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AO / 직작 / 공금
검은색 스니커즈가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샹들리에 불빛이 어른어른하게 비치는 대리석 바닥을 성큼성큼 짓밟으며 나아가던 스니커즈는 래화 앞에서 멈춰 섰다. 래화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래에는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위에는 딱 붙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가죽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체격이 상당해서, 고개를 한참 젖힌 후에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남자는 독특한 얼굴의 미인이었다. 옅은 갈색 피부 위에 자리한 날렵한 이목구비를 보고 있노라면, 뭔가 설명할 수 없이 얄궂은 느낌이 들었다. 쭉 찢어진 눈매와 웃는 듯 마는 듯 끝이 살짝 올라간 입매가 특이한 탓인 듯했다.
전체적으로 날티가 풀풀 흐르는 외모는 목까지 올라오는 뱀 문신에서 정점을 찍었다. 잘 그을린 피부 위에 그려진 뱀 문신은 머리가 셔츠 깃 너머로 삐죽 솟아 있었다. 아마 가슴팍까지 길게 이어지는 문신인 듯했다.
뱀 문신을 응시하던 래화는 마침내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닿자, 무표정하던 남자가 씩 웃어 보였다.
“이래화 씨?”
목소리가 낮고 묵직했다. 래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래화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직원이 재빠르게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하지만 메뉴판이 탁자 위에 닿기도 전에, 남자는 가볍게 손을 까닥이며 주문했다.
“아이스 초코.”
신속한 주문에 점원이 살짝 당황했다가 이내 웃으며 사라졌다. 래화는 미지근하게 식은 카페라테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흘긋 남자를 보았다.
생긴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만 마실 것처럼 생겼는데…….
희미한 온기가 남은 커피를 천천히 삼키며 남자를 관찰하는데, 그가 눈매를 찌푸렸다.
“아, 잠깐만요.”
남자는 서류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더니 툭툭 두드렸다. 남자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가 그려진 태블릿을 들여다보는 사이, 래화는 소파 너머로 삐져나온 그의 무릎을 보았다.
호텔 카페의 소파가 제법 큰 편인데도 남자에게는 조금 작아 보였다. 확실히 한국에서 보기 힘든 장신이었다.
못해도 190cm는 넘을 것 같았다. 체구가 커서 손도 큰 모양인지, 널찍한 태블릿도 한 손으로 쥐고 있었다.
금방 일 처리를 끝낸 남자는 태블릿을 소파 구석에 처박았다. 때마침 직원이 긴 유리컵에 담긴 아이스 초코를 가져다주었다.
남자는 빨대 비닐을 벗겨내고는 아이스 초코를 쭉 빨아 마셨다. 아이스 초코는 한 모금에 절반이 훅 사라져 버렸다.
반만 남은 아이스 초코를 내려놓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일단 이거 받으시고.”
빳빳한 종이에 적힌 남자의 이름, 권이태.
그 위에 적힌 ‘Private Military Company’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래화는 명함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남자의 눈길이 래화의 손가락 끝에 잠시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그가 턱 끝을 까딱였다.
“그래서 우리 고객님은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겁니까?”
권이태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정부나 기업이 아닌 개인이 대형 민간 군사 기업을, 그중에서도 특히 몸값 비싸기로 유명한 이 남자를 고용하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래화는 그가 필요했다.
‘권이태’가 아니라면 래화의 의뢰를 받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래화는 침착하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나랑 결혼해 주세요.”
권이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와…….”
매끈한 입술 사이로 진심 어린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고객님, 혹시 또라이세요?”
“등본에 이혼 경력 찍혀도 괜찮을 또라이가 당신밖에 없어서요.”
래화는 생각해 온 조건을 빠르고 명료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기간은 혼인 신고를 하는 시점에서부터 1년. 착수금 10억에 성공 보수 10억, 합쳐서 총 20억.”
권이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개인이 부르기에는 큰 금액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장난치는 거라고 여길 액수이나, 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래화에 대해 뒷조사를 하고 왔을 테니 말이다.
“1년 동안 내 법적 보호자가 되어서 날 지켜 줘요.”
비죽비죽 웃던 권이태는 유리컵을 집어 들었다. 남은 아이스 초코를 단박에 끝장낸 그가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남편 노릇을 해 달라?”
“네.”
“동거도 하면서?”
