지원한 돈에서 소소한 경비 지출은 하라고 하세요. 적당한 수준에서요.”
“저쪽에서 원하는 것은 좀 규모가 크다고 하던데······.”
“그건 일단 보류하라고 하세요. 규모가 크다고 해도 정보지를 통해 우리가 우주증권을 인수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들은 이상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을 겁니다.”
마상혁은 자신이 발행하는 정보지를 통해 W&R이 우주증권을 인수한다는 내용 후속타로 W&R 한국 지사의 자금력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을 흘리고 있었다.
W&R 자금력이 알려진 상황에서 몇억 정도 건네준다고 해도 그 정도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런 사소한 자금 지원은 오히려 나중에 문제가 될 여지가 컸다.
“알겠습니다.”
“일단 회사에는 나와 W&R 한국 지사와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저쪽에서 믿겠습니까? 이미 지난번에 회사 일로 대하를 찾아갔는데요?”
“안 믿겠죠. 하지만 안 믿으면 어쩔 건데요? 최근에 내가 회사에 가지 않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저쪽도 W&R 자금력이 혹시 여당 후보 측에 가는 것 아닌가 해서 신경을 쓰는 정도지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만나도 나중에 만나야죠.”
“그럼 언제쯤?”
마상혁이 물었다.
“장우진 쪽은 언제 출마 선언을 한다고 합니까?”
“이번 달 중순 정도에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장우진 쪽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전에 정리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대현 그룹 창업자 손자인 장우진은 대현중공업의 최대 주주이자 사주였다.
자기 명의로 가지고 있는 대현중공업의 주식이야 명의 신탁하면 그만이지만 그건 알려진 지분일 뿐이었다.
장우진은 알려진 주식 말고도 차명 주식과 비자금까지 선거에 나오기 전에 정리할 일이 많았다.
“그럼 그 출마 선언 이후에나 봐야겠네요.”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그쪽에서 먼저 접촉할 수도 있습니다.”
“홍콩에 나가 있을 생각입니다. 당사자가 한국에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최대한 유리한 상황에서 박일환이 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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