“그리고 남들 눈에는 사랑이 있는 결혼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아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갔다. 시원한 웃음에 주변 사람들이 흘긋흘긋 돌아보았다. 여러모로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즐겁게 웃어 대던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가느스름한 눈웃음과 함께, 입술을 혀로 핥으며 속삭였다.
“알았어, 자기야.”
1화
대산 건설의 무남독녀, 이래화.
하지만 래화는 중견 기업의 외동딸이라는 타이틀보다, 다른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바로 ‘류설연의 딸’이었다.
한국 미술계 최고의 문제아였던 류설연은 화려한 외모와 독특한 성격으로 연예인보다 더한 유명세를 누렸다.
어린 딸을 키우는 미혼모임에도 불구하고 류설연에게는 여러 남자가 매달렸는데, 가장 끈질겼던 이가 대산 건설의 이정환이었다.
이정환은 오래도록 류설연을 쫓아다닌 끝에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류설연은 모든 활동을 멈추고 대산의 사모님으로 살았다.
쥐 죽은 듯 살던 류설연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수년이 지난 후였다.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덕분일까. 화풍을 새롭게 싹 뒤바꾸고 나타난 그녀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재능을 펼쳤고,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없이 위를 향해 뻗어 나가던 류설연의 최후는 불행했다. 어느 날 돌연히 개인 화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이다.
미혼모에서 중견 기업의 안주인이 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려는 순간에 벌어진 자살.
화려하고 굴곡 많은 인생의 종지부로 더없이 잘 어울리는,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모든 언론이 달려들어 류설연의 죽음을 물고 뜯었다.
그때 함께 물어뜯긴 것이 바로 그녀의 딸, 이래화였다.
이래화가 류설연의 시체 앞에서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온갖 추측을 거듭하며 제멋대로 자극적인 기사들을 뿌려 댔다.
하지만 대산은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장례를 치르기만 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요란했던 죽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옅어졌다.
그리고 10년 후.
이래화는 권이태를 찾아가 청혼했다.
“…….”
정오의 햇살이 스며드는 카페는 평온했다.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맴돌고, 드문드문 앉아 있는 손님들은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안온한 평화 속에서 래화도 조용하게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세제 거품을 내어 수세미로 머그컵과 유리컵을 삭삭 문지르고, 뜨거운 물로 헹궈서 하나씩 건조대에 올려놓던 때였다.
딸랑.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래화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
훤칠한 장신의 남자가 느긋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래화는 잠시 멈칫했다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세요.”
실실 웃으며 카운터로 걸어오는 남자는 권이태였다.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던 저번과 달리, 오늘은 슬랙스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옷 자체는 저번보다 훨씬 단정해졌지만,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놓고 소매까지 걷은 탓인지 건들건들한 분위기는 똑같았다. 대각선으로 멘 검정색 가죽 슬링백도 날티에 한몫하고 있었다.
래화는 눈동자를 굴려 카페 안을 살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순간부터 손님들이 죄다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쏠리는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권이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남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 지극히 익숙한 듯했다. 아니,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주목받는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래화 앞에 멈춰선 권이태가 보란 듯이 카페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래화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대체 카페 아르바이트는 왜 하는 건가요, 고객님? 고급 오피스텔 살고 외제 차 끌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라니.”
대산 건설의 외동딸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래화도 잘 알았다. 담담하게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규칙적으로 살려구요. 적당한 사회생활이 없으면 정신 건강에 안 좋으니까.”
권이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고객님 진짜 대단한 또라이네요.”
누가 누구보고 또라이라는 건지…….
솔직히 래화가 또라이라면, 눈앞에 선 이 남자는 또라이들의 왕 정도는 될 터였다. 정상인으로 살기 위해 다분히 노력하는 래화로서는 몹시 억울한 취급이었다. 그가 더 헛소리하기 전에 화제를 돌려 버렸다.
“왜 이렇게 일찍 찾아왔어요?”
오늘 만나기로 약속하긴 했었다. 앞으로 권이태의 집에서 동거하기로 한지라, 짐을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여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불쑥 일하는 카페로 찾아온 것이다. 뾰족한 질문에 권이태가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고객님이 나한테 알려 주지 않은 게 있어서.”
시선이 단단하게 얽혔다. 문득 남자의 눈동자가 무척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래화의 옅고 투명한 갈색 눈동자와 다르게, 선명하고 검은 눈동자였다.
색이 어찌나 짙은지, 검은자위와 흰자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선명한 색채는 원래도 날카로운 눈빛을 더욱 힘 있게 만들었다. 오래도록 마주하기엔 불편한 눈이었다. 권이태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자기, 아빠한테 결혼 허락 안 받았어?”
“응.”
짤막한 대답에 쭉 찢어진 눈매가 휘어졌다. 새까만 눈동자 위로 재밌어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래화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이 결혼 반대하거든.”
“그거 큰일이네.”
“너도 이십억 공짜로 삼킬 생각은 아니었을 거 아냐. 이 정도는 감안해야지.”
래화는 그의 가슴팍을 살짝 짚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조금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밀어냈다. 바짝 달라붙었던 얼굴이 드디어 떨어졌다.
“그리고 자꾸 반말할래? 너 나보다 한 살 어리잖아.”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권이태는 눈썹을 설핏 찌푸리며 짐짓 놀랐다는 듯 물었다.
“누나, 꼰대였어?”
“…….”
“남편이랑 반말해야 친해 보이지.”
사랑이 있어 보이는 결혼을 요구한 쪽은 래화였다. 그럴듯한 논리에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권이태가 검지를 구부려 카운터를 똑똑 두들겼다.
“여보, 자기, 누나. 뭐로 불러 줄까?”
“……래화라고 불러, 그냥.”
피로감에 지쳐 맥없이 답했다. 그를 고용한 것에 짧은 후회를 느끼는 사이, 권이태가 씩 웃었다. 그는 자신이 얻어낸 호칭을 곧장 불러 보았다.
“래화야.”
제법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오싹 소름이 돋아서, 래화는 어깨를 움츠렸다. 묘하게 긴장한 채로 권이태를 쳐다보던 때였다.
그가 갑자기 핸드폰을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보여?”
후면 카메라를 켜 놓은 핸드폰은 권이태의 어깨 너머를 비췄다. 화면 속에서 한 남자 손님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쪽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손님은 권이태가 카페에 도착하기 직전에 들어온 이였다.
“오늘 혼인 신고 넣으러 구청 갔는데, 거기서부터 저놈이 따라붙더라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며칠간 무사히 지켜 온 평정심이 거짓말처럼 단숨에 산산이 조각났다.
아버지가 벌써 눈치를 챘다.
어차피 들킬 일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걸릴 줄은 몰랐다. 가빠지는 호흡에 래화는 조용히 손을 움켜쥐었다.
카운터 위에 놓인 래화의 손이 잘게 떨렸다. 권이태의 시선이 흘긋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래화를 보았다.
“상황 보니까 대충……. 장인어른으로부터 와이프를 지켜야 하는 건가?”
“맞아.”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회장님은 싫어하시는 일이야. 1년 안에 해낼 건데, 그동안에만 날 지켜 주면 돼.”
딱 1년이었다.
아버지, 이정환에게서 벗어나 그림을 그릴 시간. 1년 안에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 못할 일이었다.
절벽 끝까지 내몰려 찾아낸 마지막 수단이 권이태와의 결혼이었는데, 그마저 저를 지켜 줄 수 없다면…….
밀려오는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혹시 이정환이 두려워 계약을 취소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던 래화는 입술을 벌렸다.
카운터 앞이 비어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카페 안쪽으로 걸어가는 권이태가 보였다.
긴 다리를 뻗어 여유롭게 걸어간 그는 남자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남자 손님은 다급하게 손가락을 놀려 메시지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권이태가 다가오자 남자는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고서 침착하게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권이태는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누가 봐도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양아치 같은 모습이었다.
흘금흘금 쳐다보던 다른 손님들이 비상식적인 행동에 깜짝 놀라 수군거렸다. 권이태가 쯧쯧 혀를 찼다.
“연기가 너무 형편없잖아.”
“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지금 굉장히 불쾌한데, 계속 이러시면 경찰에 시, 신, 신고를.”
남자가 흠칫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권이태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를 지긋하게 누르듯 짚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졌다.
“보통은 내가 이렇게 다가가면…….”
권이태는 내리깐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비죽 웃었다.
“바로 쫄거든.”
“…….”
“너같이 훈련 받은 놈들 빼고.”
남자가 눈을 부릅뜬 순간이었다. 뻑 하는 소리와 동시에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권이태가 남자를 주먹으로 후려갈긴 것이다.